348화 그녀들의 사정
“새벽 공기가 차가운데 좀 더 누워 있지 그러느냐, 아가?”
선우진의 아버지 선우중의 따듯한 말에 진소은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 아버님. 공자가 출발하는 모습을 못 보게 되면 오히려 몸이 더 불편할 것 같아서요.”
아직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진소은은 진짜 며느리, 혹은 딸처럼 대해 주는 선우중과 소난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별로 정을 나누지 못했던 친부 진공무보다 오히려 더 애틋한 사이가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현재 위급한 상황을 완전히 넘기고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 다 선우진이 가르쳐 준 묵랑심법 덕분이었다.
물론 아직 묵랑심법의 성취가 낮아 상처가 극적으로 재생되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배에서 등까지 두껍게 관통됐었던 그녀의 상처는 이제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뿐만이 아닌 산산이 찢겨져 버렸던 안쪽 내장의 상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아닌 마음의 상태는 좀 달랐다.
몸의 상처와 달리 그녀의 마음은 전혀 멀쩡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조심히 잘 다녀오거라, 진아.”
“네, 며칠 후에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선우중과 소난소는 역천혈마와의 결전을 위해 출발하려는 선우진에게 애써 웃는 모습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선우진은 그런 두 사람에게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쾌활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아주 잠깐 나갔다 금방 돌아올 것만 같은 가벼운 인사였다.
부모님과의 가볍고도 무거운 인사가 끝나자 해남파의 가주들과 묘아란 또한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선우진을 배웅해줬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시오, 장문인.”
“무운을 빌어요.”
“놈을 박살 내 버리시오!”
그들의 인사에도 역시 선우진은 여유 있게 씨익 웃으며 대답해줬다.
“염려 마십시오. 해남파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을 재임한 장문인으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반드시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으하하하! 믿고 있겠소, 장문인!”
이번 결전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은 여령색마 손은상과 남해성녀 시서우의 두 화경 고수, 그리고 용가주인 용우신과 선우진의 두 천하삼십육성급 고수, 거기에 귀멸육합검진을 쓸 경우 천하삼십육성급 무위를 발휘할 수 있는 육합검수 파천조뿐이었다.
그 아래 급의 고수들은 함께 가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무의미한 희생만 될 거라는 게 선우진의 판단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육합검수들이나 천하삼십육성급 무인들 또한 화경의 고수라는 괴수들 간의 싸움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작은 변수가 되길 기대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떠나는 이들이 얼마 안 된다 보니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이들 역시 많지 않았다.
역천혈마를 요격하는 일이 워낙 극비리에 진행되는 일이기에 요격대의 최측근 지인들과 각 문파의 수뇌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공자. 천하의 평안이 여러분께 달렸구려.”
“건투를 비오, 공자!”
“예, 진인. 그리고 모 대협. 다녀와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가족들, 해남파 가주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형산파의 장문인인 청공진인과 이제 형산파의 이인자가 된 번강검객 모동주와도 작별 인사를 나눈 선우진은 이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진소은 쪽을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요즘 늘 그랬듯 선우중과 소난소의 뒤에 숨듯이 서서 두 손을 꼭 모은 채 자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선우진은 요즘 진소은이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늘 기회를 보다 슬쩍 옆으로 다가오곤 했던 그녀가 최근엔 어쩐지 전혀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제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지. 아무리 부모님과 함께 있었다고는 해도 어쩐지 눈도 피하는 것 같았고, 말도 전혀 하지 않았으니….’
지금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도 매우 이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인사를 나누기도 좀 그랬다.
주변에 사람이 많았기에 선우진도 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뭐, 부모님과는 친근하게 지내고 있는 듯하니 괜찮은 거겠지?’
결국 선우진은 그녀와 마지막일지 모를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그 시각 고개를 푹 숙인 진소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게 마지막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마디라도 선우진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차마 앞으로 나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소은이 선우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된 건 바로 그날 이후부터였다.
그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약혼자인 당여은을 구하러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말이다.
물론 선우진 자신이 직접 진소은의 앞에서 그런 티를 낸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진소은이 위험을 넘길 때까지 계속 옆에 붙어 있어 줬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비를 넘겼을 때도 웃으며 이렇게 말해 줬었다.
‘천만다행이오, 진 소저. 이제 위급한 상황은 넘긴 것 같소. 그러니 계속 안정을 취하며 묵랑심법을 운기하시오. 이제부턴 회복에만 전념해야 하오.’
당시의 진소은은 멀쩡한 정신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곤 해도 계속해서 배를 찌르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선우진의 표정에서 짙은 슬픔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무거워 보여 차마 이유조차 물어볼 수 없었던 그런 그림자였다.
그 모습은 진소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어떤 위기가 닥쳐오든 늘 아무렇지 않게 극복하는 모습만을 보여줬던 선우진에게서 처음 보게 된 너무도 무거운 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혹시 그때 그 미녀가 역천혈마에 빙의됐기 때문일까?’
진소은은 어쩐지 연태진도 그 이유에 대해 자신에게 숨기는 것 같다는 느낌에,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식사를 가져온 형산파 문도에게 선우진의 근황에 대해 물어봤었다.
그러자 그녀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우진이 약혼자인 당여은의 위기를 알면서도 그녀를 구하러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걸.
그래서 멍하니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소은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공자가… 약혼자를 구하러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그 순간 처음 떠오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선우진이 그런 결정을 한 이유가 진소은 자신 때문이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으로 떠오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 그의 약혼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가 자신을 볼 때마다 그 이유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선우 공자가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가 약혼자의 위기를, 어쩌면 약혼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다니.
만약 자신이 선우진이라면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후, 실제로도 선우진은 한 번도 진소은을 만나러 오지 않았었다.
그 이유야 물론 진소은을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여은의 소식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소은에겐 그 사실이 그렇게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우진이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점점 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선우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 건….
죄책감과 두려움, 자괴감이 그녀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그의 앞에 나설 자신이 없었다.
‘나 때문에 공자의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는데, 그런 내가 어떻게 공자의 옆에 있을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점점 좀먹어갔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옆에서 사라져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그의 여인이 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도움이 되는 사람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게 노력했었는데….’
아마 그것마저도 실패한 모양이었다.
정말 최악이었다.
***
선우진은 진소은의 표정을, 그녀의 눈물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무너져가는 그녀의 마음도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돌려 생사괴의 마종환과 애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령색마 손은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해성녀 시서우와 용가주 용우신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고, 육합검수들 또한 대기한 채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손은상만 준비가 되면 떠날 수 있었다.
선우진은 이제 입을 열어 손은상을 부르려 했다.
“손 선…!”
그때였다.
누군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공자?
똑 부러지는 여인의 목소리.
해남묘가의 신묘검봉 묘아란의 목소리였다.
선우진은 잠깐 손은상을 부르려던 걸 멈추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전음으로 반문했다.
- 너무하다니. 뭐가 말이오, 묘 소저?
그러자 묘아란이 계속해서 전음으로 반문했다.
- 정말 진 소저를 저렇게 두고 그냥 갈 거예요? 저 표정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어요?
‘표정?’
그녀의 말에 선우진은 문득 진소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려봤다.
그러자 눈물이 가득한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흠칫 놀라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선우진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
눈물? 왜지?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최근 그녀의 행동이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그럼 뭐지?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선우진은 잠시 그녀의 눈물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원인에 대해 고민해봤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다시 묘아란의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것 봐요. 저걸 보고도 모르겠어요?
그 질문에 진소은을 바라보던 선우진이 생각했다.
‘…진짜 모르겠는데?’
그로선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진소은을 치료해 준 이후 다시 보지도 못했는데 그녀가 왜 저러는지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역시 여인에 관한 부분은 자신의 지혜가 닿지 않는 부분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선우진은 그냥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 제 아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구려, 소저. 부디 제게 가르침을 좀 주시겠소?
그러자 한숨을 내쉰 묘아란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 공자, 약혼자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진 소저를 찾아간 적 없죠?
- 그야….
당연히 없었다.
당여은의 소식을 기다릴 때는 애초에 진소은만이 아닌 누구도 찾아가지 않았었고, 그 이후엔 안탕산에 가느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다녀온 다음부턴 그녀가 늘 부모님과 함께 있었기에 따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닌가?’
선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묘아란의 전음이 다시 이어졌다.
- 평범한 여인이라도 다른 여인을 신경 쓰느라 자신을 찾지 않았다면 서운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겠죠. 게다가 진 소저처럼 착한 여인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구하느라 약혼자를 구하러 가지 못했으니 그게 자신의 탓이라고요. 공자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공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저는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요?
- 예?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당여은을 구하러 가지 않고 진소은을 치료하기로 한 건 자신이 직접 했던 선택이었는데, 아무렴 그 선택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이번엔 묵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도 여자에 대해서는 잘 몰라 뭐라 말하기는 뭐하지만… 진 소저의 마음이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네. 아무래도 묘 소저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진소은을 다시 바라보았다.
‘죄책감과 자괴감….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처음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착하면 그런 생각까지 한단 말인가.
그녀 자신도 그 일 때문에 죽을 뻔했으면서 거기에 대해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책감을 갖는다고?
저렇게 착하기만 해서야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선우진은 문득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의 행적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진가장의 숙원이던 자연곤을 익히고도 형제들의 괄시를 묵묵히 참아내던 첫 만남 때의 모습.
진태도에게 쫓길 때 선우진의 방해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정인인 당여은의 존재를 알고 나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늘 한결같이 웃어 줬던 모습까지….
그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녀를 몰라주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바보 같을 정도의 선함과 순수함, 그래서 주변 사람들까지도 순수하게 만들어 줬던 그 모습이 바로 그녀의 매력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라면 그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든 당여은이 그녀의 연적이든 전혀 상관없이, 자신 때문에 그녀를 구하러 가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선우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러니 계속 옆에서 지켜봐 줘야 할 수밖에….’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진소은은 좀처럼 다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혹시라도 선우진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눈물을 봤을까 봐, 그래서 혹시라도 큰일을 위해 떠나는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까 봐 걱정이 됐다.
물론 그가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아니,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걱정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그보다 더 컸다.
그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앞에 문득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누군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에 놀란 진소은은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차례로 익숙한 신발과 바지, 흑의를 입은 탄탄한 가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완전히 들었을 때 그녀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따뜻하게 웃고 있는 선우진의 얼굴을….
“아아…!”
너무 놀란 나머지 진소은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너무 당황해 동그래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은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천천히, 그리고 꼭 안아줬다.
그의 품에 폭 안긴 진소은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비현실적이고 몽롱한 기분이었다.
그때 선우진이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여줬다.
“아픈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해 미안하오, 진 소저. 아니…. 소은. 내가 다녀올 때까지 부디 몸조리 잘하고 있으시오.”
진소은은 순간 ‘헉!’하고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을 ‘소은’이라고 부른 순간 심장마저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
진소은을 호흡불능으로 만들어버린 선우진은 이제 살짝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나도 귀여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문득 그녀의 앵두 같은 분홍빛 입술도 눈에 들어왔다.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몰려왔다.
지난번 형산의 봉우리 위에서 노을빛에 둘러싸였던 그때처럼.
그때의 부드러운 감촉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충분히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의 심안은 지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있음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후, 선우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소은에게서 떨어져 몸을 휙 돌리고는 손은상을 향해 말했다.
“손 선배, 이제 그만…! 아, 이미 인사를 끝내셨군요. 그럼 출발할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당당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 남잔데?’라고 말하는 손은상의 목소리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
묘아란은 살짝 씁쓸한 표정으로 선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말해 줘서 일어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입맛이 쓴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선우진의 부모님이 보고 있는 앞에서 당당히 진소은을 안아준 선우진의 모습은 분명 너무도 멋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운하기도 했다.
또 그에게 안겨 표정이 풀린 진소은을 보고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또 질투도 났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선우진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도 씁쓸하고 조금은 비참하기까지 했다.
묘아란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받아들여, 묘아란. 이게 현재의 네 위치야.’
그녀가 냉정히 판단하기에 선우진에게 있어 자신의 위치는 그저 해남파의 문도 중 한 명일 뿐, 절대 그 이상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세운 계획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모사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적인 부분에서일 뿐이었다.
최근의 선우진은 자신을 무척 정중하게 대했다.
정말 ‘정중하게’만 대했다.
그 태도는 마치 공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지만 사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전혀 가까워질 틈을 주지 않았다.
묘아란은 그 태도를 그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의 대화와 선우진의 부모님을 통해 보냈던 자신의 마음에 대한 대답 말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아니 여자로 볼 생각조차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도 자존심이 상하고 또 야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처음엔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이렇게 단호하게? 아무런 여지도 없이?’
그녀는 무려 해남제일미라고 불리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것도 해남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그렇게 불리고 있을 뿐 사파사대미녀인 연태진이나 우난설처럼 무림에서 활발히 활동했었다면 그보다 훨씬 더 넓은 곳에서 인정받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것에 딱히 의미를 부여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남자에게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정도밖에 안 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전혀 존중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남자는 그녀를 전혀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더 상처받지 않도록 그냥 깔끔하게 그를 포기하던가, 아니면 구질구질하게 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묘아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이든 자존심 상하는 선택이네. 너 정말 별거 아니었구나, 묘아란.’
하지만 그런 자괴감과는 별개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남자와의 혼인이라는 것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귀찮아 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한 오라버니인 인파랑의 정혼자였기에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였을 뿐, 한 번도 이성이나 혼인이라는 것에 대해 설레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흥미가 있는 건 오직 선우진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해서였다.
그녀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근거리게 만들어 줬던 바로 그 사람 말이다.
그러니 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선우진이 아니라면 자신은 어차피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은 채 혼자 살게 될 터, 그에게 집중하는 건 묘아란에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야 하다니,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말이야.’
물론 그녀는 해남파의 두뇌라는 해남묘가에서도 지혜롭기로 이름 높은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눈물로 매달리며 애원한다던가 하는 수준 낮은 방법을 쓸 리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여자라는 생각이 남자들에게 매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여자 또한 매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
그녀는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을 뿐 남자들을 잘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녀는 지혜롭기로 유명한 해남묘가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여인이었고, 수없이 많은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아온 해남제일미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두 번의 삶을 거치는 동안에도 여인과 접촉할 기회조차 거의 없었던 선우진과는 경험의 질에서 차원을 달리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선우진의 주변에서 동료로 머물며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방금 진소은의 상황을 그에게 알려준 것도 그 방법의 일환이었다.
‘선우 공자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그에게 빚까지 지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지.’
그녀가 파악한 선우진의 성격상 이번에 자신에게 진 빚을 절대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마음의 빚을 쌓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는 게 묘아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묘아란은 고개를 숙인 채 씁쓸히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머리로 세웠던 계획이 가슴에는 좀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지혜로운 그녀라 해도 자신의 감정만큼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후우우우.’
묘아란이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 마음을 좀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귀에 전음이 들어왔다.
-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하오, 묘 소저. 다녀와서 다시 인사드리겠소.
그 말을 들은 묘아란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선우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 순간 살짝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낸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미소였지만, 묘아란은 완전히 멍한 표정이 되어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어쩐지 방금 그가 지어 준 웃음만으로도 조금 전까지의 서운함이 몽땅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묘아란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짧은 웃음 한 번에 휘둘리는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남묘가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지금 이 모습을 봤다면 아무도 그런 얘기는 못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