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제가 원하는 보상이라면 뭐든 다 주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해솔의 말에 김주혁은 잠깐 뜸을 들이다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건 김주혁이 통이 크거나 이해솔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나는 수업 중에 생도가 문제만 맞춰도 원하는 것을 들어줄 만큼 통이 큰 사람이다라는 것을 생도들에게 인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주혁의 그런 작전은 이미 반쯤 성공한 상태였다. 벌써부터 그를 바라보는 생도들의 눈초리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원하는 보상을 주겠다’는 리스크 높은 조건을 내걸긴 했지만, 김주혁은 자신이 있었다.
‘설마 이걸 다 해석했을 리가.’
이해솔의 여유 넘치는 태도가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아닐 것이다. 맞더라도 틀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게 룬어라는 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언어였으니까.
심지어 김주혁이 쓴 문단은 하나같이 배배 꼬아 놓아 그 뜻을 해석하는 데만 해도 제법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장들이었다.
하물며 이해솔은 이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전날 밤을 새우다 오기라도 한 건지 수업 내내 졸린 티를 팍팍 내고 있었으니까.
‘건방진 놈.’
가뜩이나 일전의 수업 때 녀석에게 수모를 당했기 때문인지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아무튼, 이해솔이 칠판을 제대로 본 것은 김주혁이 알기로 불과 30초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룬어로 이루어진 문단을 완벽히 해석해내기란 김주혁 본인이라도 어려웠다.
아니. 설사 이해솔이 문단을 완벽하게 해석해 낸다 할지라도 김주혁은 무조건 틀렸다 말할 작정이었다. 룬어의 해석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도 없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제깟 놈이 알 리가 없지.’
하라는 해석은 안 한 채, 눈을 찌푸린 이해솔의 모습에 김주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조금도 못 읽는 겁니까? 그러면 수업 중에 하품하는 것은······”
“이거 틀렸는데요?”
“그만하고 ······예? 틀렸다고요?”
“네. 문단이 틀렸네요. 여기하고 저기. 아니. 저것도 틀렸네. 와, 이건 왜 넣은 거예요?”
“그, 그게······”
앞으로 나온 이해솔이 분필을 든 채 문단의 여기저기를 체크하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김주혁은 정신이 없어졌다.
반박하고 싶어도 막상 반박할 말이 없을 만큼 이해솔의 지적이 너무 완벽했던 것이다.
‘뭐, 뭐 이런······!’
“아, 이제야 좀 읽을 수 있겠네. 마력은 길이요, 룬어는 길을 비추는 횃불이니, 이를 마도라 부른다. 마도를 걷는 자는······”
“그만! 그만! 됐습니다! 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만 자리로 돌아가 앉으세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김주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그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김주혁은 커다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쓴 문단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도, 또 그것을 이해솔이 찾아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를 생도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적당했다는 사실이 김주혁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었던 것이다.
“자리로 돌아가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해솔 생도.”
“아직 보상은 받지 못했는데요?”
“···으으! 원하는 걸 말해보세요.”
***
‘와, 개꿀이네.’
김주혁이 이를 갈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내게는 달콤한 꿀단지처럼 보여왔다.
그도 그럴 게 김주혁은 걸어 다니는 마도상점같은 존재다.
허영심을 채우려고 그가 몸에 두르고 다니는 명품 마도구만 무려 5개였으며, 그 외의 마법물품 조차 셀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마법을 익히면서도 5서클에 도달한 건 그의 재능도 있지만, 집안의 재력 덕이 컸던 것이다.
김주혁은 별거 아니지만, 그의 집안은 무려 마도사를 배출한 한국의 마법명가였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이터니티에서 교관 노릇도 하고 있는 거다.
아무튼, 그런 걸어 다니는 마도상점인 김주혁이 원하는 보상을 아무거나 고르라 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김주혁이 지닌 값비싼 마도구를 요구하고 싶었으나 그건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당장 줄지도 의문인데다 김주혁이 지닌 마도구들은 하나같이 마력이 요구되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마력이 전무한 내게는 맞지도 않을뿐더러, 기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해 봐야 내 적은 기력을 가지고 효율이 나올 리가 없었다.
‘효율이 나온다고 해도 고를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이미 김주혁에게서 무엇을 얻어갈지 미리 생각해놓은 것이 있었다.
‘정혼의 씨앗.’
정신을 정화시켜 주는 포션인 ‘정혼의 술’을 제조할 수 있는 마법시약.
정혼의 씨앗을 이용해 제조한 정혼의 술을 마시게 된 사람은 어떠한 정신적인 타격에서도 온전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부동의 각인’을 얻게 된다.
별것 아닌 능력 같지만,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동안 나는 이카루스의 반지를 사용해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에 심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혼의 씨앗을 얻어 부동의 각인을 완성한다면 그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부동의 각인이 지니는 ‘정신 유지력’이 이카루스의 반지를 사용함으로 인해 마모되는 정신을 유지 시켜 줄 테니까.
당연히 이러한 ‘부동의 각인’을 완성시켜 주는 재료인 ‘정혼의 씨앗’은 대단히 귀중한 마법시약이었다.
하지만 김주혁은 정혼의 씨앗이 그만큼 귀중한 재료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무엇에 쓰이는지 쓰임새를 알 수 없어, 단순히 연구재료로서 지니고 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정혼의 씨앗을 이용해 완성되는 ‘부동의 각인’은 오로지 <이터니티 검성전기> 의 게임 내에서만 존재하던 능력이었으니 김주혁이 이를 알 리가 없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값비싼 마도구를 요구할까 봐 잔뜩 긴장해있던 김주혁은 ‘품에 지닌 푸른 씨앗 있잖아요. 그거 주세요.’란 내 말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도 않고, 행여 말을 바꿀까 봐서는 후다닥 넘겨주었다.
정혼의 씨앗을 받아든 내가 자리로 돌아가 앉자 김주혁은 그제야 구겨진 표정을 숨기려는지 잽싸게 칠판으로 돌아섰다.
“바, 방금 이해솔 생도가 해석한 문단은 현대 룬어의 기틀을 다지신 디에락 마도사의······”
차마 목소리의 떨림마저 감추진 못하겠는지 버벅대며 풀이를 해석하는 게 웃겼지만.
‘그나저나 대박이네. 이게 이렇게 쉽게 들어오다니.’
나는 손 안의 푸른 씨앗을 바라보았다.
[정혼의 씨앗]
[정혼의 술을 만들기 위한 마법시약.]
*정혼의 술을 제조해 복용 시, 부동의 각인을 새길 수 있다.
[비용 : 3000SP]
학기 말 마인이 된 김주혁을 없애야지만 얻을 수 있는 마법시약.
그렇기에 당장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김주혁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인해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나저나 더럽게 비싸네.’
3000SP라는 비용에 내가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그건 뭐냐?”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정혼의 씨앗을 품에 집어넣었다. 한세연의 옆에서 은가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흐음,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진 않은데?”
수상쩍다는 듯이 정혼의 씨앗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바라보던 은가예가 이내 놀란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나저나 너 룬어도 읽을 줄 알았냐?”
“어, 조금은.”
“아니. 그렇게 똑똑한데 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은가예.
그도 그럴 게 나는 요 며칠 내내 수업의 진도조차 못 따라가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빗줄기의 신’이라는 은가예조차 ‘너보다는 내가 낫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을까. 물론 그건 내가 은가예보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그야 공부를 안 했으니까.”
처음 하는 과목을 잘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아으, 더러운 세상.”
삶의 의욕을 잃은 은가예가 책상으로 토라졌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고맙다, 잘 썼어.”
나는 한세연에게 좀 전에 빌렸던 마력이론 요점정리 노트를 돌려주었다.
“언제든지 빌리고 싶으면 말해.”
“오케이.”
싱긋 웃은 한세연이 노트를 받아 챙겼다.
‘엄친딸’이라는 설정답게 그녀는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와 은가예를 노트까지 보여가며 보모처럼 챙기고 있던 것이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10분이나 남아 있는 상황임에도 종강을 선언한 김주혁이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갔다.
***
······오전의 수업이 지난 점심시간.
이터니티의 취사장은 수백 명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건물이다.
그 안에는 생도들의 건강을 위한 다양한 헬스푸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야 뼛속까지 맛있게 먹고 죽자는 타입이기에 소세지, 돈까스 등 취향에 맞게 골라 담는 편이다.
“영양 밸런스가 엉망이군. 그렇게 부실하게 먹으니 구보도 못 하는 거다.”
밸런스에 집착하는 니콜라이가 내 식판이 마음에 안 드는지 참견을 해왔다.
“됐네요, 전 제 마음대로 먹다 죽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룬 공부는 어떻게 했지? 노트가 있으면 빌리고 싶군.”
아, 그게 목적이었냐. 역시 우등생 다운 이유였다.
“그런 거 없으니까 가줄래?”
돈을 준다는 니콜라이를 손을 저어 내쫓은 나는 대충 배식을 받아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누가 식판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가관이다.
닭가슴살, 피망, 가지, 브로컬리······
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끔찍한 비쥬얼. 니콜라이도 저렇게는 못 먹겠다.
누가 이런 걸 점심으로 처먹나 싶어 고개를 드니 천우진이었다.
‘진짜 이런 걸 먹을 줄이야.’
천우진의 캐릭터 특징에 ‘건강을 유독 챙긴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저건 좀 선 넘은 게 아닌까 싶다.
무슨 쑥 먹는 곰도 아니고······
그걸 또 일일이 꼭꼭 씹어먹는 모습에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맛있냐?”
“익숙해지면 먹을 만 해.”
가지를 입에 문 채 웃어 보이는 천우진.
끔찍한 맛에 애가 정신까지 이상해진 모양이다.
혀를 찬 나는 소세지 한 점을 집어먹었다. 그렇게 타격을 받은 입가를 가공육으로 달래고 있을 때였다. 내 옆으로 식판 하나가 내려왔다.
음, 이번엔 그나마 괜찮은 비쥬얼이네.
내 옆자리에 앉은 건 은가예였다.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설명 좀 제대로 해봐.”
“뭐를? 마력이론?”
“그건 내가 너보다 낫고.”
“······.”
내 어이없다는 눈초리에 슬쩍 시선을 피한 은가예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힘 좀 빼라는 게 무슨 말이야?”
“아, 그거?”
“응.”
은가예의 눈이 기대를 담고 반짝였다.
“말 그대로야. 힘 좀 빼라고.”
“···그게 다?”
“응, 그게 다.”
은가예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이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은가예에게는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이런 건 누가 알려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면서 깨져 봐야 알 수 있는 거였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내가 은가예를 도울 방법이 없기도 했다.
은가예가 마력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인 가문의 검술부터 버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버렸다간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 말도 못 할 수밖에.
그러다 문득 은가예가 게임에서 쓰던 검이 지금보다 더 컸던 게 생각났다.
지금 은가예가 지닌 검이 레이피어처럼 얇은 계열에 가까운 예도라면 게임에서 쓰던 검은 그보단 훨씬 두꺼웠으니까. 그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겠지.
“검 좀 큰 걸로 바꾸던지.”
은가예에게 지금의 예도는 너무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