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57화 (357/359)

357화 그 후의 이야기들-2

광동성 해남도 선우세가.

선우세가의 본가는 현재 해남도로 이전한 상태였다.

귀주성이 원래의 뿌리이긴 했지만 해남파 장문인인 선우진의 본가가 해남도에 없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귀주성의 선우세가는 아버지 선우중이, 해남도의 선우세가는 선우진이 머물며 관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선우진은 지난 이 년 동안 해남도에 그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혈교도들과의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주로 집을 비워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결전의 날 이후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혼인부터 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었다면 설풍처럼 신부감들을 기다리게 한 채 지금껏 혼인을 못 하게 됐을 수도 있었으니, 여러 사람을 위해서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선우진의 세 번째 부인 진소은은 환한 표정으로 날듯이 달려 첫째 부인 당여은의 처소로 가고 있었다.

“형님! 형님!”

그러자 애틋한 표정으로 자신의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던 당여은은 빙긋이 웃음 짓고는 문을 열어 그녀를 맞이했다.

“또 무슨 일이야, 소은 동생? 아무리 신법에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아기들을 안고 그렇게 막 뛰어다니고 말이야.”

그러자 진소은은 자신의 양손에 안고 있는 두 명의 아기들을 보고는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에헤헤, 제가 그나마 제대로 하는 게 신법밖에 없잖아요.”

선우진은 이 년 전, 세 명의 여인들과 동시에 혼례를 치렀었다.

그리고 진소은은 세 번째 순서로 선우진과 첫날밤을 치르고는 바로 임신했었다.

몸도 마음도 밝고 건강한 그녀다운 일이었다.

당여은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진소은의 품에 안긴 두 아이들을 바라봤다.

“어디 보자. 우리 건이, 신이 둘 다 잘 자네. 엄마가 이렇게 하늘을 날아다니는데도 편안하게 자고 있는 걸 보니 둘 다 신법의 고수가 되겠는걸?”

그러고는 문득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 부럽다. 우리 아이도 아우의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태어나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자 진소은이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에이, 건강하다 뿐이겠어요? 상공에다 형님까지 닮았을 테니 아마 무림 최고의 미남미녀가 태어날 거예요. 전 우리 아이들이 비교당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인걸요.”

진소은의 너스레에 당여은은 따뜻하게 웃음 지었다.

역시 그녀의 배려는 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곤 했다.

진소은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었다.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아이들이었다.

가문의 대를 이을 걱정을 던 선우중은 물론이고 진소은의 둘째 아들이 태어나면 진가의 자연곤을 이어서 후계자로 삼겠다며 벼르고 있던 진소은의 부친 진공무마저도 한 방에 만족시켰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두 아이에게 건과 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승인 검신과 그의 형 뇌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물론 형과 동생의 이름 순서를 바꾼 건 스승에 대한 애정이었고 말이다.

그때 당여은이 문득 생각난 듯 진소은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뭔가 급한 소식이라도 왔어?”

그러자 진소은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환하게 웃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맞다! 형님, 형님! 두 가지 소식이 있어요! 전선의 소식과 귀주 세가의 소식이에요. 어떤 걸 먼저 들으시겠어요?”

그녀의 질문에 당여은은 살짝 고민했다.

전선의 소식이라면 선우진의 소식일 것이고, 귀주 선우세가의 소식이라면 시부모님의 소식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론 당연히 선우진의 소식이 먼저 듣고 싶긴 했다.

하지만 진소은의 표정을 보건대 나쁜 소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먼저 귀주 세가의 소식부터 듣기로 했다.

“귀주의 소식부터 들려줘.”

그러자 진소은이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형님이세요. 저라면 당연히 전선 소식부터 들려달라고 했을 텐데…. 반성해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혼자 결연한 표정을 지은 진소은은 곧 다시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있잖아요, 어머님께서 회임하셨대요!”

그 말을 들은 당여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곧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응?! 어머님이?! 어머님이 회임하셨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우리 건이랑 신이가 나이 적은 숙부, 숙모를 얻게 생겼어요!”

“하아!”

당여은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소은이 말한 어머님은 당연히 선우중의 여섯째 부인인 난혼마녀 소난소였다.

나이보다야 훨씬 젊어 보이긴 했지만 이제 그녀의 나이도 사십 대 후반인데 그런 그녀가 아이를 갖게 됐다는 것이었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사건에 당여은은 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아니지. 달리 생각하면 이제 겨우 사십 대 후반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 어머님의 외모나 몸은 삼십 대 초반, 아니 이십 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인걸? 게다가 두 분은 워낙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시니까.’

그렇게 납득한 당여은은 곧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잘됐다! 집안에 경사가 끊이질 않네! 상공께서도 무척 기뻐하시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기뻐하던 진소은은 약간 난처한 표정이 되어 다시 말했다.

“근데 조금 걱정이에요. 이 소식을 둘째 형님에게도 전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 말에 당여은도 살짝 멈칫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의 둘째 부인은 해청연이었다.

그녀는 선우진과 동갑이었기에 나이상으로는 진소은이 두 번째 서열이었지만, 진소은은 스스로 두 번째 부인 자리를 사양하고 세 번째 부인이 되기를 자청했었다.

선우진과의 인연이 가장 늦었으니 정상적이라면 가장 늦게 혼인했을 것이고, 배경이나 지혜, 무공을 놓고 봐도 자신이 가장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그건 이치에 맞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우진도 처음엔 반대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진소은이 셋째가 되기를 자청한 진짜 이유를 말하자 그도 결국 동의해줄 수밖에 없었다.

진소은이 이렇게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보기에 해 소저는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공자가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억지로 혼인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제가 만약 해 소저라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가운데 서열마저 세 번째라면 꼭 스스로가 덤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그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해 주세요.’

아닌 게 아니라 그 당시 해청연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었다.

그녀 안에서 역천혈마의 영혼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전 때야 해청연의 의지가 더 강해 그녀가 주도적으로 몸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겨 그녀의 마음이 꺾인다면 언제든 역천혈마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겪어봤지만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 될 확률이 높았다.

선우진이 혼인을 서두른 이유도 사실은 당시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 해청연의 위험성을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라도 다시 역천혈마가 될지 모를 그녀를 이대로 그냥 놔두는 게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말이다.

특히 사왕 괴갈현은 이렇게 주장했었다.

‘해 대협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본인은 그녀의 무공을 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역천혈마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절대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의 존재를 다 알게 된 그녀가 돌아온다면 이번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청연의 아버지 해운백은 차마 그 말에 반대할 수 없었다.

사왕의 말이 옳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딸이 천하의 해악이 되는 그런 사태는 그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선우진이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이렇게 선언했다.

‘제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 옆을 지키겠습니다. 지난번에 역천혈마가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그녀에게 배신감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녀의 옆에 함께 있다면 결코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다시 역천혈마가 등장한다면 제 손으로 해결하겠습니다.’

그게 선우진이 급히 그의 여인들과 혼인을 서두르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해청연 또한 그 이유를 절대 모를 리 없었다.

진소은이 지적한 점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당여은, 진소은과 달리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혼인한 사람이고 그로 인해 덤이라고 느끼게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진소은은 자신이 마지막 서열이 됨으로써 해청연의 서운함을 달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말을 이해한 선우진은 결국 진소은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해청연이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걸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선 진소은의 착한 마음에 다시 한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

또한 그녀의 배려는 혼인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막내 서열이 된 진소은은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두 형님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노력했다.

‘형님들! 잘 부탁드려요! 제가 좀 모자란 부분이 많지만 최선을 다할 테니 부디 어여삐 봐주세요!’

하지만 비슷한 성향의 당여은과는 달리 해청연과 가까워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원래 해청연 자체가 대인 관계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역천혈마의 사건 이후로는 그보다 더 어두워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우진은 물론 당여은과 진소은도 항상 해청연을 대할 때면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런 해청연이 최근엔 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를 대하는 모두가 긴장해야 할 정도였다.

또한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가 당여은이 임신했을 때부터였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여은이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둘째 아우에게 어머님의 회임 소식이라….”

현재 세 명 중 해청연만이 아직 임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선우진이 철저하게 세 명과 똑같이 잠자리를 가졌음에도. 아니, 진소은과 당여은이 임신한 이후엔 해청연과 훨씬 잠자리를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평소 해청연의 성향상 그런 일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고, 혼인한 지 아직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건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유독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진소은은 그 점을 걱정했던 것이었다.

시모인 소난소의 회임 소식이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자 잠시 어두운 표정이 되었던 당여은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둘째는 우리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인걸. 이 일이 경사라는 걸 모를 리 없어. 둘째에게 소식을 전하는 건 내가 할게.”

그러고는 다시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밝게 물었다.

“그럼 전선의 소식은 뭐야? 상공에 대한 소식이야?”

그 물음에 진소은 또한 밝은 표정으로 바꾸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그건 아니에요.”

“응? 아니라고? 그럼 무슨 소식이길래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그러자 진소은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풍 공자가 출관해서 전선으로 향했대요! 벌써 화경의 벽을 넘어섰다는 거죠! 이제 설풍 공자까지 전력을 보탠다면 전쟁의 끝도 멀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 한동안 설풍과 여정을 함께했던 진소은은 그의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봤던 설풍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무인이었고, 그 기억 때문에 진소은은 지금도 부군인 선우진이 설풍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설풍이 선우진과 동급인 화경의 고수가 되어 전선으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혈교 전쟁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을 본 듯한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당여은은 뭔가를 생각하더니만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진소은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이긴 한데, 내 생각엔 이거야말로 둘째 아우에게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소식은 당분간 우리만 알고 있을까?”

“네?”

당여은의 물음에 진소은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로서는 당여은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풍이 화경의 고수가 되었고 그래서 혈교 전쟁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게 왜 해청연에게 숨겨야 할 소식인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소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당여은에게 되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형님?”

그러자 대답은 당여은에게서가 아닌 방문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그건 설풍 공자와 더불어 묘아란 그 계집도 분명 전선으로 갔을 게 뻔하기 때문이야.”

“!”

“!”

그 목소리를 들은 당여은과 진소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해청연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제껏 두 사람의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 아우?!”

“두, 둘째 형님?!”

그러자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미모의 해청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니 용서하세요, 형님. 지나가다 보니 저절로 들리더라고요. 셋째 아우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얼굴에는 전혀 미안한 표정이 없는 상태로 하는 사과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보통 그렇다는 걸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오히려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아,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 없는 곳에서 아우의 말을 하는 걸 들었으니 기분 나빴겠다.”

“형님, 죄송해요.”

역천혈마가 아닌 해청연의 무공은 화경의 경지까지는 아니었다.

그녀가 천의성녀라는 별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래도 초절정인 당여은과 진소은에 비해서는 훨씬 윗줄에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천하삼십육성에서도 상위권에 속할 정도였다.

그러니 두 사람은 해청연이 그냥 지나가다 들었다는 얘기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주의가 부족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자 해청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배려해 주려고 한 건데 왜 사과하세요.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지. 그리고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아우. 어머님의 회임 소식이라면 나도 충분히 기쁘니까.”

그 말에 진소은이 환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정말요?! 역시 형님…!”

하지만 그 순간 해청연의 얼굴이 바로 싸늘해졌다.

“근데 묘아란 그 계집은 안 되겠어. 그런 뻔한 수법으로 또 상공에게 접근하려 하다니.”

그 차가운 말투와 눈빛에 당여은과 진소은은 꿀꺽 침을 삼켰다.

차마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조차 없었다.

해청연은 유독 묘아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묘아란이 선우진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살기를 뿜을 정도였다.

그래서 묘아란은 어쩔 수 없이 해남도를 떠나 사왕련으로 가야만 했다.

설풍이 전부터 사왕련의 참모로 그녀를 영입하고 싶어 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해청연의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선우진의 옆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좀 더 정확한 얘기였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진소은이 살짝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봤다.

“저기, 형님. 아란 언니는 사실….”

그 순간 해청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란 언니라고?”

그 무서운 반응에 진소은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에요, 형님. 죄송해요. 히잉.”

묘아란의 사연을 알고 그녀와 함께 해봤던 진소은은 묘아란을 좋아했다.

그녀 정도의 인연과 미모, 능력이라면 충분히 선우진의 네 번째 부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또한 진소은으로부터 그녀의 얘기를 들었던 당여은도 그녀를 반대하지 않았다.

과거 늘 선우진에게 도움만 받았던 자신에 비한다면 그의 힘이 되어줬던 그녀가 훨씬 더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청연이 저렇게 완강해서야 어쩔 수 없었다.

진소은은 마음속으로 묘아란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해요, 아란 언니. 힘이 되어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

해청연은 당여은의 방 밖으로 나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며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 그렇게 착한 척 내숭을 떨더니만 묘아란 따위를 언니라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부인들 중 자기편을 늘려 나중에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은 게지! 건방진 년 같으니!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해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당신은 안 지겨워? 그렇게 늘 타인을 미워하고 의심하기만 하면?’

그러자 해청연의 마음속에서 역천혈마 과염의 영혼이 소리쳤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인간은 결국 탐욕 앞에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진소은, 그년이 착하다고?! 웃기지 마라! 그년은 착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능력이 안 되니 그런 걸로라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거지! 당여은, 그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때 그날 이후로 해청연은 늘 저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야만 했다.

끊임없이 세상과 사람을 의심하고 증오하는, 내가 아닌 모든 이를 남으로 규정짓고 적으로 만드는 목소리.

하지만 해청연은 그녀를 비난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과염의 얘기를 듣다 보면 문득 그게 그녀의 생각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녀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자신 안의 어둠과 닮아 있었다.

해청연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선우진이 왜 자신과 혼인했는지를.

‘나를 그의 옆에 두기 위해서지.’

그리고 그 이유는 절대 사랑이 아니었다.

‘역천혈마의 부활을 감시하기 위해. 그걸 사전에 막기 위해….’

선우진은 당여은을 너무도 사랑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그 애틋한 눈빛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눈빛을 보고 있을 때면 그는 마치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귀한 유리그릇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유리그릇을 말이다.

선우진은 또 진소은을 너무도 아끼고 귀여워했다.

그가 진소은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어린아이의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눈빛과 자상한 표정.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듯한 아버지, 또는 오라버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늘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해청연은 그 이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역천혈마가 다시 자신의 몸을 제어할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라는 걸.

자신이 언제 터질지 모를 폭뢰와 같은 존재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 염려스러운 눈빛이 해청연의 마음을 점점 더 어둠에 물들게 하고 있었다.

그녀도 애틋한 눈빛을 받고 싶었다.

그녀도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싶었다.

책임감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우진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받지 못하는 애정을 받고 있는 여인들이 질투 났다.

그 와중에 혼자 아이까지 갖지 못한 스스로의 처지가 비참했다.

이 세상 모두가 증오스러웠다.

그런 생각에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던 해청연은 바로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후우우우!”

요즘 해청연을 지탱해 주는 건 어린 시절 익혔던 대연정심결이었다.

과염의 증오 가득한 목소리가 마음의 그림자에 닿아 커져갈 때면 해청연은 늘 대연정심결을 외우며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흔들리는 마음 모두가 그대의 것은 아니니, 그대의 가장 선한 본성은 공기와도 같도다. 늘 모자란 곳, 낮은 곳을 찾아가 그곳을 채워 주려 하니, 많은 곳에 더 많이 쌓지 않고 빨리 가기 위해 서로 다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자랑하지 않고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서운해하지 않는다. 그저 모자란 곳을 채웠음에 만족하고 다 채워졌으면 가지 않으면 그뿐이니라. 연자여, 그대의 가장 선한 본성이 이와 같이 투명하니 부디 색을 더하는 목소리에 스스로를 잊지 말라….’

한동안 대연정심결을 외웠던 해청연은 계속해서 들려오던 과염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땡중들 소리! 웃기지 말라고 해! 사람의 본성이 그와 같았다면 그들은 대체 무공을 왜 익혔다더냐?! 그냥 공기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하면 당하는 대로 없는 듯이 살지 않고! 남에게 그런 짓을 강요하는 자들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남들에게 욕심을 버리라 하고는 그들이 포기한 걸 지들이 다 가져갈 생각이거든!

그 증오 가득한 목소리에 해청연은 문득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과염이 발악했다.

-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 너 이 상황의 심각함을 정녕 모르겠느냐?! 이대로라면 당여은과 진소은 그 두 년이 작당해서 묘아란을 네 번째 부인으로 들이게 할 거다! 그렇게 되면 아이도 없는 너는…!

‘그래, 그렇게 되면 내 자리를 빼앗기게 되겠지. 아이도 없으니 버림받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역시 과염은 자신을,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해청연이 묘아란을 꺼려하는 이유는 사실 그녀가 자신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냉정한 이성과 지혜로 선우진과 대화가 가능한, 그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해청연은 두려웠다.

만약 묘아란이 선우진의 부인이 된다면 그 역할마저 빼앗기게 될까 봐.

자신만의 유일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부분에서마저 필요 없어질까 봐.

그러니 결국 묘아란을 미워한 건 자신의 열등감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때 과염이 다시 악을 쓰듯 소리쳤다.

- 그래! 그러니 절대 그년이 네 번째 부인이 되게…!

하지만 그때, 해청연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당신이 평소보다 더욱 화가 나 있는 건 설풍 조장이 출관했다는 얘기를 들어서겠지?’

- 뭐, 뭐?!

‘혈교가 패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신이 점점 더 증오에 가득 찬 말을 내뱉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당신도 필사적이겠지. 어떻게든 그걸 막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움직이는 것밖에 없을 테니까.’

- 그, 그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녀에게도 그녀의 목적이 있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에 휘둘렸던 건 그 말이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만족시켰기 때문이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경쟁심, 나보다 모자란 여인들에게 질 수 없다는 자존심, 그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소유욕 같은 것들을.

해청연은 문득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한 이유가 그런 마음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들만 꽉 차 있으니 아이의 영혼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고 말이다.

‘하긴, 아이가 생겼어도 문제였겠네. 내 속에서 그런 마음들만 느끼며 자라났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해청연은 문득 중얼거렸다.

“전선으로 가봐야겠어.”

그러자 과염이 급히 물었다.

- 뭐, 뭐?! 전선으로 간다고? 왜, 왜 말이냐?

그렇게 묻는 과염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혈교의 명운을 건 싸움의 현장에 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관조하며 해청연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언젠가 생길 내 아이 앞에서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어서.”

- …뭐?

그녀의 눈은 이제 먼 서쪽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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