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블랙마켓에 가기에 앞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한세울한테 이터니티의 아이템을 카피시키게 하려면 그에 따른 ‘원본’을 챙겨가야 했으니 말이다.
내가 카피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터니티의 ‘비약’이었다.
신체의 스텟을 영구적, 혹은 한시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아이템. 근데 이게 또 가격이 더럽게 비쌌다.
특히, 영구적인 상승을 시켜주는 최상급 비약쯤 되면 차라리 기프트를 하나 투영하는 게 훨씬 나을 정도였다.
물론 나야 저런 비약은 아예 쳐다도 안 봤다. 당장 최하급도 못 사서 허덕이는 와중이었으니까.
【붉은 단약】
-10분간 체력 스텟을 ‘5’ 상승시켜 주는 이터니티의 최하급 비약.
*필요 재료 : 하급 마력석x1, 부유초x1, 활력 포션x1
[필요 포인트 : 500SP]
고작 1회용, 그것도 10분밖에 체력을 상승시켜주지 않는 비약.
효율은 최악인 주제에 들어가는 재료하며,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상태창 시스템은 게임에서와 동일하게 구현되었고, 게임에서는 비약에 필요한 재료나 SP를 구하기가 무척이나 쉬웠던 것이다.
하급 마력석이나 활력 포션은 마물 몇 마리만 잡아도 나오는 아이템이었으니까.
반면 그런 것 따위 없이 한정적인 자원으로 굴려야 하는 현재로서는 저 재료들을 구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난이도였다.
하물며 구해서 만들어봤자 고작 10분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소모성 아이템이니 저걸 만든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다만, 나는 이를 연금제약주 한세울을 통해 ‘열화판’으로 카피할 생각이었기에 견본을 구해야 했다.
*필요 재료 : 하급 마력석x1, 부유초x1, 활력 포션x1
“부유초만 남았나.”
하급마력석이야 방에 굴러다녔고 활력포션도 니콜라이한테서 받았으니 남은 것은 부유초뿐이었다.
참고로 활력 포션은 체력증진 포션이긴 한데, 이게 증가 폭이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 몇번 마시면 더 이상 오르지를 않는다. 당장 마시면 좋기야 하겠지만, 붉은 단약을 대량으로 카피하자면 어쩔 수 없이 재료로 소모하는 수밖에는 없는 물건이었다.
붉은 단약이 단발성이긴 해도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 활력 포션보다 훨씬 유용했으니까.
아무튼, 남은 재료인 부유초는 이터니티의 필드 중입, 호저의 언덕에서 구할 수 있다.
호저란,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달고 다니는 마수로, 무척이나 호전적인 놈들이었다.
당연히 나 혼자서 그곳을 뚫고 부유초를 채집해 오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준비물은 튼튼한 두 다리뿐이다.
특급 길잡이를 섭외시켜놨으니까.
그것도 둘씩이나.
***
······일요일 오전 9시.
나와 내가 부른 두 명의 게스트는 기숙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왔어? 좋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오자니, 현관 앞에서 한세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일찍 나왔네.”
“응, 아침에는 마력이 맑잖아. 마력을 좀 마시고 있었어.”
한세연은 보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음에도 호저의 언덕에 가자는 내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내 목적이야 어쨌건 마수를 사냥한다는 것 자체를 기대하는 듯했다.
얘는 무슨 마수 잡는 걸 낚시쯤의 취미로 여기는 애였으니까.
사실 한세연이 모르도를 꺼낼 수만 있다면야, 얘 혼자만 데려가도 부유초를 채집해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터니티의 필드는 아카데미에서 관리하는 구역.
행여나 한세연이 모르도를 드러내보였다가 이를 들키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니, 모르도를 사용하는 건 패스.
물론 모르도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한세연 혼자서라면 부유초를 채집해 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위험해서 데리고 가는 거지.
내가 신체 가속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4번 정도 쓰면 지쳐 나가떨어지니까.
마수들이 덮쳐들면 나 혼자서는 답이 없었다. 그러니 일행을 둘씩이나 대동하는 거고.
“···앗, 미안. 내가 좀 늦었나 보네.”
뒤늦게 나머지 한 명의 생도가 기숙사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짧은 은발. 푸른 눈. 작달막한 키. 가슴에 끌어안은 곰 인형.
일레인 디아즈였다.
얘는 왜 불렀냐고?
‘개사기니까.’
마수가 떼 거지로 몰려있는 장소에서야말로 일레인이 가장 빛을 발하는 전장이었다.
그녀가 지닌 마법 중 무려 10가지가 광역 마법이었으며, 지능이 대체적으로 낮은 마수는 ‘저주마법’에 기가 막히게 잘 걸려드니까.
참고로 이쪽도 보수는 공짜다.
‘마음의 빚’을 갚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나 뭐라나······
이틀 전까지만 해도 어색한지 나랑 눈도 못 마주쳤는데,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는지, 말 정도는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정작 퇴교당하지 않게 도와준 건 김주혁이건만 오히려 내가 그 덕을 보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얘는 공짜로 일하는 게 맞지.’
초인주제에 나보다 체력이 딸리는 일레인이다. 그리고 부유초는 붉은 단약의 재료답게, 섭취 시 짧은 시간 동안 몸을 가볍게 해준다.
호저의 언덕에 부유초야 널려있으니 가서 따면 나도 좋고 일레인도 좋다는 소리였다.
툭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얹어가는 건 일레인이 아닌 나였지만.
오늘 난 전투를 치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해봤자 ‘잔반 처리반’이다.
왜 그런지야, 가서 보면 안다.
***
필드의 시작부터 호저의 언덕까지 향하며 우리는 상당한 숫자의 마수들을 마주쳤다. 다만, 나와 일레인은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애초에 차례 자체가 오지 않았다.
슈팅 게임을 하듯 마수만 보이면 총을 족족 쏴대는 한세연으로 인해 우리의 반경 50m 내로는 마수가 얼씬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확실히, 이런 거리 전에서는 총을 따라올 무기가 없었다.
내 비도는 의지대로 움직이긴 하지만 총보단 사정거리가 짧았으니까.
‘그나저나, 그새 총이 또 바뀌었네.’
스미스 앤 웨슨인가?
저건 또 언제 구한 거야?
‘권총 애호가’답게 한세연의 총은 수시로 바뀌었다.
쉬는 시간마다 보면 총기수입(총기 손질)을 하고 있는 한세연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아마, 방에 가면 권총이 종류별로 있지 않을까 싶다.
‘공부’와 ‘총’.
정말 안 어울리는 극과 극의 조합이었지만, 이걸 한세연에 대입하자니 또 묘하게 잘 어울린다.
“오랜만에 즐겁게 놀았다.”
웃으며 총을 거두는 한세연.
그녀의 주변으로는 수없이 많은 마수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저걸 즐겁게 놀았다고 말하는 게 옳은 표현인가는 의문이었지만······
“여긴가 보구나. 호저의 언덕이란 곳이.”
“어, 맞아.”
앞에 펼쳐진 언덕. 한세연의 활약 덕에 우리는 호저의 언덕까지 산책하듯이 도달할 수 있었다.
언덕에는 섬뜩한 가시를 갑옷처럼 두른 호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저건 쏘지 마. 몰려오면 골치 아파지니까.”
“응, 알았어.”
나는 혹시라도 한세연이 총을 쏠 새랴, 미리 주의를 주었다.
호저는 내 비도나 한세연의 총으로 잡으면 진짜 큰일 나는 놈들이거든.
성질머리가 더럽게 사나운 호저는 한 마리를 잡으면 나머지 놈들도 우르르 몰려와버리기에 한 마리씩 잡아서는 답도 없다.
잡을 거면, 전부 잡던가, 아니면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할 마수가 바로 호저였다.
그렇기에 이럴 때를 대비해 데려온 게 바로 일레인이었다.
“할 수 있지?”
“걱정 마. 저 정도면 어렵지 않아.”
일레인이 교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약 봉투처럼 생긴 하얀 봉투였는데, 그 안에 담긴 건 얼음처럼 투명한 가루였다.
디아즈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소지하고 다닌다는 물건.
일명 ‘저주의 안개’라 불리는, 광역 저주를 펼칠 때 사용되는 마법의 가루였다.
일레인이 그 가루를 마수가 우글대는 언덕을 향해 뿌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무색무취의 가루.
저 저주의 가루에 닿는 생명체는 그게 무엇이 되었건, 저주마법에 대한 면역이 극도로 취약해진다.
특히, 호저처럼 지능이 떨어지면서 성정이 포악한 마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과연, 저주의 안개가 퍼지자 호저들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투레질을 하며 언덕을 뛰어다니는 호저들.
일레인이 광역 저주마법을 시전했다.
술식이 전개되며, 저주에 휘감긴 호저들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서로 죽여.】
마력이 담긴 일레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어서 펼쳐진 건,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광란의 살육.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들며, 호저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이게 바로 일레인이 마수가 떼거지로 몰려있을 때 사기인 이유였다.
모든 마수가 저주에 걸려들 필요 없이, 일부만 걸려들더라도, 걸려든 놈들이 난동을 부리면 멀쩡한 마수들조차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마수의 등급이 높을수록 저주에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한계가 존재하긴 했으나, 한 번 일어난 난동은 저주가 풀리더라도 계속되는 법이었다.
언덕의 호저들을 정리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놈들은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정이 포악한 놈들이었으니.
평소에도 지네들끼리 치고 박고 난리를 치는 놈들인데, 저주까지 걸려버렸으니 오죽할까.
이윽고 시간이 지나, 난전이 끝난 언덕은 피 흘리고 상처 입은 호저들로 가득했다.
깔끔하지 않은 마무리. 하지만 이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전개였다.
“잔반 처리반 출동 시간이네.”
“잔반처리반?”
“그런 게 있어.”
한세연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린 내가 앞으로 나섰다.
죽어라 마수를 잡아봐야, 경험만 늘지, 능력은 늘기 어려운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내 레벨업 조건은 ‘경험치’다.
혼자 마수를 잡건, 막타를 먹건, 경험치만 쌓으면 그만인 것이다.
가시도 죄다 부러지고, 피를 잔뜩 흘린 패잔병 같은 몰골의 호저들.
그람의 비도가 고통에 신음하는 호저들의 목숨을 끊어주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그람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순식간에 상태창을 가득 채우는 경험치 상승 문구들.
이게 진짜 날먹이지.
***
“어찌 다 모으긴 했네.”
부유초를 채집해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재료들을 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단약】
-10분간 체력 스텟을 ‘5’ 상승시켜 주는 이터니티의 비약.
*필요 재료 : 하급 마력석x1, 부유초x1, 활력 포션x1
[필요 포인트 : 500SP]
활력포션은 우연찮게 니콜라이를 통해 얻었고, 하급 마력석은 방안에 굴러다닐 정도로 넘쳐났다.
부유초까지 구했으니, 이로서 비약에 들어가는 재료는 모두 구했다.
만들어봤자 고작 10분이면 끝인 소모성 아이템이었지만······
[보유 포인트가 충분하여 하급 붉은 단약을 투영할 수 있습니다. 투영하시겠습니까?]
“예.”
나는 망설임 없이 붉은 단약을 투영했다.
하얀빛이 번쩍이고, 내 손 위로 동그란 붉은 단약 한 알이 나타났다.
이터니티의 하급 비약, ‘붉은 단약’이었다.
“옛날에는 수백 개씩 들고다니던 건데······”
고작 이거 하나 만들자고 재료들을 구하러 다녀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랴. 몸이 이따구인 걸.
견본까지 구했으니 붉은 단약의 열화판을 만들 준비는 모두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남은 건 이를 한세울한테 가져다주고 연구시키게 하면 끝.
행여 만들지 못할까 싶은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게임에서의 한세울의 별명은 ‘비약 복제기’였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 빌어먹을 SP강매제도로부터 벗어날 때가 왔다는 소리다.
상태창 독과점. 이거 처음부터 에바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