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그 후의 이야기들-3
“공격!”
전체 지휘를 맡고 있는 비룡일대주의 신호가 떨어지자 준비하고 있던 비룡대원들은 일제히 점창산을 향해 진격했다.
“우와아아아!”
“가자!”
“싸움을 끝내자!”
“혈교놈들을 격멸하라!”
가히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제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그들 앞에서라면 어떤 장애물도 무력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이란 각오로 임하고 있는 건 혈교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파의 무사들이 마지막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절박함과 간절함은 기적이라도 충분히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게다가 결전의 장소인 점창산은 천혜의 요새였다.
높고 험한 산 위를 향한 좁고 가파른 길.
그 길을 오르는 정파의 무사들은 넓은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혈교도들에게 포위당해야만 했다.
혈교도들은 좁은 길에서 빠져나오는 정파인들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거의 수십 명이 개떼처럼 한 명에게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파 개새끼들! 죽어랏!”
“달려들어! 놈들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끼야아아아앗!”
사방에서 달려드는 혈교도들의 병장기가 선두에서 길을 뚫었던 무림맹 무사를 향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걸 다 막는 건 절대 무리한 일, 그의 개죽음은 완전히 정해진 일인 것만 같았다.
도검으로 그의 몸을 내리친 혈교도들은 첫 충돌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전혀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그들의 병장기가 첫 번째 무사에게 닿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쩡! 쩌정! 쩡! 정!
“응?!”
“뭐, 뭐냐?!”
그들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사람의 몸을 내리쳤는데 쇳소리가 나는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병장기가 적의 몸을 베기는커녕 격하게 진동하며 튕겨 나오고 있었다.
무슨 쇳덩어리를 내리친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이게 대체…?”
“설마….”
그들은 순간 멍하니 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철탑 같은 거구의 남자가 그늘이 진 얼굴로 자신들을 향해 씨익 웃음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
상대 중 강기를 사용해 공격한 자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그냥 맨몸으로 적들의 공격을 받아냈던 배종관은, 적들의 공격이 튕겨 나간 동시에 씨익 웃으며 언월도를 크게 휘둘렀다.
“으아아아압!”
그러자 순간 그를 중심으로 피의 파도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푸화아아아악!
“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아아아아악!”
그들은 배종관의 맨몸이 자신의 병장기를 튕겨낼 것을 예상할 수 없었기에 그의 공격 또한 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배종관을 중심으로 반경 이 장의 공간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주변의 적들을 모조리 두 동강 내버린 배종관은 멈추지 않고 전방을 향해 포탄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으야아아아압!”
그러자 그 광경을 본 혈교도들이 외쳤다.
“그, 금강비성이다! 강기를 써!”
“어서 강기를! 강기 없이는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절정 이상의 혈교도들은 저마다 자신의 병장기에 붉은 강기를 두르고는 몸통 박치기로 돌진해오는 배종관을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배종관의 몸에서 찬란한 황금빛 호신강기가 뿜어져 나갔다.
화아아아악!
그의 무공은 선우진이 비사영과 함께 익히라고 전해줬던 황룡무상강기, 백 년 전 검신과 뇌신 시대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던 무황의 독문무공이었다.
황룡무상강기는 원래부터 금강용린갑으로 대표되는 절대방어로 유명했던 무공이었다.
그런 무공을 외공의 최강자인 배종관이 익혔으니 그 단단함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혈교도들이 내리친 검강과 도강은 배종관의 호신강기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투퉁! 투투퉁!
“억?!”
“호, 호신강기?!”
그리고 공격에 실패한 그들에게 다음 기회는 없었다.
다음 순간 바로 돌진해온 거대한 황금빛 포탄에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도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퍼퍼퍼펑!
“끄아아악!”
“크아아악!”
혈교도들의 방어선은 너무도 무력하게 붕괴되었다.
배종관이라는 괴물 한 명에 의한 결과였다.
“괴, 괴물 같으니….”
“저놈부터 처리해!”
그를 그대로 두면 어디까지 돌파당할지 알 수 없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혈교도들은 사력을 다해 배종관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배종관이 시선을 끄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어느새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배종관을 덮치려던 혈교도들의 측면으로 사군일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하아아압!”
슈하아악!
그의 검에선 뿜어져 나온 아홉 개의 일시사일이 동시에 공간을 꿰뚫고 있었다.
이제 그의 성명절기가 된 사일검법의 최종초식 후예사구일이었다.
“저, 점창검룡! 끄아악!”
“아, 안 돼! 으아아악!”
반대편에선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적들의 공세를 부드럽게 피해 접근한 천주은의 도가 한순간 삭풍이 되어 혈교도들의 몸을 갈라 버렸다.
“이야아압!”
푸하아악!
“쾌도묘랑이다!”
“이년…! 으아악!”
무림맹의 무사들은 파죽지세로 혈교도들을 뚫고 점창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기세였다.
“진격!”
“가자!”
“오늘 혈교 놈들의 역사를 끝낸다!”
그들의 강력한 돌파력에 혈교의 마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만치 않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까지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아껴뒀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선두에서 전차처럼 적들을 쓸어 가던 배종관은 한순간 전방에서 돌진해온 붉은 빛살에 사력을 다해 호신강기를 전개했다.
“합!”
화아아아악!
그러자 황금빛 호신강기 위로 붉은 강기를 뿜어내는 신형 하나가 벼락처럼 꽂혔다.
콰아아아앙!
마치 산이라도 꿰뚫을 것만 같은 강력한 일격이었다.
그 엄청난 파괴력에 배종관은 처음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크으윽!”
그러자 배종관을 물러서게 한 남자는 한번 땅에 착지했다가는 바로 다시 튕기듯 돌진했다.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를 본 주변인들이 소리쳤다.
“혈마인!”
“혈마인이다!”
원래 초절정 고수였을 혈마인은 현재 화경 초입 수준의 무력을 보유한 상태였다.
아직 초절정인 배종관이 단신으로 상대하기엔 무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단신이 아니었다.
특히 혈마인이 나타날 때까지 활약을 자제하며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신룡대 출!”
그간 직접 나서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따라오고만 있었던 신룡대 대주 비사영은 자신의 대원들을 향해 짧게 소리치고는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쉬이이익!
아직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천하제일비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그의 속도는 그야말로 가공하다 할 만했다.
샤아아악!
혈마인은 빛살이 된 비사영이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본능적으로 뒤돌아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뒤돌아본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다시 가슴 앞까지 다가온 황금빛 도강이었다.
콰아아아앙!
자신의 가슴을 후려친 강력한 충격에 혈마인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방출해 도강에 베이진 않았지만 균형을 살짝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바로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만약 다음 충격만 없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란 뜻이었다.
콰아아앙!
혈마인은 연속적으로 오른쪽 다리에 가해진 충격에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빛살이 된 비사영의 공격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쾅! 쾅! 쾅! 쾅!
비사영은 빛줄기가 되어 스쳐 지나가며 혈마인의 전신을 정신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제자리에 서서 연속공격을 가하듯 시간 차도 없는 공격이었다.
그러자 이미 균형을 잃었던 혈마인은 서지도 넘어지지도 못한 채 술 취한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비틀거려야만 했다.
도저히 방어할 수 없는 공격에 완전히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 놀라운 신법을 목격한 토벌대원들 모두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 저게 바로 천하제일비의 속도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잖아?”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군!”
“과연 신풍비응!”
게다가 신룡대에는 비사영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혈마인의 정신을 빼놓은 사이, 증칠이 비사영과 거의 가까운 속도로 혈마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수전, 그의 두 눈은 오직 혈마인의 두 눈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챠아!”
혈마인의 지근거리까지 돌진한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수전을 투척할 수 있었다.
초점을 잃은 놈의 눈을 향해서였다.
푸우욱!
“끄아아아악!”
두 개의 수전이 그의 두 눈에 깊숙이 박히자 혈마인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 삼지신창 감작형이 거대한 삼지창으로 그를 내리쳤다.
“흐아아아압!”
퍼억!
혈마인은 거대한 삼지창의 일격에 땅에 처박히듯 넘어지고 말았다.
개구리처럼 몸이 눌린 채였다.
그러자 다음 차례는 신검랑 이건이었다.
감작형의 뒤로 딱 붙어 따라왔던 그는 혈마인이 땅에 쓰러지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의 입 안쪽으로 부드럽게 검을 박아 넣었다.
쑤우우욱!
“꺼어어어억!”
다음 순간, 입천장을 관통한 그의 검강이 뇌를 헤집어 버리자 혈마인은 짐승처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이성이 사라진 본능적인 행동, 화경 초입급의 무력을 자랑하는 혈마인이 순식간에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무림맹 무사들은 모두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
“엄청나다!”
“역시 신룡대!”
동시에 혈교도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상에서 혈교도들을 지휘하며 지켜보고 있던 수괴는 안타까움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아껴뒀던 혈마인이기에 먼저 한 명만 내보냈던 것인데 너무도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차라리 한꺼번에 투입하니만 못한 상황이었다.
장기전을 예상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 저들의 기세를 꺾지 못한다면 장기전은커녕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는 결국 그간 아껴서 비축해왔던 모든 혈마인들을 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도열해 있던 혈마인들을 향해 명령했다.
“모두 가라! 저들을 박살 내 버려라!”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혈마인들이 한순간 빛살이 되어 산 아래로 쏘아졌다.
쉬이이이익!
모두 여섯 명의 혈마인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제일 먼저 깨달은 건 심안을 익힌 비사영이었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대원들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급속이탈! 모두 피해!”
심안을 보유한 그와는 달리 다른 신룡대원들은 혈마인들의 돌진을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사영의 명령에 그들은 일단 신속하게 전장에서 이탈하려 했다.
문제는 그 상황조차 한발 늦었다는 것이었다.
신룡대원들 중 가장 신법이 부족한 삼지신창 감작형과 귀도 백기량은 미처 이탈하지 못한 채 혈마인들의 습격을 받아야만 했다.
붉은 유성처럼 쏘아진 혈마인들이 어느새 그들을 향해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슈하악!
“!”
“헉!”
감작형과 백기량은 황급히 호신강기를 뿜어내 그들의 공격을 방어해보려 했다.
하지만 화경 초입급 혈마인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건 불가능했다.
샤아아악!
두 사람은 자신들의 호신강기를 뚫고 베어오는 적들의 도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끝장이었다.
화아악!
콰아아아아앙!
감작형과 백기량은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나타난 두 사람이 그들을 구해냈던 것이었다.
감작형은 혈마인보다 한발 먼저 나타나 자신을 밀쳐냈던 비사영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튕겨낸 덕분에 혈마인의 도는 허공을 가른 상태였다.
간신히 살아난 것이었다.
감작형을 구해낸 비사영은 빛살이 되어 혈마인들 사이로 뛰어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물러나시오, 감 노사!”
그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뒤로 후퇴하며 백기량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비사영이 밀어준 자신과 달리 백기량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혈마인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남자가 혈마인을 후려쳐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백기량은 자신을 구해주고는 바로 혈마인들을 향해 맹수처럼 덮쳐 가는 적의청년을 보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주군….”
퍼퍼퍼펑!
회오리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돌진한 그의 강격에 혈마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흉광, 용권풍과도 같은 맹렬한 기세.설풍이었다.
그의 등장에 배종관과 천주은이 반갑게 소리쳤다.
“조장!”
“역시!”
하지만 그들의 반가운 탄성에도 불구하고 설풍의 마음은 그리 밝지 않았다.
혈교 쪽에서 혈마인을 아끼고 있었듯 설풍 역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는 백면시마 구우절을 만났을 때 등장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혈마인 여섯이라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적들의 전력에 더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설풍은 더 이상 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기습으로 일단 밀어내기는 했지만 화경급 무력의 혈마인만 여섯이었다.
아무리 적안광혈공과 전륜박으로 무위를 증폭시켰다 해도 만만한 전력이 아닌 것이었다.
‘속전속결뿐이겠군.’
그렇게 생각한 설풍은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기로 했다.
“사영! 놈들의 시선을 끌어주게! 사태! 지금 나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비사영은 기다렸다는 듯 빛살이 되어 혈마인들 사이로 돌진하며 외쳤다.
“갑니다!”
샤샤샤샥!
적들 사이로 뛰어든 비사영의 신형은 순간 일곱 개로 분열했다.
혈마인의 수보다 하나 더 많은 수의 잔상이었다.
그러자 혈마인들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잔상을 공격하느라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설풍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파박!
설풍이 혈마인 한 명에게 돌진했다.
그의 주먹 위론 오랜만에 맹호조의 발톱이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하아아압!”
촤아악! 촤아악! 촤아악!
비호처럼 날아든 설풍의 맹호조는 순식간에 혈마인 한 명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혈마인도 호신강기를 뿜어내며 어떻게든 방어해 보려 했지만 용권풍처럼 회전하며 빈틈을 노려오는 붉은빛 발톱에 속수무책으로 찢길 뿐이었다.
미친 듯 손발을 휘둘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캬아아아악!”
그러자 근처에 있던 혈마인 하나가 비사영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설풍에게 돌진해 왔다.
쉬이익!
이제 이 대 일이 될 상황, 그대로라면 설풍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일단 뒤로 물러서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설풍은 그 혈마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상대할 이는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
설풍을 노리고 휘둘러지던 붉은 도강은 결국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갑자기 끼어든 하얀 검강이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부딪친 도강과 검강에서 화려한 백색과 적색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막상막하의 공력이었다.
다음 순간, 혈마인과 동시에 뒤로 튕겨 나온 백의복면인이 설풍을 향해 소리쳤다.
“이쪽은 내게 맡기시게, 설 시주!”
그녀는 아미파의 전 장문인인 결허사태였다.
사혜혈마 전무광에 의해 혈마인이 되었던 그녀가 지금 설풍을 도와 혈마인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혈마인이 되며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은 그녀는 바로 아미파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간다고 적응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가 혈마인이 된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녀의 기억을 되돌려보려 시도해봤다.
하지만 화영빈의 연인 정선이 그렇듯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선우진이 한동안 그녀와 함께하며 노력해 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해 줄 수 있는 건 그녀가 과거 누구였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 그녀의 선택은 놀랍게도 아미파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다면 나는 꼴사납게도 적들의 함정에 빠져 사문의 제자들을 죽게 만든 죄인이로군. 심지어 지금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이고. 이런 내가 대체 무슨 면목으로 사문에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부디 나의 존재를 본문에 알리지 말아 주시게.’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일단 혈교를 향한 복수부터 맹세했다.
자신의 삶은 복수를 완수한 뒤에나 생각해보겠다는 게 그녀의 강력한 의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미파의 장문인이었을 때부터 유명했던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정과 대쪽 같은 자존심은 혈마인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선우진과 설풍은 일단 그런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그 죄를 만회하기 위해 남은 삶을 바치겠다는 그녀의 선택은 좀 안타까웠지만, 그럼에도 화경 초입급 무력을 지니게 된 그녀의 가세 자체는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하아아압!”
콰아아아앙!
결허사태가 혈마인 한 명과 부딪치며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설풍은 더욱 맹렬하게 눈앞의 혈마인을 몰아쳐 갔다.
“으아아아압!”
촤아악! 촥! 촤악! 촤아악!
수없이 반복해 혈마인의 팔을 할퀴었던 설풍의 맹호조는 결국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놈의 팔 근육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것이었다.
이제 놈은 더 이상 팔을 휘두를 수 없는 상태였다.
“!”
혈마인이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는 자신의 팔에 당황한 순간이었다.
설풍의 맹호조는 이제 아무런 방해도 없이 혈마인의 턱 아래쪽을 꿰뚫을 수 있었다.
푸우욱!
턱에서부터 뚫고 올라간 발톱의 붉은 강기가 혈마인의 뇌를 헤집어버렸다.
이젠 제아무리 대단한 회복력을 지닌 혈마인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혈마인은 눈을 까뒤집고는 몸을 버둥거리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의지가 없는 육신의 발버둥이었다.
설풍은 미친 사람처럼 땅을 뒹구는 혈마인을 버려두고는 다시 다른 목표를 찾았다.
비사영이 놈들의 주의를 끌어주는 사이 최대한 빨리 수를 줄여야만 했다.
‘이제 다섯.’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혈마인을 덮치려던 설풍은 갑자기 뒷덜미가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황급히 뒤돌아 맹호조를 그었다.
“하아압!”
째앵!
설풍은 자신의 등을 노린 비검을 간신히 쳐내고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그 비검이 지근거리의 나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안을 사용하는 설풍의 감각을 속이고 이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군지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설풍은 씹어뱉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기음.”
그러자 나무 그림자 속에서 검은색 피풍의를 뒤집어쓴 남자 하나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구유음마 지기음이었다.
“오랜만이다, 애송이.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그사이 너무 커 버렸구나.”
설풍은 혈마인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그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비사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지기음에게 말했다.
“사마군사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나 보군.”
그러자 지기음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뻔한 함정에 스스로 들어갈 줄 알았느냐? 그따위 함정에 전력을 낭비한 것이 훗날 너희의 패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말에 설풍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패인이라…. 아직 너희가 이긴 건 아닐 텐데.”
현재 전력을 놓고 봤을 때 무림맹 측이 불리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화경초입급 혈마인 다섯에 구유음마 지기음이라면 설풍과 결허사태만으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직 백면시마는 나타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풍의 말에 지기음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니, 너희는 패했다. 설풍, 네놈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한 지기음은 문득 설풍의 옆에서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결허사태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혈교천하 만세번영.”
그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갑자기 결허사태의 표정이 멍하게 변해버렸다.
방금 전까지 씹어 죽일 듯 뿜어내던 살기도 씻은 듯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설풍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네놈, 설마…?!”
그러자 지기음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혈마인 하나를 놓쳤는데 설마 다른 혈마인들에게 이 정도 금제도 걸어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냐? 나태하고 멍청하구나. 그게 너희의 두 번째 패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설풍은 급히 결허사태에게 말을 걸어봤다.
“사태, 제 말이 들리십니까?!”
하지만 결허사태는 그의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응한 건 오직 지기음의 목소리뿐이었다.
“모두 이쪽으로 와라.”
그러자 결허사태와 비사영을 쫓던 다섯의 혈마인들이 모두 지기음의 뒤로 모여들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비사영은 더 이상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설풍의 뒤로 착지했다.
그간 계속해서 무리한 움직임을 했던 그의 온몸은 이미 땀에 절어있는 상태였다.
비사영은 화경 중급의 무력을 지닌 구유음마 지기음과 결허사태를 포함한 화경 초입급의 여섯을 훑어보며 설풍에게 말했다.
“이거 완전히 뭣 된 것 같은데요, 조장?”
그러자 설풍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일세. 군사의 예상대로군.”
그 말에 지기음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이제 너희는….”
하지만 그는 곧 설풍이 말한 내용 중에 좀 이상한 말이 섞여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뭐라고?”
그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던 지기음의 뒤쪽 나무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튀어나왔다.
샤아악!
그러고는 지기음의 뒤에 도열해 있던 혈마인들을 덮쳤다.
촤아아아악!
지기음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가 돌아봤을 땐 이미 한 명의 혈마인이 두 쪽으로 쪼개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상대는 이미 두 번째 혈마인을 향해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공간 자체가 찢겨버리는 듯한 검격, 묵랑검법의 개천이었다.
촤아아아아악!
지기음이 황급히 소리쳤다.
“물러나라!”
그의 명령에 결허사태와 세 명의 혈마인들이 신속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이미 그의 전력은 순식간에 반감된 상태였다.
지기음은 이제 그 자리에서 멈춘 채 자신을 향해 씨익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망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거, 검제…?”
그러자 그 순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긴장된 눈빛을 감추지 못했던 무림맹 측 무인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앗!”
“검제! 검제다! 검제께서 오셨다!”
“천랑검제!”
“천랑검제 선우진!”
“우와아아아아!”
그랬다.
그는 현 무림의 절대자들 중 최강으로 불리고 있는 천랑검제 선우진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군사 사마여량을 지키고 있다던 그가 바로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무림맹 무사들의 사기는 이제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