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주말이 지나고 찾아온 이터니티 아카데미의 둘째 주 월요일. 그 시작은 운동장에서였다.
“다들, 새벽에 신선한 마력은 잘 마시고 왔겠지?”
““예!””
“좋아, 전방에 힘찬 함성 3초간 발사!”
─와아아아!
“그만! 쉬면서 마력을 순환해라.”
하진우는 마인 사건의 마무리 때문에 빠졌고, 대신 체육교관이 조례를 맡았다.
참고로 마력은 새벽과 밤에 가장 신선하다.
생도들의 눈이 초롱초롱한 것도 새벽부터 일어나 신선한 마력을 양껏 들이키고 왔기 때문이다. 마력 순환은 그걸 흡수하는 과정이었고. 하여간 부러운 새끼들.
“아우······, 죽겠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이 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주말 내내 북한산을 돌아다니며 마물을 잡은 후유증이 월요일 아침에서야 찾아온 것이다.
그나마 기력이 몸을 회복시켜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오늘 학교도 아슬아슬했다.
그 노가다 덕에 164만원이란 돈이 통장에 꽂히기야 했지만······
참고로 신동훈과는 헤어지면서 번호를 교환했다. 마수를 사냥할 때 사체를 처리하자면 길잡이는 필수인데다 실력까지 좋아서 나름 만족스러운 인재였다. 아멜리아한테는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그나저나 슬슬 시작할 때네.’
은가예에게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터니티의 주연들에게는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으면 벗어나기 어려운 ‘사망선’이란 게 존재한다.
한세연의 마력폭주도 사망선이라면 사망선이었다. 그리고 둘 다음으로 사망선을 겪게 되는 건 바로 아멜리아였다.
나는 한편에서 마력을 순환하고 있는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흰 체육복에 바람결에 흩날리는 금발. 얘는 무슨 체육복만 입었는데도 일상이 화보다.
마침 마력순환을 끝냈는지 시선을 느낀 아멜리아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왠지 모를 멋쩍음에 슬쩍 시선을 피하자니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북한산에는 잘 다녀오셨나요?”
“응, 덕분에 잘 다녀왔어. 고맙다.”
진심이다. 당일 아침에 동기생 문자 한 통을 받고 운전수 딸린 최고급 승용차에 길잡이까지 지원해주는 애는 이터니티에 오직 아멜리아가 유일했으니까.
“그런데 북한산에는 왜 다녀오신 거죠?”
“돈 벌러.”
“······흐음, 궁금하기야 하지만 말하기 곤란한 이유라면 묻지 않을게요.”
“진짠데.”
내가 거듭 진실임을 강조했으나 아멜리아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기야, 마수존에서 노는 아멜리아한테 마물이 출몰하는 북한산은 ‘초보자 사냥터’처럼 보이겠지. 그런 곳에서 돈을 벌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고.
나야 신체 능력치가 바닥이라 앞에서 막아줄 애가 없으면 위험하니 안전하게 마물이나 사냥하는 거지만. 용병 포상금 챙기는 것도 나름 쏠쏠했고. 이게 SP도 벌려서 은근 꿀이다.
“그럼 나중에 이야기해요.”
“어, 그래.”
나는 어느새 다가온 남자 생도와 대화를 나누는 아멜리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심통이 났는지 살짝 찌푸려진 표정이 평소의 아멜리아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생도를 상대론 언제나 잃지 않았던 형식적인 미소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아멜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생도는 조금 특별했으니까.
아멜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생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중충해 보이는 하얀 피부에 아멜리아와 같지만 푸석한 금발.
눈꼬리가 올라가 어딘가 야비하게 생긴 인상의 생도는 에머슨 로마노. 아멜리아의 사촌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개꼴통이지.’
어느 정도냐면 엘리트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초인의 명문, 로마노에서 유일하게 포기하고 내다 버린 구제 불능이 바로 에머슨이었다.
물론 이터니티에 입학한 만큼 실력이 뒤떨어지거나 성적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었다.
실력도 있고, 나름 성적도 나오기는 하는데, 애가 제 분수파악을 죽어도 못한다.
끼어들 때 빠질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성이라도 좀 좋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라서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는 개차반이었다.
그 바람에 별의 성좌가 입은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그러니 에머슨이 가문의 눈 밖에 나버린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아멜리아가 사촌이라고 마지못해 챙기고 있는 것이다.
‘실력지상주의’를 당연시 여기는 아멜리아였지만, 의외로 이상한 부분에서 정에 약한 타입이었으니까.
한 마디로 똥 싸는 놈과 치우는 자의 조합이라고 보면 되었다.
문제는 그 똥이 범람해서 아멜리아 자신의 사망선까지 이어져 버린다는 거지만.
‘쟤도 참 고생이 많네.’
에머슨이 또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를 해대는지 받아주는 아멜리아의 표정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덧 마력순환 시간이 끝이 났다.
“아침부터 다들 활기차서 좋군. 산뜻하게 운동장 10바퀴만 돌고 들어가는 걸로 하겠다.”
조례라는 단어의 정의를 알긴 하는지 멋대로 훈련을 추가해버리는 체육교관.
이 공원만한 운동장의 10바퀴가 어떻게 산뜻하다는 건진 도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거, 열외 안되나?
***
······당연하게도 열외 따위는 없었다. 열외도 교관 재량하에 하는 건데, 체육교관은 나를 무슨 ‘나태한 천재’쯤으로 여기는 눈치였으니까.
그래도 다행히 기력이 늘어서 그런지 작살난 몸 상태로도 10바퀴 정도는 어찌어찌 뛸 수 있었다.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아우.”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파김치처럼 늘어졌다.
멍하니 누워있자니 눈앞으로 레모나가 내밀어졌다.
“피곤하지?”
옆을 돌아보니 한세연이 싱긋 웃어 보였다.
얘는 이틀 전에 그런 일을 겪고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아니, 안색이 조금 밝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한세연에게 모르도와 계약하라 한 건 나였지만 솔직히 나도 처음 시도해보는 일이라 잘 될 거라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약간의 우려가 있던 건 사실이었다. 모르도가 어디 보통 마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멀쩡한 걸 보면 계약은 역시나 성공적이었다.
다만 마수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좋지 못한 걸 생각하자면 한세연이 모르도의 능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란 어려웠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
한세연은 어디까지나 위험할 때를 대비한 비장의 패였으니까.
***
오전은 이론 수업의 연속이었다.
게임에 들어와서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낙제를 피하려면 적어도 기본점수 정도는 나와줘야 했으니까.
칠판을 빼곡하게 수놓는 ‘룬어’를 보며 나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쓰는 게 더 힘들겠다.’
4교시, ‘룬어 수업’을 맡게 된 교관은 일전에 ‘마력 훈련 수업’을 진행했던 협회소속의 5서클 마법사 김주혁이었다.
그리고 이 인간은 잘난 척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는지 한국어로 대체 가능한 설명이나 문장까지 전부 룬어로 표기해버리는 수업방식을 고집했다.
참고로 ‘룬어’란, 글자 자체가 힘을 가지는 마력의 언어다.
특기가 마법계열이 아니라면 쓸 일도 없는 고대어였으나, 검사나 사수라도 마법에 대응하려면 룬어를 쓰진 못해도 읽을 줄은 알아야 했기에 룬어과목이 필수이긴 했다.
영어는 몰라도 알파벳은 아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나 할까.
그걸 감안하더라도 모든 필기를 전부 룬어로 진행하는 미친 교수는 이터니티에서 오직 김주혁이 유일했지만.
쓰기 힘든 문자를 제 잘난 척을 위해 참고 감수한다는 게 어떤 의미로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나는 신기한 눈으로 김주혁이 칠판에 써 내려가는 룬어를 바라보았다.
게임에서도 보았지만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형학적 문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지금 게임에서는 읽지 못했던 그 룬어를 읽을 수가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해석기라도 달린 것처럼 단순히 알파벳만이 아니라 그 속뜻까지 전부 파악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도 플레이어의 혜택인가?’
그렇게 신기하게 칠판에 적힌 룬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게 생도들한테는 미친 난이도였나 보다.
“저거 해석 되냐?”
“난 읽지도 못하겠어.”
주변에서 앓는 소리가 하나둘 속출했다.
김주혁은 그런 생도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필기를 이어나갔다. 다 쓰고 나서 풀이를 해주려는 거다.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을 써놓고 마지막에 풀이를 해주며 우월감을 젖는 것. 그게 바로 김주혁의 수업 스타일이자 삶의 낙이었으니까. 당연히 그 과정 또한 순탄치만은 않았다.
“누구, 여기 이 문단을 해석해 볼 생도 있습니까? 완벽한 해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
순식간에 적막해지는 교실.
모범생인 니콜라이조차 입을 우물거리는 걸 보면 또 더럽게 어려운 문장을 써 놨나 보다.
“아무도 없나 보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제가 지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안경을 한 차례 추켜올린 김주혁이 교실을 슥 둘러보더니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해솔 생도, 일어나서 한 번 해석해 보시겠습니까?”
‘에휴.’
이건 누가 봐도 고의였다.
김주혁은 마력 훈련 수업에서 내게 수모를 당했다고 여겼는지, 그 뒤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니까.
‘네까짓 게 이 위대한 마법의 언어를 감히 읽을 수는 있겠느냐’는 비웃음이 얼굴에 노골적으로 담겨있다. 하여간 저런 것도 교수라고······
그나저나.
“완벽하게 읽으면 뭐 없나요?”
주변의 반응을 보니 이건 엄청 어려운 문제 같았다.
김주혁의 표정만 봐도 나를 물 먹이려고 준비한 문제인 게 빤히 보였고.
그런 걸 맨 입으로 푸는 건 좀 아니지.
이런 내 물음에 김주혁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벌써 다 해석했다는 말입니까? 문단을?”
“예,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요. 뭘.”
그냥 다 보이는데 어려운 게 있을 리가.
별거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 떤다는 내 반응에 김주혁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풀지 못하는 거 써 놓고 생도보고 풀어보라 한 건 아니시겠죠?”
“···그야 당연합니다.”
······이 새끼, 이거 진짜였네.
‘하여간 양심은.’
아무튼 보상은 물 건너간 듯싶었다. 정답을 안다고 대놓고 말했는데 어떤 인간이 그런 사람한테 보상을 줘?
‘김주혁이 무슨 호구도 아니고.’
그런데 내 생각보다 김주혁은 더 호구였다.
“어쨌든 좋습니다. 정말 문단을 다 해석하면 원하는 보상을 드리지요.”
난 네가 문단을 다 해석했다는 걸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김주혁. 그 미소가 너무 눈이 부셨다.
‘뭐지? 천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