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56화 (356/359)

356화 그 후의 이야기들-1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온 청성괴선 청광진인의 다섯째 제자 이건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사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선우진의 의형이자 사천성의 혈교도 박멸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온 청성파의 제자 적하신검 화영빈은 빙긋이 웃으며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일세, 사제. 그새 더 강해진 것 같군. 이젠 이 모자란 사형의 감으론 사제의 성취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네.”

앞을 못 보는 이 천재 사제는 예전 선우진 일행과 헤어진 이후 줄곧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라고 해봐야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까 싶었는데….

‘초절정? 아니, 그 이상인가? 정말 대단하군.’

아직 초절정의 벽을 넘지 못한 화영빈은 원래 자신보다 하수였던 사제의 놀라운 발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런 발전이 가능하긴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화영빈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더한 사람도 있으니….’

화영빈은 사제 이건의 좋은 호적수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의제 선우진의 놀라운 발전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자신이 많이 늙은 것도 아닌데 장강의 뒷 물결이 너무 격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이건이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갑자기 폐관을 중지하고 내려오라는 스승님의 전언이 와서 놀랐습니다.”

원래 이건의 스승 청광진인은 그에게 신화경의 실마리를 잡기 전까지는 절대 산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스승이 갑자기 그에게 급히 폐관을 끝내고 내려오라는 전언을 보냈던 것이었다.

이건으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스승의 속마음을 짐작한 화영빈이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이라….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무슨 얘기부터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자넨 어디까지 알고 있나?”

“음, 두 달쯤 전에 사혜혈마 전무광이 천의성녀 해청연과 협왕 모용검, 무림맹 군사 제갈지강까지 섭혼해 무림을 뒤집으려 했다가 실패하고 죽었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진 그 친구가 그때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 얘기도요. 혹시 그 일 때문일까요?”

이건이 지금 말한 부분은 딱 외부에 알려진 만큼의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역천혈마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모용검이나 제갈지강 또한 그저 전무광의 섭혼에 당해 이제껏 그런 짓들을 저지른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화영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충 비슷하긴 하네. 숨겨진 속사정이 많긴 하지만 그건 천천히 들어도 될 테고, 일단 가면서 얘기하지.”

그렇게 말한 화영빈은 이건과 보조를 맞춰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또 만나기로 했기에 약속시간에 맞춰 가려면 조금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자 비조처럼 날듯이 달리면서도 여전히 평온한 신색의 이건이 다시 물었다.

“근데 그 일 때문에 제가 산에서 내려와야 할 일이 있을까요, 사형? 전무광이 죽었으니 이제 다 해결된 거지 않습니까?”

그의 질문에 화영빈이 역시 평온한 신색으로 대답해줬다.

“그래, 우리도 그런 줄만 알았네. 전무광이 죽었으니 모두 다 끝났다고 말일세. 그런데 그게 아니었더군.”

“예?”

이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혈마 전무광이 죽고 그의 음모를 다 좌절시켰는데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니.

또 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화영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 천의검성 해운백 대협께서 새로운 무림맹주로 취임하신다는 얘기는 들었나?”

“아, 예. 들었습니다. 협왕께서 혈마에게 섭혼당했던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시고 스스로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은퇴하셨다고요.”

화영빈은 그 말에도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강제로 끌어내려진 것이었고 이후로도 모처에 감금당한 채 지내게 될 예정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화영빈은 그 사실은 나중에 말해주기로 하고 일단 중요한 부분을 먼저 얘기해 줬다.

“그래, 근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네. 검성 어르신의 맹주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고 있던 여러 문파의 사람들이 습격을 당해 전멸해 버렸거든.”

“예?! 전멸이라고요?! 누가 누구에게 말입니까?”

“일단 당한 사람들은 태산파, 황보세가, 그리고… 화산파의 사절단이라네.”

“…예?! 화산파요?!”

이건은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문파들도 만만한 문파들은 아니었지만 화산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건과 화영빈이 속한 청성파보다는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문파였다.

그런데 그들이 습격당해 전멸해 버리다니,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은 급히 물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그러자 화영빈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혈교오마의 일인인 구유음마 지기음이었네. 그 사실도 얼마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었는데, 그가 또 소림을 습격했다 급히 구원을 오신 검성을 만나 후퇴해 버린 바람에 그나마 알 수 있게 됐지.”

“구유음마… 지기음이라고요?”

혈교오마 중 아직 생존해 있는 구유음마 지기음과 백면시마 구우절은 최후의 결전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정파 측 사람들은 해청연으로부터 그들이 혈마인이 되는 시술을 받고 있었고 그 시기가 전무광, 척강보다 늦어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정파 측 사람들로선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마저 싸움에 참여했다면 전력의 무게추가 완전히 기울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또한 그때 오지 못했던 그들이 지금은 완전한 혈마인이 된 상태라는 뜻이기도 했다.

천하삼십육성도 아니었던 결허사태를 화경 초입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 혈마인 말이다.

원래도 천하삼삽육성이었던 그들이었으니, 지금은 아마도 화경 초입을 넘어선 수준의 강자가 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덕분에 천하의 무림인들은 이제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과거 무림의 음지를 숨어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저 모습이 원래 혈교도들 본연의 모습이었음을….

역설적이게도 혈마가 운남성을 차지했던 덕분에 이제껏 그런 모습이 사라졌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데 이젠 그냥 마두도 아닌 화경의 경지에 오른 마두가 과거와 같은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얘기였다.

혈마 전무광을 무찔렀건만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린 꼴이었다.

그러자 전후 사정을 들은 이건이 질린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화경 초입을 넘어선 수준의 강자가 되었다고요?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 정도면 우리 사부님보다도 강한 거잖습니까?”

그랬다.

청성괴선 청광진인이 아직 화경 초입의 경지에 머물러 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은 아마도 절대자 십오인들 중에서도 중간 이상 급의 실력을 지니게 됐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위협적인 부분은 더 있었다.

화영빈은 푹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난감한 건 그뿐이 아닐세. 단지 강하기만 한 거면 그래도 나을 텐데 하필 구유음마 지기음은 은신술과 신법의 달인이기까지 하지.”

“아, 그, 그럼?”

이건은 그 말뜻을 깨닫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화영빈은 은신술과 신법이 특기인 화경의 고수가 어둠 속에 숨은 채 사람을 학살하고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는 것을 떠나 먼저 그를 발견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자를 대체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화영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일단 화경의 경지에 이르신 절대자분들께서 지역을 나누어 곳곳에 대기하시며 놈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 중일세. 이제 무림맹주이신 검성 어르신과 사왕련의 사왕 어르신께서 함께 뜻을 모아 대비하실 수 있게 됐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지.”

“아아! 그건 정말 다행이로군요.”

해청연으로부터 듣게 된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바로 사왕 괴갈현이 죽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역천혈마 과염이 당시 혈마인의 위력에 매우 감동을 받은 상태였고, 그렇기에 사왕을 혈마인으로 만들 생각에 생포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시 사왕련주였던 설풍은 사왕을 무사히 구해 내고는 다시 후계자 신분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사왕련이 원래의 천하삼대세력이었던 위용을 회복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사왕은 중계자 역할을 한 설풍의 노력으로 검성과 활발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천하삼대세력 중 무림맹과 사왕련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화영빈의 말에 약간 안심한 표정이 됐던 이건은 문득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절대자 열다섯 분들 중에 어떤 분들께서 거기 계신 겁니까?”

“흠, 가만있자. 일제, 이왕, 삼성, 삼마, 삼괴, 삼협분들 중 투왕 손 여협과 삼성, 삼협분들이 모두 거기 계시네. 삼괴 중 괴검 서일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쪽에서 돕고 있지.”

절대자 십오 인의 면면은 혈마 전무광의 죽음 이후로 크게 바뀌었다.

이왕 중 협왕이었던 모용검 대신 여령색마 손은상이 여령투왕이란 칭호를 얻고 이왕의 한 명이 되었고, 사마는 그들 중 천마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죽었기에 천마와 이제 화경급의 강자가 된 구유음마 지기음, 백면시마 구우절까지 더해 삼마가 되었다.

오괴 중에서는 괴흉 가추학이 죽은 상태였다.

그리고 청성괴선이라 불리던 청광진인은 이제 괴선이 아닌 협선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혈마와 싸워 무림의 안위를 지킨 그를 계속 괴선이라고 부른다는 건 옳지 않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그래서 협선 청광진인을 포함해 새롭게 화경 초입의 경지에 오른 백학노검 양문헌과 협중협이라는 별호를 얻은 용가주 용우신이 새롭게 절대자 삼협의 일인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로선 알 수 없었지만 양문헌과 용우신은 모두 월하환검무 비월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이건은 화영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도 그분들을 도와 구유음마 지기음을 잡으러 가는 건가요?”

이건은 상황을 알고 나니 스승 청광진인이 폐관 중인 자신을 부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신과 신법에 최적화된 화경 고수를 상대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건의 생각과는 달리 화영빈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유음마를 잡는 일이 아닐세.”

“…예? 그럼 대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림맹 군사였던 제갈지강이 모용검과 함께 유폐된 후, 현재 검성 해운백의 밑에서 무림맹 군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사마세가의 사마여량이었다.

그는 선우진의 추천으로 검성을 만나게 되었고, 검성은 그와 첫 만난 자리에서 화끈하게 그에게 무림맹의 군사직을 제안했었다.

사마여량이 감격하며 수락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재 무림맹의 군사가 된 사마여량은 구유음마의 습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구유음마가 날뛰고 있는 이유는 물론 혈마의 복수를 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성동격서의 계책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성동격서.

구유음마가 사람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지금 저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사마여량에게 그 대상에 대해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시선을 끌어 숨기고 싶어 할 것은 뻔합니다. 바로 저들의 본거지겠지요. 혈마인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는 저들의 본거지 말입니다.’

역천혈마였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해청연의 말에 따르면, 혈마인을 만드는 시술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만드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엇보다 상당히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구유음마와 백면시마가 혈마와 함께 혈마인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마여량의 예측대로라면 구유음마가 이곳에서 날뛰고 있는 이유는 자신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얘기였다.

본거지에서 더 많은 혈마인을 만들어 전력을 강화할 시간을 갖기 위해 말이다.

‘그걸 안 이상,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놈들의 본거지를 공격해 더 이상 전력을 강화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혈마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자, 백면시마를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마여량은 각 문파에 서신을 보내 혈교 토벌을 위한 병력을 모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른바, 혈교토벌대의 창설이었다.

거기까지 얘기를 들은 이건은 이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명의 화경급 강자 지기음을 잡는 일에 자신 정도의 실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남아 있는 혈교의 잔당들을 물리치기 위해선 많은 수의 무인들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이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저희가 가는 곳은…?”

“그래, 운남성일세. 혈교토벌대가 되는 거지. 우리는 일단 선우진 아우의 친우들과 만나 합류한 후 바로 운남성으로 갈 걸세.”

그 후, 화영빈과 이건은 거침없이 달려 사천성 덕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광협검괴의 광검릉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약속했던 덕창의 객잔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광검릉에서 수련하고 있었던 배종관, 사군일, 천주은, 야운향, 제원영 등 비룡대의 사람들과 견중, 적마혁과 같은 선우진의 수하들, 그리고 적마혁의 동생들이었다.

그들 중 광검릉으로 돌아와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던 비사영이 제일 먼저 화영빈을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화 형님! 여깁니다! 오, 건이도 함께 왔네?! 오랜만이다!”

과거 선우진과 함께 비사영과도 친구가 되기로 했던 이건은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영! 반가워! 잘 지냈어?! 엄청 강해졌네?!”

하지만 그렇게 웃으며 손을 맞잡으려던 두 사람은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화영빈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화영빈이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린 모습을….

화영빈은 우뚝 멈춰서서는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한 명만을 뜨겁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충격, 환희, 그리움 등의 감정이 혼탁하게 뒤섞인 절절한 눈빛이었다.

비사영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슬쩍 바라보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화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애절한 눈빛으로 한 명만을 바라보고 있던 화영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정선? 정말, 정말 당신이오?”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광검릉에서 데려왔던 최초의 혈마인, 선우진의 원래 삶에서 정파인들의 악몽이었던 적의혈마녀가 될 운명이었던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이 순간 모두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정혈대전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십여 년 전의 아미검봉 정선사태라는 사실을, 또한 화영빈이 십 년이 넘도록 잊지 못해 방황하게 만들었던 그의 연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선!”

화영빈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로 달려가서는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흐느끼듯 반복해서 말했다.

“고맙소, 고맙소, 정선.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맙소. 하늘님,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으흐흑!”

정선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에 감사한다며 흐느끼고 있는 그를 차마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잠시 그에게 안긴 채 멍하니 있던 그녀는 문득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천천히 감싸 봤다.

어쩐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 너무도 따뜻하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인을 잊지 못해, 또 그녀의 복수조차 할 수 없어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던 화영빈은 지금 이 순간 뜨겁게 감사했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음에 대한, 그리고 자신이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감사였다.

***

그로부터 이 년 후.

혈교토벌대는 아직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곳곳에 흩어져 습격하는 혈교 마두들의 저항이 너무도 거셌고,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화경 초입급 혈마인들이 엄청나게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반엔 오히려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고작 혈교의 잔당을 설거지하는 일이라며 우습게 봤던 사천당가의 단독토벌대가 전멸당했던 것이었다.

모든 무림인들의 마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초반의 고난은 결속력을 다지게 하는 법.

제대로 된 맹주를 갖게 된 무림맹은 그 상황에 대해서도 빠르게 대처했고, 덕분에 혈교토벌대는 원래의 비룡대 조직을 뼈대로 삼아 훨씬 체계적으로 정비될 수 있었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이 년.

그 시간은 무림맹과 사왕련을 중심으로 정사 무림인들이 일치단결하여 혈교를 상대하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운남성 점창산.

비룡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혈교토벌대는 이제 드디어 혈교의 본부인 점창산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원래 비룡십삼대의 대주였던 폭풍도객 풍양의 부상으로 새롭게 대주가 된 재림관우 금강비성 배종관은 숲 위로 우뚝 솟은 점창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형님.”

초절정 고수이면서 수많은 혈교 마두와 마인들을, 심지어 그들보다도 더 괴물 같은 무력으로 박살 낸 그는 현재 많은 정파 무림인들의 우상이 된 상태였다.

특히 일 년 전 화경급 무력을 지닌 혈마인의 습격 때 황금빛 호신강기를 두른 채 단신으로 혈마인의 공세를 버텨내 수많은 무인들의 생명을 구해냈던 일은 두고두고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무림의 많은 젊은 무인들이 그를 추앙해 외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비룡십일대의 대주이자 현 점창파의 장문인인 점창검룡 사군일이 역시 점창산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드디어… 드디어 여기까지 오고 말았군.”

누구보다 자신의 사문 점창파를 사랑하지만 과거 점창파가 저지른 악행들 때문에 차마 사문의 부활을 꿈꿀 수 없었던 사군일은 마유겸의 죽음을 전해 들은 후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그도 개과천선해 천하를 위해 공을 세우고 죽을 수 있었다면, 점창파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간 계속 거절해왔던 점창파 장문인의 자리를 수락하고는 친우인 점창검호 제원영과 함께 사문의 부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 년.

수많은 악전고투를 거쳐 드디어 본산인 점창산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었다.

그로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역시 그들과 함께 점창산을 바라보고 있던 비룡십대의 대주 적하신검 화영빈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자네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무척 감격스럽군. 드디어 마지막 싸움이라니, 빨리 저곳에 있을 백면시마를 처치하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네.”

그렇게 말한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연인 정선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소, 정선?”

이 년 전 정선과 재회한 이후로 화영빈은 잠시도 그녀와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며 혈교 토벌도 포기한 채 평생 그녀의 호위무사로 살겠다고 선언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품에서 그리운 무언가를 발견한 정선이 오히려 그에게 함께 혈교를 토벌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초절정 고수급의 무력을 갖춘 혈마인 정선과 얼마 후 초절정의 경지로 올라섰던 화영빈, 이 두 사람의 명성과 사연은 무림의 큰 화제가 되었고 두 사람이 들고 다니는 청색과 홍색 검 덕분에 청홍쌍검이라고 불리며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청홍쌈검을 그들에게 선물해 준 사람이 선우진이라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이었다.

화영빈의 물음에 정선은 역시 애틋한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대답했다.

“전 어디든 상관없어요. 가가와 함께라면요.”

그러자 화영빈이 감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정선! 사실 나도 그렇소!”

본산을 앞에 두고 감격에 젖어 있던 사군일은 문득 그들의 행태 앞에서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십여 년 만에 연인을 되찾은 화영빈이나 기억을 잃은 정선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눈꼴이 사나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군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배종관 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오늘 저녁에 신룡대가 도착한다고 했던….”

하지만 그렇게 말하려던 사군일은 배종관 또한 십삼대 부대주인 쾌도묘랑 천주은과 애틋하게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부대주 점창검호 제원영을 바라보며 말을 끝맺었다.

“…가?”

그러자 제원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오늘 저녁에 오는 거 맞고 그들이 도착하면 공격을 시작할 거다. 그러니 괜히 나한테 말 걸지 마라. 나도 속이 불편하니까.”

사군일과 제원영은 모두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

젊은 초절정 고수이자 외모도 출중한 두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 없었지만, 사군일은 점창파를 재건하기 전까진 어떤 여인과도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었고 제원영은 해청연 이후로 어떤 여인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군일은 살짝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좀 더 시야를 넓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점창산의 주변으로 다른 비룡대들도 모두 집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 이천 명이 넘는 무인들, 저들 모두가 지난 이 년간 혈교도와의 악전고투를 버텨낸 정예들이었다.

이제 정말 최후의 결전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드디어….’

이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점창산을 수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장이라도 먼저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배종관의 손을 잡고 서 있던 천주은이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점창파 안에 있을 혈교도들의 전력이 만만치는 않겠죠? 전 조금 걱정이 되네요.”

그녀의 말에 사군일을 비롯한 사람들 모두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종관만이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먼저 그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젓자 배종관 또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검릉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냈던 사군일은 굳이 듣지 않아도 저들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자기가 지켜줄 테니 절대 걱정 마라는 말을 하려고 했겠지. 천 소저는 그런 얘기는 자기 혼자에게만 해 달라고 말해서 먼저 입을 막았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며 사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순박하고 정이 많은 배종관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천주은이 그의 마음을 받아준 건 아직도 살짝 이해가 안 됐다.

배종관보다 먼저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천주은이 혈교전선에서 활약하며 엄청난 명성과 인기를 얻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기보다 약한데도 불구하고 늘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저 당당함이 통한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두 사람의 관계를 떠나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보통 이 주 간격으로 등장하던 혈마인들이 벌써 두 달째 등장하지 않은 점도 그렇고, 화경급의 무력을 지녔을 거라 예상되는 백면시마 구우절이 그곳에 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뿐이 아니지. 최근 구유음마 지기음의 활동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던데. 어쩌면 그도 최후의 결전을 대비해 저 안으로 돌아갔을지도….’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번 전투는 말 그대로 최후의 결전에 걸맞은 엄청난 혈전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사군일과 비슷한 생각을 한 화영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룡대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만으로 이번 전투를 치르는 게 괜찮을까?”

신룡대는 화경급의 무위를 지닌 혈마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창설된 별동대였다.

그들은 모두 천하삼십육성급의 무위를 지닌 신법의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어, 전선 곳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혈마인들이 나타난 곳에 출동해 그들을 요격하는 역할을 맡아왔었다.

그간 그들의 활약은 정말 엄청났었다.

혈교토벌대가 화경급 무위를 지닌 혈마인들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승전하며 점창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이들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만으로 괜찮지 않으면!”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모두가 퍼뜩 고개를 쳐들어 허공을 바라봤을 때였다.

푸른 빛줄기 하나가 순식간에 그들의 옆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타닥!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화영빈을 향해 물었다.

“싸움 안 할 거요, 형님?”

그러자 모두가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영!”

“사영!”

“비 공자!”

그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 비사영이었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그의 지인들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모두 놀랍고도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반겨주었다.

“사영! 잘 지냈어?!”

“저녁때 도착한다더니 어떻게 벌써 왔는가?”

하지만 그를 향한 반가운 목소리는 지인들 사이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곧 그쪽을 바라봤던 다른 비룡대 사람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우오오! 비사영! 신룡대주님이시다!”

“응?! 신풍비응이라고!”

“뭐?! 그들이 벌써 왔어?!”

“됐다! 이제 됐어!”

비사영은 현재 신룡대의 대주를 맡고 있었다.

그가 천하삼십육성에 속하는 강자이자 선우진과 함께 천하제일비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신법의 최강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신룡대의 대주로 지목되었을 땐 지나치게 젊은 그의 나이 때문에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실력으로 모든 논란을 잠재웠었다.

월하환검무를 익힌 그는 엄청난 무위를 선보이며 혈마인들을 상대했고, 지금은 사실상 신룡대 중 유일하게 단신으로 혈마인을 척살할 수 있는 실력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비사영은 사람들의 환대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일이 없어져서 빨리 왔습니다. 또 사마군사께서도 놈들 쪽에서 먼저 기습을 가할지도 모르니 빨리 가보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자 사군일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사마군사? 그럼…?!”

그때였다.

또 한 줄기의 빛이 먼 하늘에서부터 날아와서는 비사영 옆으로 착지했다.

쉬이익! 타닥!

“에고, 죽겠다! 이 망할 놈아! 네놈 머릿속에는 노인공경이라는 단어가 그렇게도 안 들어가느냐?!”

내려오자마자 비사영을 타박하는 이는 바로 홍해아 증칠이었다.

신룡대의 대원인 그는 또한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자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천하오비의 일인이기도 했다.

그러자 비사영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대꾸했다.

“에헤이, 새신랑이 노인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오? 그러다 새신부가 들으면 마음 상해하지 않겠소?”

그의 물음에 증칠이 흠칫 놀라더니 되물었다.

“그, 그런가? 하긴,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는 예전에 선우진이 섭혼했었던 육합검수의 한 명인 운영과 최근 혼인했다.

과거 함께 여행할 때부터 증칠을 잘 챙겨주곤 했던 운영은 그때부터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도 많은 데다 소심하고 외모에 자신이 없었던 증칠은 좀처럼 자신 있게 나서지 못했고, 그에 답답해하던 운영은 결국 먼저 증칠에게 혼인하자고 말해야만 했다.

그래서 평생을 홀로 떠돌던 증칠은 뒤늦게 바닷가에서 만났던 소녀 소영춘을 제자로 삼은 뒤 혼인까지 하게 되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는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 상태였다.

지인들은 그런 그에게 이제 전선에서 벗어나 가족들을 먼저 챙길 것을 권했었다.

하지만 증칠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흥! 아우들이 모두 싸우고 있는데, 큰형인 내가 뒷방으로 물러서라고?! 절대 그럴 순 없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혼인 후에도 계속 신룡대에 남았었다.

그렇게 증칠이 도착한 후 다른 신룡대원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청성파의 천재검사 신검랑 이건을 비롯해 과거 사천살문의 살수 출신이자 현재는 선우세가에 소속된 암협향 적마혁과 천살협도 견중, 역시 이제 완전히 선우세가에 적을 두기로 한 삼지신창 감작형과 설풍의 휘하에 속한 귀도 백기량 등이었다.

신룡대원들이 모두 도착하자 사군일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아까 사마군사의 지시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럼 군사께서 지금 전선 쪽에 와 계시다는 얘긴가?”

그 말에 비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러자 화영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급히 되물었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 또 구유음마가 노릴지도 모르는데?”

그간 군사 사마여량의 활약은 매우 놀라웠다.

구유음마 지기음이 시선을 끌려고 했던 이유를 파악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행적을 낱낱이 분석하고 예측해서 몇 번이고 그의 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에 이를 간 지기음이 무림맹을 습격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러서라도 그부터 해치우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사마여량이 무림맹을 벗어나 전선으로 왔다는 얘기였다.

지기음이 그를 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신룡대원인 화영빈의 사제 이건이 비사영 대신 대답해줬다.

“군사께서는 자신을 미끼로 구유음마를 끌어들일 작정이십니다. 어차피 점창산을 눈앞에 둔 상황이니 그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면, 자신이란 미끼를 더해 그를 완벽하게 끌어들이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에 화영빈은 침음성을 흘렸다.

“으으음, 덫이란 말이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얘기긴 했다.점창산에서 벌어질 싸움에 구유음마가 끼어든다면 그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고, 그렇기에 다른 곳으로 구유음마를 끌어들여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정말 가능한가였다.

구유음마 지기음은 그간 무림의 절대자들이 그토록 애를 써도 결국 잡지 못했던 자였다.

오히려 그들을 농락하듯 유인해 다른 곳에 피해를 주기도 하는 등, 무위를 떠나 현 절대자들 중 가장 위험한 자로 꼽히고 있는 자인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군사가 놈의 앞마당에 직접 나타나다니.

너무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소식을 들은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과거의 암혈향이 협객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평가받고 있는 암협향 적마혁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사의 옆은 검제께서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그 말에 비사영이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검제께서는 무슨….”

하지만 비사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놀라 물었다.

“그가? 하지만 그는 우리와 함께 점창산으로 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다른 절대자들도 맡은 위치에서 쉽게 움직이지 못할 텐데 그마저 없다면 백면시마를 상대할 사람이….”

그러자 이번엔 귀도 백기량이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게. 주군께서 오시고 계시니까. 그분이 드디어 출관하셨다네.”

그 말을 들은 모두는 이번에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백기량의 주군이라면 폐관에 들어갔던 설풍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종관이 급히 물었다.

“설풍 조장, 아, 아니, 소련주께서 출관하셨다고요?! 그럼…?!”

그의 질문에 백기량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네. 벌써 화경의 벽을 넘으셨다네.”

“아아아!”

이 년 전, 원래 비사영 이전에 신룡대의 대주로 예정되어 있던 설풍은 사왕련주 괴갈현의 엄명에 의해 폐관수련에 들어갔었다.

아직 적과 싸우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니 사왕련의 소련주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나오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용가주 협중협 용우신이 절대자의 자리로 올라간 이후, 아직 이십 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하삼십육성 중 최강자로 뽑히는 그가 실력이 모자랄 리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왕의 속마음은 아마도 그가 빨리 실력을 키워 검제에게 패한 자신의 복수를 해달라는 얘기일 확률이 높았다.

사왕의 칭호를 이은 자가 대를 이어 또다시 이인자로 불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그 설풍이 폐관한 지 단 이 년 만에 화경의 벽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무림에 또 다른 이십 대의 절대자가 등장했다는 뜻이었다.

사군일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가 화경의 벽을 넘었다니. 그럼 실제 무위는 화경 중급,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겠군.”

설풍의 독문 무공은 무위를 증폭해주는 적안광혈공과 전륜박이었다.

그가 그 무공들의 특성으로 화경이 아니었을 때도 화경 초입의 무인들과 싸울 수 있었던 걸 감안한다면, 화경의 벽을 넘은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절대자들 간의 순위가 요동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자 천주은이 문득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과거 우리 칠조원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절대자가 두 명이나 나온 거로군요. 그때에서 그렇게 오래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모두는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전선의 구석진 곳 비룡십삼대에서, 그것도 최하위조였던 칠 조에서 두 명의 절대자를 배출하게 된 것이었다.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잠시 빙긋이 웃음 지었던 비사영이 이내 불퉁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흥! 두 명에서 멈춰서야 되겠어? 두고 봐. 내가 곧 세 번째가 되어 줄 테니.”

비사영 나름으론 장난스럽게 말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모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십 대의 젊은 나이로 천하삼십육성에 올라 있는 그라면 시간문제일 뿐 분명 언젠가는 절대자의 자리로 올라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난스러운 말을 아무도 장난으로 받아주지 않아 비사영이 살짝 민망해졌을 때였다.

배종관이 문득 순박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야 소저가 안 보이네? 그녀는 이번에 같이 안 오는 거야?”

그러자 천주은이 팔꿈치로 급히 배종관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과 동시에 비사영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 갑작스러운 신호에 배종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천주은을 바라봤다.

그러자 질문의 대답은 증칠에게서 나왔다.

증칠은 너무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경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헤헤헤! 뭘 묻고 그러느냐? 또 싸운 거지.”

“예에?! 또요?”

배종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사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비사영의 표정은 더욱더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비사영은 비종문의 사매가 된 혈편서시 야운향과 연인 관계가 된 상태였다.

본래 설풍에게 첫눈에 반해 비룡대에 들어왔던 야운향이었지만, 오랜 시간 비사영과 함께 있으며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비사영의 마음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두 사람의 연애 전선이 평온할 때가 별로 없다는 점에 있었다.

은근히 보수적인 데다 여인과 연애라는 것 자체를 처음 해보는 비사영에 비해, 야운향은 이제껏 많은 남자들을 만나봤던 자유로운 사파의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사파사대미녀 중 한 명인 그녀와의 만남이 그리 쉬울 리 없었다.

그저 사형과 사매의 관계였을 때 너무도 잘 지내고 있었던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며 수없이 싸우고 부딪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거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며 이제 잘 지내는가 싶었는데….

배종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최근엔 싸운 일이 없었잖아? 이번엔 무슨 일이야?”

비사영은 그의 눈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뭐 그냥….”

그러자 증칠이 다시 경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헤헤헤! 그냥은 무슨 그냥! 이번에 아미파 참전 인원들과 만나게 됐는데 정안이란 예쁜 아이가 이 녀석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니겠느냐? 전에 아미파로 찾아오기로 해놓고 왜 안 오느냐고 묻는데 이놈 얼굴이 어찌나 새빨개지는지. 그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무슨 십대 초반 꼬맹이를 보는 줄 알았지 뭐냐?! 크헤헤헤헤!”

“아니, 그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당황해서…!”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이제 싸늘한 표정이 되어 비사영에게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사영, 야 소저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아니, 애초에 내가 뭘 한 게….”

“너무해요, 비 공자. 운향 언니가 그간 그렇게 많이 노력했는데 오히려 비 공자가 다른 여자를 보다니!”

“아니, 그러니까 나는 다른 여자를 본 게 아니….”

“쯧쯧, 실망이로군, 사영. 사파 사대미녀를 옆에 두고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다니.”

“아니….”

“쓰레기였군.”

“크윽!”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자 천하제일비로 이름 높은 신풍비응 비사영은 지인들의 이어지는 공격에 그대로 침몰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한참 그를 놀리던 사람들은 너덜너덜해진 그의 모습에 이제 한결 개운해진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때 배종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비사영에게 말했다.

“그렇게 싸운다는 게 나는 잘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자꾸 그런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빨리 혼인을 하는 건 어때, 사영?”

천주은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배종관으로선 당연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천주은 역시 거들었다.

“그래요. 두 사람이 싸우는 이유는 자꾸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니 아예 빨리 혼인을 해 버리면 나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해탈한 표정이 된 비사영이 힘없이 대꾸했다.

“글쎄. 진이 녀석을 보면 혼인을 한다고 꼭 해결되는 것도 아닌 것 같더구려.”

그 말에 화영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 진 아우가 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그의 물음에 비사영은 이곳에 오기 전 만났던 선우진과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중에 직접 들으시지요. 그나저나 이제 공격에 대한 얘기를 좀 할까요? 공격은 설풍 조장이 도착하면 바로 시작할 겁니다. 다른 대에도 전달해서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선공은 설풍 조장과 아미파의 결허사태가….”

비사영은 진중한 표정으로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혈교도와의 싸움을 준비하는 그는 다시 냉철한 신룡대의 대주이자 천하삼십육성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신풍비응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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