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59화 (359/359)

359화 그 후의 이야기들-4

사혜혈마 전무광과의 결전 이후, 몸을 회복한 사왕 괴갈현은 개인적으로 선우진을 찾아왔었다.

검신의 진전을 이은, 그리고 혈마를 죽인 선우진과 대결을 해 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론 직접 선우진의 무력을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그가 모든 일을 해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대결을 마친 사왕 괴갈현은 다시 사왕련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탄식해야 했다.

‘이제까지는 검제만 이기면 천하제일이 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대자연을 꺾어야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구나. 내게 그 자리는 정녕 허락되지 않은 것인가?’

승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압도적으로 패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후 무림인들은 이제 주화입마로 나설 수 없음을 알게 된 혈랑검제 반중양 대신 선우진을 검제의 자리에 올리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또한 그의 별호는 천랑검제라고 칭했다.

그가 늑대 장식이 새겨진 흑백의 검 두 자루를 지니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구유음마 지기음에게 말했다.

“드디어 만났군, 지기음. 무척 보고 싶었다.”

그 말에 지기음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이를 악물었다.

“으윽!”

그간 지기음은 최우선적으로 선우진을 피해 다녔었다.

사혜혈마 전무광의 원수인 그를 어떻게든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전무광의 제자이자 혈교의 후계자라 불리우던 백옥지룡 구유상이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그를 찾아가면 절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절대자들에게서는 도주할 자신이 있었지만 자신과 함께 천하오비에 이름을 올린 자이자 천하제일비라고 불리는 선우진에게서만큼은 도저히 도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기음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네, 네놈은 사마여량의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자 선우진이 씨익 웃음 지었다.

“군사께서 그렇게 뻔한 함정을 팠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너의 패인인 거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되지 않았느냐?”

“!”

그 말에 지기음은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마여량이 전선으로 와 자신을 끌어들일 함정을 팠다는 생각 자체가 그의 함정이었던 것이었다.

자신에게 검제 선우진의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어 나서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었다.

지기음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다 끝났군. 이제 도주해야겠다. 아직 좀 이르지만 구우절이 잘 피했기를 바랄 수밖에.’

구유음마 지기음과 백면시마 구우절의 목적은 사실 점창산 사수가 아니었다.

이미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했기에 지기음이 시선을 끄는 사이 구우절이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는 것이 이 싸움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혈마인을 만들 수 있는 구우절만 멀쩡하다면 훗날에라도 다시 혈교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기음은 아직 살아있는 혈마인들을 슬쩍 바라봤다.

결허사태를 포함한 네 명의 혈마인이라면 급한 대로 시간은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바로 혈마인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저자를 막…!”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공중에서부터 갑자기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과거 혈마인이 되었던 혈마 전무광과도 비슷할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

깜짝 놀란 지기음은 황급히 고개를 쳐들어 공중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볼 수 있었다.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 한 명이 허공에 둥둥 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지기음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 사왕 괴갈현. 사왕이 어떻게 이곳에…?”

그러자 괴갈현이 공중에 뜬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본좌도 혈교에는 갚아줘야 할 빚이 있으니. 애초에 내 아… 후계자인 설풍이 이곳에 왔는데 본좌가 오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

그의 말을 들은 지기음은 자신의 오판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검성 해운백을 비롯한 정파의 절대자들이 자신의 습격을 막기 위해 중원에 남아 있었기에, 이곳에 올 수 있는 절대자는 검제가 유일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치명적인 오판이 아닐 수 없었다.

무려 사왕이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설풍은 물론 검제에 사왕까지 나타난 것이었다.

이젠 아무런 방법도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도주해야…!’

그렇게 생각하며 힐끗 뒤를 돌아봤던 지기음은 어느새 자신의 후방을 점하고 있는 설풍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고야 말았다.

이젠 퇴로조차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은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의 지기음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왕이 방금 말하려던 단어가 ‘아들’이란 단어였을까요?’

그의 물음에 검신이 대답했다.

- 그런 것 같군. 저치도 어지간히 자기 아들이라고 밝히고 싶은 모양이야. 겉으로만 냉정해 보였지 아주 팔불출이로군.

그 말에 선우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풍 형님 정도면 어떤 아버지라도 자기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십 대에 무림의 절대자가 된 아들을 뒀으니 사방팔방에 내가 아버지라고 떠들고 싶겠지요.’

그러자 검신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설풍의 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하면, 자네 아버지는 벌써 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이겠군. 아무래도 설풍을 띄워 주기보단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요새 자화자찬이 많이 늘었구먼.

‘오오, 눈치채셨습니까?’

- 자네 요즘 이 스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군. 누누이 말하지만 나도 한때 천재라 불린 적이 있던 남자라네.

‘예, 예, 스승님. 당연히 그러시겠죠.’

- 어허, 어째 말에서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가?

***

결전이 끝난 후, 선우진은 당여은으로부터 마유겸의 유품인 설랑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도 그는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설랑검 안에 아직 검신의 의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말이다.

비록 자신과 함께한 스승이 아닌 마유겸과 함께했던 검신이겠지만, 그래도 그의 존재가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설랑검을 잡았을 때,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스승 검신의 안배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는 사실을….

그가 설랑검을 잡자마자 검신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 진! 자네 살아 있었군! 정말 다행일세!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사라진 후 혈마는?!

순간 선우진은 멍해지고 말았다.

목소리야 그렇다 쳐도 그가 말한 내용은 분명 자신의 스승인 묵랑이어야 알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멍한 정신으로 물었다.

‘어르신? 이게 어떻게?’

그러자 검신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다.

- 아, 혹시나 괜한 기대를 줄까 싶어 얘기하진 않았네. 봉인을 푼 검들의 의식은 대상자와 접촉하는 순간 다른 검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거든. 그러니 지금의 나는 마유겸의 설랑인 동시에 자네의 묵랑도 되는 셈인 게지. 어떤가? 대단한 안배가 아닌가? 나는 이걸 ‘동기화’라고 이름 붙였다네.

그 말에 선우진은 더 버틸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흐흐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 아니, 그렇게 울 것까지야….

잠시 당황했던 검신은 흐느끼고 있는 선우진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러고는 곧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그나저나 그 말이 무척 듣기 좋구먼. 스승이라…. 그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내 제자 진아.

내 제자, 진아.

선우진은 당여은의 당황한 모습도 신경 쓰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스승의 입으로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그런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

선우진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 떠 있는 사왕에게 말했다.

“어르신께 마무리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사왕이 잠시 선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때 그 무공을 다시 구경하고 싶긴 한데….”

그의 말에 선우진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가 언급한 무공이 바로 망아공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스승 검신에게 망아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세 번 현신하거나 후계자가 망아공을 익히는 순간 검신의 의식은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우진은 혈마 전무광을 죽인 무공도 그냥 ‘개천’이었다고만 말했었다.

선우진이 급히 검신에게 말했다.

‘개천이 사왕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하하하하! 하하….’

그러자 검신도 대답했다.

‘그, 그래. 내가 만든 묵랑검법이 인상적인 무공이기는 하지. 그럼. 흠, 흠.’

분명 망아공의 존재를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검신도 딱히 묻지 않았다.

사실 선우진도, 검신도 알고 있었다.

검신이 거짓말을 판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유독 이 거짓말에 대해서만 반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사왕은 선우진의 표정이 난감해 보이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곤란한 듯하니 내가 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사왕은 그대로 지기음에게 내리꽂혔다.

슈하아악!

지기음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앞뒤로 위치한 선우진과 설풍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자신과 동급인 천하오비의 두 명에게 앞뒤로 압박당한 상태에서 어디로 갈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망설임은 결국 그가 도주할 기회를 영원히 없애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아아앙!

***

백면시마 구우절은 가장 중요한 물품들만 꼼꼼히 챙겨 점창파의 뒤쪽으로 갔다.

자연 동굴을 개조해 만든 점창파의 지하 연무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의 동굴 벽에는 점창파의 옛 선현들이 새겨 놓은 검격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들이 자신의 심득을 새겨 놓은 곳, 그래서 점창파 문도들은 그 동굴 자체를 신성시하며 높은 서열의 제자들이 아니면 접근조차 할 수 없게 했었다.

하지만 혈교도들에게 그런 사정을 신경 써줄 이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혈마 전무광은 그 동굴 가장 깊숙한 곳이 점창산 뒤쪽 절벽과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강기로 동굴을 더 뚫어 만일을 위한 탈출로를 만들어놨었다.

점창파의 제자들은 알지 못하는 점창산의 비밀 통로였다.

백면시마 구우절은 바람처럼 달려 그곳 안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점창산 입구 쪽에서 구유음마 지기음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자신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오늘 작전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구우절 자신만 살아있다면 혈교는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었다.

‘두고 봐라. 혈마인 제조술이 남아 있는 한 혈교는 곧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원래도 혈교가 그 긴 세월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쉽게 절정에 오를 수 있는 혈교 무공의 특성이 무림인들의 욕망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젠 절정을 넘어 화경급이었다.

절정의 무인은 초절정, 초절정의 무인이라면 화경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힘에 취해 달려들 불나방들의 수가 절대 적을 리 없었다.

그러니 구우절이 생각하기에 혈교는 결국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탐욕이 남아 있는 한 누군가는 계속해서 혈교를 찾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으흐흐흐흐흐!”

그런 생각을 하며 낮은 웃음을 흘리던 구우절은 문득 어두운 동굴 끝으로 들어오는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점창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그는 문득 점창산 앞에서 박터지게 싸우고 있을 멍청한 정파 놈들을 생각했다.

구유음마 지기음이 거기 있긴 하지만 그가 알기로 지기음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밝은 동굴 밖으로 막 나갔을 때였다.

그 순간, 그를 향해 갑자기 아홉 마리의 혈룡들이 돌진해왔다.

구천혈룡마공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락!

“허억!”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호신강기를 뿜어냈다.

화아악!

다음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앙!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구우절을 기습한 이는 바로 해청연이었다.

혈교도들 밖에 모르는 그들의 비밀 탈출로를 그녀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구우절이 다시 튕겨 들어간 동굴 속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죽었을까?’

역천혈마 과염이 아닌 해청연의 무위는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아직 화경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정면으로 맞붙었을 경우 구우절을 이길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가장 위력이 강한 무공인 구천혈룡마공으로 기습했던 이유였다.

- 이 배은망덕한 년! 내가 너를 얼마나 아꼈거늘 감히 혈교의 무공으로 이딴 짓을 해?! 네가 이런다고 선우진 그놈이 알아줄 것 같으냐?! 웃기지 마라! 그놈은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았다면 왜 알리지 않았는지부터 추궁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역시 너를 믿을 수 없다고 말이다!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게 현명한 일이었던 거다, 이 멍청한 년아!

해청연의 마음속에선 지금 광분한 과염이 악을 쓰며 날뛰고 있었다.

혈교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질까 봐 그녀 또한 필사적인 상태였다.

‘…….’

해청연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일이 대꾸해 주는 것도 정신 사나울뿐더러 그녀의 말도 일정 부분 맞는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맞는 얘기였다.

진작에 선우진에게 비밀 도주로의 존재를 알렸다면 굳이 그녀가 이럴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또한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우진은 과염의 말대로 자신을 불신하게 될지도 몰랐다.

역시 역천혈마의 영혼을 보유한 자신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 멍청한 년! 결국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구나! 네년의 미래는 이제 정해졌다! 네년은 여기서 구우절에게 죽던가, 혹시 여기서 살아나더라도 선우진에게 버림받게 될 것이다! 거참 꼴 좋겠구나, 해청연! 오호호호호!

해청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번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의 운명은 어차피 정해져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처음 혈교에 관한 정보를 넘기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해청연은 생각했다.

‘설사 내가 도주로를 모르는 척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자신이 아는 선우진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비밀 도주로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그 사실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 순식간에 떠올려냈을 테니까.

추측이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신 또한 그랬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의 신뢰를 잃는다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해청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인지 과염은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 너도 이미 알고 있잖니, 청연아?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어차피 너는 선우진에게 돌아갈 수 없단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꾸나. 오! 혈교도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란다. 그냥 나와 함께 멀리 떠나자는 얘기야. 너도 당여은, 진소은 그 두 년들 사이에 있는 게 짜증 났지 않니?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해청연은 광분한 표정이 되어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오는 구우절을 바라보며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거 알아?’

그러자 과염이 하던 말을 멈추고는 반문했다.

- 응? 그거?

해청연은 검을 뽑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스르릉!

‘잘못은 그걸 가리려 할수록 더 커진다는 거. 그리고 지금 나는 나를 위해서 나선 게 아니라는 거.’

- …뭐?

그랬다.

자신의 진짜 잘못은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같잖은 자존심에, 자신이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그 잘못을 인정하지도, 제대로 돌려놓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런 마음으론, 그런 죄를 지은 상태론 감히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자격도 없는 것일 테니까.

해청연은 과염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기합을 내질렀다.

‘그리고… 난 그 두 사람이 싫지 않아!’

“하아압!”

그녀는 성라검법의 절초 혜성시흑으로 구우절을 찔러가며 문득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왜 그 사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솔직히 그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혈교와의 싸움에 관한 얘기를 자신에게 하지 않는 선우진의 태도에 화가 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속에 있는 과염의 영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과염의 기억을 공유한 자신이 마음 한편으로 혈교의 멸절을 바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인지 말이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그건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그 잘못을 만회해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언젠가 태어날지도 모를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그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설사 이 일로 인해 영원히 그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게 해청연이 바로 이쪽으로 달려온 이유였다.

“이 건방진 년!”

콰아아앙!

“아아악!”

구천혈룡마공에 타격을 입었음에도 구우절은 강했다.

사일검법의 일시사일과도 견줄 수 있다는 혜성시흑의 기습으로도 공격을 성공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대충 휘두른 일격에도 해청연은 그저 무력하게 튕겨 나가야만 했다.

애초에 화경의 벽을 넘지 못한 해청연이 화경 중급의 무력을 지닌 구우절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구우절은 바로 해청연을 향해 강환을 던지려다 멈칫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네년, 검성의 딸이로구나. 역천혈마께선 아직 그 안에 계시더냐?”

그러자 해청연의 안에서 과염이 광소를 터트렸다.

- 오호호호호! 나야 이 안에 잘 있지! 청연이, 너 사실은 인질이 되고 싶어 이곳에 온 것이었구나?! 오호호호호!

해청연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구우절에게 말했다.

“그래, 역천혈마는 내 안에 아주 잘 있다. 지금 네게 구해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구나!”

해청연은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구우절에게 돌진했다.

방어를 도외시한 무모한 공격이었다.

“하아아압!”

“음?!”

구우절은 그녀의 공격을 다시 쳐내려다 멈칫하고는 몸을 피해 물러섰다.

역천혈마가 안에 있는 이상 그녀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해청연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구우절을 따라붙었다.

한 수, 한 수가 목숨을 내놓은 듯한 동귀어진의 공격이었다.

“역천혈마가!”

“말하는구나!”

“빨리!”

“꺼내 달라고!”

그러자 과염은 이제 해청연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구우절이 그녀를 죽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예상했다는 걸 말이다.

- 이년!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과염의 말에 해청연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이젠 누가 인질이지?’

- 이년!

해청연의 계획은 무척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가 그리 오래갈 수는 없었다.

구우절과의 무력 차이가 너무 크게 나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앙!

“크윽!”

한동안 계속해서 해청연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구우절은 마침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고 딱 해청연이 간신히 감당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그러자 구우절의 장법과 검을 부딪친 해청연은 계속해서 뒤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그녀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어차피 멀쩡하게 잡아갈 수 없다면 내상을 입혀 쓰러뜨려서라도 잡아가겠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녀로서는 대응할만한 방법이 없었고 벌써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자 과염은 다시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 오호호호!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몸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이제 다 끝났다! 너는 곧 잡히게 될 것이다! 시간을 끌어 추격자들이 올 시간을 벌어주려 한 모양이지만, 고작 이 정도 시간으론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콰아아앙!

“아아아악!”

해청연은 마침내 더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가 땅을 뒹굴고 말았다.

“쿨럭!”

해청연의 입에서 울컥 솟구친 피가 땅을 적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섰다.

이미 다시 싸울만한 힘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지만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구우절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다 잡았으니 데려가기만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해청연이 문득 피가 흐르는 입을 벌려 말했다.

“그거 알아?”

그녀의 질문에 구우절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작 이 정도 시간이란 말은 틀렸어.”

구우절이 아닌 과염에게 한 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과염이 그녀에게 반문했다.

- …뭐라고?

그러자 해청연이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그에겐 말이야.”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부터 연보라색 빛줄기 하나가 유성보다도 빠른 속도로 내리꽂혔다.

선우진이었다.

“감히!”

분노한 고함과 함께 선우진의 검이 공간을 찢었다.

‘개천’이었다.

촤아아아아악!

“허어억!”

구우절은 죽을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뒤로 날아가고 있는 그의 몸에선 이미 팔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끄아아아악! 내 팔!”

게다가 선우진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구우절은 뒤로 날아가고 있는 자신의 눈앞에 갑자기 선우진의 얼굴이 나타나자 경악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신법이었다.

“네가!”

촤아아아아악!

선우진의 분노한 외침, 다시 한번 찢긴 공간과 함께 남은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갔다.

그걸 본 구우절은 절망적으로 소리쳐야 했다.

“안 돼!”

해청연의 속에 있는 과염 또한 마찬가지였다.

- 안 돼! 안 돼!

구우절의 양팔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제 그의 손으론 더 이상 혈마인을 만들 수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 절망적인 사실에 구우절이 절규할 때, 선우진은 다시 한번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며 개천을 전개했다.

“내 아내를!”

촤아아아아악!

이번엔 두 다리였다.

“끄아아아악!”

사지가 떨어진 구우절은 벌레처럼 땅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그럴 새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의 분노한 일격은 광폭하게 그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다치게 해?!”

촤아아아아악!

해청연은 멍하니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구우절을 죽여버렸을 때 입을 열어 말했다.

“그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살려서 정보를 캐냈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해청연의 눈에선 문득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행복했다.

너무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저렇게 분노해줬다는 사실이.

내 아내를 다치게 했다고 말해줬다는 사실이.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행복했다.

“으흐흑!”

해청연이 말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서 흐느끼기 시작하자 깜짝 놀란 선우진은 순식간에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청연! 괜찮소?!”

해청연은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위해 분노해준 그의 모습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추슬렀다.

이 행복감에 취해 또 진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다시 또 늦어버리기 전에 지금 말해야만 했다.

해청연은 애써 눈물을 참고는 선우진에게 말했다.

“말할 게 있어요. 나 점창산에 저들이 만든 도주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미안해요.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또, 일부러 형님과 아우, 무엇보다 묘 소저에게 못되게 굴었어요. 그녀가 만약 당신의 아내가 되면… 내 역할이 사라져 버릴까 봐.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져 내가 필요 없어져 버릴까 봐….”

항상 이성적이고 차분했던 해청연은 눈물을 흘리며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언제 그렇게 많은 말들이 맺혀 있었는지, 수없이 많은 말들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모든 말을 다 쏟아낼 때까지….

“미안해요. 당신의 신뢰를 저버려서. 내가 신뢰받기 힘든 상황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당신을 원망했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선우진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해청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오, 청연.”

해청연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에게 듣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안아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우진은 그녀를 꼭 안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 당신이 힘들어하고 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소. 애초에 스승님과 함께 있어 행복한 내가 역천혈마와 함께 있을 당신이 힘들다는 걸 왜 몰랐겠소?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런 부분에서 내가 워낙 무능하다 보니, 어떻게 당신을 위로해 줘야 할지 알지 못했소. 그저 어떻게든 역천혈마를 꺼낼 준비에만 몰두했지, 정작 힘들어할 당신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구려. 정말, 정말 미안하오. 다 부족한 내 잘못이오.”

해청연은 다시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선우진의 말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그 한마디 한마디가 다 진심으로 들려서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으흐흑!”

선우진은 흐느끼고 있는 해청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너무 울어 걱정이 될 만도 하지만, 스승인 검신이 그녀가 지금 행복해하고 있는 거라고 장담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울고 있는 그녀를 보던 선우진은 문득 그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천하제일미인 그녀는 늘 아름다웠었다.

하지만 늘 그렇게 항상 완벽하고 너무 이성적이어서 대하기가 편하지는 않았다.

근데 그랬던 그녀가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여리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에게 안겨 울고 있었다.

그래서 선우진은 또 새로운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우는 모습조차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도무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선우진은 해청연의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해청연이 살짝 고개를 빼며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 이, 입술에 피를 안 닦았는데….”

하지만 선우진은 빙긋이 웃음 짓고는 바로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읍!”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설레는 기분.

그녀와 처음으로 하게 된 연인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해청연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수줍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 선우진은 다시 입을 맞췄다.

그러자 해청연도 자연스럽게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다시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혈교토벌대와 합류하기 위해 다시 점창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마치 노부부가 산책을 하듯 천천히 산길을 올라가는 두 사람의 손은 깍지를 낀 채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해청연은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는 선우진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계속 아이를 못 가지게 된다면….”

그러자 선우진이 그녀를 향해 씨익 웃으며 갑자기 물었다.

“우리 함께 여행 가지 않겠소?”

자신의 말과 전혀 상관없는 그 뜬금없는 질문에 해청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여행이요?”

그러자 선우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혈교와의 싸움도 마무리됐으니 나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소. 당장 제일 하고 싶은 게 여행인데, 생각해보니 여은, 소은과는 꽤 오랜 시간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더구려. 그러니… 어떻소? 이번 기회에 나와 둘이서 여행을 한번 가 보는 건?”

해청연은 잠시 멍하니 그의 따뜻한 눈빛을 바라봤다.

그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괜찮다고.

아이가 없으니 함께 여행을 갈 수 있지 않냐고.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얘기를 해 주고 싶다는 걸 말이다.해청연은 그의 배려가 너무 따뜻해서 다시 또 눈물이 났다.

행복한 웃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그런 눈물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놀리듯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울보인 줄은 여태 몰랐구려. 앞으로는 손수건을 많이 가지고 다니리다.”

그 말에 해청연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몰랐네요. 아마 눈물을 모아놨던 둑이라도 터졌나 봐요.”

그런 것 같았다.

선우진과 혼인한 후, 또는 역천혈마의 영혼을 몸에 담게 된 후.

아니, 어쩌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쌓여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다시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쌓아두지 마시오. 내 앞에선 흘려도 되오. 아니, 부디 그렇게 해주시오. 내가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있도록 말이오.”

해청연은 물기가 어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했다.

그때 선우진이 문득 다시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 알고 있소? 당신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걸.”

해청연이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면 아마 예쁘다는 말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실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까지는 그랬던 것 같았다.

선우진이 그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말이 무척 기분 좋은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그녀의 가슴이 너무나도 기쁘고, 또 설레고 있었으니까.

해청연은 문득 그의 머리 뒤로 천천히 붉어지고 있는 파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완벽했다.

모든 게 너무나도 완벽한, 그런 날이었다.

그녀는 문득 결심했다.

언젠가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선우진과의 첫 만남과 그를 놓치게 한 오만함도.

서로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난과 위기들도.

그리고 서로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얻게 된 구원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마도 이렇게 끝날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빠와 엄마는 늘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단다.’라고 말이다.

해청연은 이제 그 사실을 더 이상 의심치 않았다.

마교전선 비룡십삼대. 완(完)

@외전. 이백 년 전의 이야기

어느 외딴 숲속.

청년 한 명이 여러 명의 병장기를 든 무인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무인들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청년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어이, 환상검 선우용! 고집은 이제 그만 부리고 등짐을 내놓지 그래? 얌전히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하잖아?”

그러자 주춤주춤 물러서던 청년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야, 이 빌어먹을 호로새끼들아! 바로 전날까지 한솥밥을 먹던 동료의 전 재산을 강탈할 생각을 하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들이냐?! 에라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 그러고도 니들 뒤통수는 무사할 것 같으냐?!”

걸쭉한 욕설 하나하나에 분노가 가득 찬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의 욕설을 들은 무사들은 화도 내지 않은 채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뒤통수? 아마 무사할걸? 우리는 너처럼 알뜰하게 돈을 모으는 성격들이 아니잖아? 그런 우리가 왜 서로의 뒤통수를 치겠어? 해봐야 나올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크흐흐흐흐, 그 말 진짜 정답이로군.”

“크헤헤헤헤! 우리는 영원히 사이좋은 친구라고. 다들 빈털터리거든? 크헤헤헤헤!”

청년 선우용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갈았다.

그가 낭인 생활을 하며 알뜰하게 모아온 자신의 돈, 언젠가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먹을 것, 놀 것 다 아껴서 모아온 돈을 저 개자식들한테 빼앗기게 생긴 것이었다.

‘빌어먹을! 내 검만 있었어도….’

지금 그의 손에 검만 있었어도 저런 놈들쯤은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검 솜씨는 낭인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검은 지금 놈들의 손에 들려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바보같이 저 개놈들을 너무 믿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는 놈들과 자신의 등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씨부랄! 이 돈이면 대충 기반은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주지 않으려면 맨손으로 도검을 든 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얘기니까.

그리고 선우용은 맨손 격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씨발! 내가 이 자리에서 살아나면 맨손 박투만 죽도록 연습한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포위하고 있던 낭인 한 명이 최후통첩을 했다.

“자, 선우용. 이제 결정하자. 돈만 놓고 갈지, 아니면 목도 같이 놓고 갈지를 말이야.”

“크헤헤헤헤!”

선우용은 씹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다 자신의 등짐을 힐끗 돌아보았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돈은 빼앗기면 다시 벌 수 있지만, 목을 빼앗기면 다시 붙일 수 없을 테니까.

선우가문을 크게 키우겠다는 그의 꿈은 아무래도 잠시 미뤄야만 할 것 같았다.

선우용은 이를 갈며 등짐을 앞으로 꺼냈다.

그러자 무인들이 눈을 빛내며 그에게 말했다.

“오오오! 좋아! 그래, 이제 그걸 이쪽으로 던져라.”

그 말에 다시 한번 이를 악문 선우용은 등짐을 하늘 위로 힘껏 던져 버렸다.

“옜다!”

휘이이익!

그러자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일부로 높이, 그리고 멀리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진짜 살려 줄지 알 수 없으니 저걸 던지고 도주할 생각이었다.

“오오오오!”

“돈이다!”

선우용은 놈들의 시선이 등짐에 팔린 사이 바로 뒤돌아섰다.

그대로 도망가 버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막 달리려던 선우용의 눈앞에 갑자기 찬란한 적광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이 열리며 무언가 튀어나와서 생긴 것 같은 그런 빛이었다.

그리고 선우용은 그 느낌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찬란한 빛이 뿜어졌던 허공에서 검 한 자루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검날에서 붉은 서기가 은은히 빛나고 있는, 딱 봐도 범상치 않은 검이었다.

“!”

선우용은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그 멍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는 검이 허공에서 떨어지려 하자 바로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오오오오!”

선우용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검을 살펴봤다.

낭인인 자신이 여태 본 적 없는 대단한 명검임에 분명했다.

물론 여러 가지 의문도 있었다.

왜 이게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또 왜 은은한 붉은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선우용은 그런 의문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걸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그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아직도 등짐을 받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배신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드득!

“이 개새끼들!”

선우용은 더 생각하지 않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돈에 정신이 팔린 놈들은 입을 헤 벌린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죽어, 이 새끼들아!”

슈아아악!

“으아아악!”

“어억?! 이, 이놈, 검이 대체, 끄아악!”

“서, 선우용, 사, 살려! 아아아악!”

잠시 후, 선우용은 온몸에 피칠을 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론 여덟 구의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등짐을 다시 챙기고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흐음.”

검날에 서려 있던 붉은 서기는 이제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문득 이게 말로만 듣던 마검이나 요검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사용자에게 저주를 불러일으킬 테니 당장 버려야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선우용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에이, 내 돈을 찾아줬으면 마검이 아니라 신검이지. 신검이 별거야?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기게 해주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선우용은 문득 선우가문을 일으키려는 이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도와준 이 검이 진짜 신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허공에서 나타났으니 틀림없었다.

선우용은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선우가문이 크게 일어나게 된다면 그건 네 덕분이겠구나. 너를 앞으로 우리 가문의 신물로 삼아야겠다. 이름은… 그래! 홍연검! 홍연검이라고 부르자!”

가문을 일으켜 세울 자금과 가문의 신물까지 생긴 선우용은 이제 환한 얼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귀주성, 다른 거대세력들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경쾌하게 걸으며 마치 생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홍연검에게 말을 걸었다

“내 목표는 언젠가 내 성을 딴 무림 세가를 만드는 거야. 선우세가 말이야. 모두 허튼 생각이라고 지랄들 했지만, 흥! 두고 보라지. 혹시 알아? 먼 훗날에 내 후손 중에 천하제일인이 나올지 말이야, 크크크. 그때까지 잘 부탁한다. 홍연검.”

선우용은 자신의 말을 들은 홍연검에게서 문득 은은한 붉은 서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미미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홍연검의 대답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선우용은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쩐지 자신의 허황된 꿈도 언젠가 정말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주 상쾌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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