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학의 물결이 밤하늘을 밝히는 아카데미의 어딘가.
흔들의자에 앉은 노아는 말없이 창가를 내다보았다.
“마스터, 차가 식습니다.”
“타샤가 타 준 차는 맛없어.”
“그렇습니까.”
“응. 맹물이야.”
시무룩한 목소리에 냉담히 답한 노아가 별무리처럼 이어지는 학의 행진을 보며 물었다.
“타샤. 불사조에 대해 기억나니?”
“예, 1944년 5월 13일 16시 08분, 경성의 송월정 북문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마치 기록물을 대하듯 이야기하는 비서 차림의 여인.
그녀는 노아가 어릴 적부터 지니고 다녔던 가문의 마력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탄생한 존재이자, 수백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나저나 1944년이라니.
“더럽게 오래됐네.”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광경을 그리며 노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영멸’을 바라며 수명의 연장에 바보처럼 매달리던 그 녀석이 데리고 다니며 연구하던 사역마 불사조.
“있잖아, 타샤. 나 오늘 불사조를 보았어.”
“그렇습니까. 놀랍군요.”
“응. 정말 깜짝 놀랐어.”
노아는 불과 몇 시간 전 필드에서 보았던 불사조를 떠올렸다.
녀석은 그녀가 과거에 보았던 화려하고 웅장했던 불사조에 비하면, 작고 어린 새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불사조는 불사조였다. 그래서 마음에 걸렸다.
그건 과거 그녀의 동료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엇나가버린 녀석이 사용했던 사역마였으니까.
물론, 단순히 이뿐이었다면 노아가 이해솔이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녀석 외에 불사조를 사역하는 이가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었으니까.
그녀가 정말로 놀란 것은 다른 것이었다.
‘모르도.’
균열의 저편에서 건너온 생명체이자, 군주급에 해당하는 어둠의 마수.
창설제를 즐기러 오랜만에 나온 아카데미에서 녀석의 기운을 느꼈을 때, 노아는 깜짝 놀라 필드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숙주를 얻은 녀석을 목격한 노아는 모르도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광경에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도를 내쫓다니.’
한세연을 원래대로 되돌리던 이해솔의 모습을 떠올린 노아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침식을 시작한 모르도를 숙주로부터 말끔히 분리해내는 것은 그녀조차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이를 해낼 수 있는 자는 그녀가 알기로 전 세계에서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차원의 균열을 연 장본인이자, 최초로 불사조를 사역한 남자. 그리고 영멸의 밤이라 불리게 된 대마인.
“···유진.”
한때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동료였지만, 이제는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린 남자의 이름을 한자 한자 씹어뱉듯 내뱉으며 노아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이름.
‘이해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은 영멸의 밤과 같은 능력을 타고났다.
마인이 되기 전 영웅이라 불리던 시절의 녀석이 사용하던 것들을.
‘···후손인가?’
노아로서는 그렇게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둘 다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타고난 혈통이었으니까.
“타샤, 1학년 1반의 이해솔이란 생도에 관해 조사해 봐. 태어난 곳부터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모든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전부. 분명 녀석과의 연관점이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마스터.”
이내 찻잔을 치우며 앞치마를 두르는 타샤.
노아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야식은 뭐야?”
“보쌈과 맥주입니다.”
“역시 타샤야.”
“별말씀을.”
밤하늘에 물결치는 학을 올려다보며 노아가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
······창설제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1반 생도들의 얼굴에선 여전히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전 학년 학급을 통틀어 우리 반이 창설제에서 1등을 거머쥐었다는 결과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녀석을 보며 내가 혀를 찼다.
“그렇게 좋냐?”
“···별로 좋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시치미를 떼며 슬쩍 고개를 돌리는 아멜리아. 그럼에도 들뜬 목소리는 감추지 못한다.
하긴, 본인이 연출을 맡아 반을 1등시켰으니,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아멜리아는 이터니티에 진학해서 단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항상 2~5등의 어중간한 성적만 내던 녀석이 비록 단체전이라지만 본인의 주도하에 1등을 차지했으니 뿌듯할 수밖에.
“고맙다, 덕분에 학비하고 마도구까지 받았네.”
“···뭐, 고마워 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말과 달리, 흐흥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멜리아.
본인 스스로가 웃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게 포인트다.
“그러고 보니 환상공연도 결과가 나왔던데.”
내 중얼거림에 아멜리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합동공연뿐만이 아니라, 마법분야인 환상연의 연출도 본인이 맡았으니까.
다만, 먼저 물어보기에는 너무 기대한다는 표가 난다 여기는지, 귀만 슬쩍 열어놓은 채 내게서 빌린 룬어노트를 열심히 필사하는 척한다. 베낀 부분 또 베끼고 있네, 저거.
헛웃음을 흘린 나는 묘하게 골리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이건 못 참지.
“음, 몇 등이었더라?”
“······.”
내가 턱을 매만지며 뜸을 들이자, 아멜리아의 고개가 슬쩍 내쪽으로 기운다. 노트를 필사하던 손도 어느새 동작을 멈춰있었다.
“우리 반이 2등이었던가?”
“···아.”
아멜리아의 귀가 축 쳐졌다.
작은 탄식마저 흘리더니, 흠칫 입을 다문다.
“아, 1등이었지.”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는 아멜리아.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
“······.”
결국 호기심을 참다 못한 아멜리아가 짜증어린 표정으로 나를 홱 돌아보았다.
“아, 그래서 1등이라는 거예요, 2등이라는 거예요?”
“2등.”
“······.”
“농담이고 1등.”
“아씨.”
“야, 환상 공연······”
“됐어요.”
삐진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발을 콩콩 울리며 복도로 나가버린다. 본인이 직접 결과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아직 복도에 결과지 안 나왔다고 말하려 했는데.”
나는 뒷목을 긁적였다.
정해준을 통해 미리 지나가듯이 들은 것 뿐이지, 실제 결과 발표는 오늘이 아닌 내일 한다. 뭐, 1등은 맞으니 내가 거짓말을 친 건 아니지.
그때 내 앞으로 상태창 알림이 떠올랐다.
[시나리오 완료 : 창설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보상으로 3000SP가 수여됩니다.]
“오.”
웬일로 통 큰 보상을 주는 상태창에 내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니, 큰 것도 아닌가?’
폭탄 테러부터 한세연의 폭주까지 막았으니 3000SP면 무지 짠 거네. 그래도 생각 밖의 보상이었기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재료만 모으면 비약 하나쯤은 더 투영할 수 있겠는데······’
나는 상태창의 한쪽에 [비약 복제중]이란 창을 띄워보았다.
▶복제술사 한세울 Lv.1
【붉은 단약의 복제가 진행 중입니다.】
[복제 진행율 48%]
[예상 소요시간 : 36 : 17]
열화 붉은 단약은 20개나 쌓였으니 이건 이제 그만 복제시켜도 되겠다.
단약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저것도 다 재료 값이 장난이 아니게 들어서 마음껏 복제하기엔 무리다. 다른 비약을 복제하게 하던가, 아니면 쉬라 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이게 아무 비약이나 복제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다른 비약을 복제하려면 우선적으로 내가 SP와 재료를 통해 투영도 해야 하는 데다가, 한세울의 복제 레벨에 따라, 복제할 수 있는 비약의 종류에도 제약이 걸려 있던 것이다.
현재 한세울의 레벨은 1. 쓸모가 있어지려면 명성이나 실적을 쌓아 레벨을 올려야 했다.
==
▶복제 가능 비약
─최하급 붉은 단약(열화) - 20개 보유
─최하급 푸른 단약(열화) - 0개 보유
==
“푸른 단약이라······”
마력을 올려주는 단약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어서 아직 투영조차 안 했는데, 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여차하면 남한테 먹여서 버프를 시켜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조만간 써야 할 때도 있을 테고.’
곧 있을 ‘은가 침공’ 에피소드에 대비하자면 만들어둬도 좋겠다 싶었다.
문제는 푸른 단약이 이 세상 사람들한테 어느 정도의 효력을 보일 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터니티 게임의 비약의 효과가 반감되는 듯 했으니까.
그런 걸 따지더라도 이곳의 포션보다야 효과가 월등했지만.
‘시험 대상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교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고개를 드니 가자미눈을 한 채 이쪽을 째려보는 아멜리아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쟤한테 먹여보면 되겠네.”
픽 웃은 내가 단약의 시험 대상을 결정했을 때였다. 은가예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야, 축구 하자.”
“싫어 너 혼자 차라.”
“치, 재미없네.”
손을 훠이훠이 저어 은가예를 내보낸 나는 교실에 앉아 세월을 낚았다.
지금 시간은 자율 체육이었다.
스포츠를 즐기며 서로 간의 우정을 쌓는 시간.
체력 '4'인 내게 스포츠란 우정이 아닌 살인이었다.
창밖의 날아다니는 소림축구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자니 옆에서 공부를 하던 한세연이 돌연 배가 아프다며 칭얼댔다.
배가 아프면 아픈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지가 심히 궁금했으나 찔리기도 했고, 할 짓도 없었기에 몇 마디 대꾸를 해주자 이런저런 장난을 쳐 댄다.
그렇게 얘가 진짜 배가 아픈 애가 맞는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세울 때였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호명하는 1학년 1반 현장체험학습 인원 3명은 금일 방과 후 생도 지도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현장체험학습.
창설제 이후, 각반별로 돌아가며 치러지는 실제 현장 체험이다.
반마다 한 팀씩, 교수 추천으로 가게 되기에 누가 뽑힐 지는 순전히 교수의 마음대로였다.
사전에 교수와 생도간의 접촉을 배제하기 위해 추천교수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고.
‘안 뽑히면 좋겠는데.’
─호명 인원은 이해솔, 아멜리아. 은가예 이상 3명의 생도는 금일 방과 후 생도 지도실로······
“얄짤 없네.”
아주 철저하게 상위생도 위주로 뽑아버린다.
생도 지도실이라는 것을 보니, 보나 마나 정해준이었다.
***
6월의 초, 강원도 철원.
여름이 다가왔음에도 의외로 선선한 이곳은 마수가 빈번하게 출몰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렇기에 각 단체가 모두 지부를 하나 이상씩은 두고 있는 위험지역이었다.
확실히 현실에서의 철원하고는 사람들이 풍기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민간인보다는 용병들이 많다고나 할까.
“강원도라니, 처음 와봐요.”
“나도 처음.”
아멜리아와 은가예가 신기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아이들같은 반응에, 마중을 나온 초인이 귀엽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말만 엘리트다 뿐이지, 실상은 이런 위험지역조차 가본 적 없는 풋내기였으니까.
20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을 가문에서 위험지역에 실습으로 보낼 리도 없었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산야지대에서는 마물이 갑자기 출몰하니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안내역을 맡은 철원군 토박이 초인은 우리를 마치 어린애 다루듯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제딴에는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듯 했지만, 마수도 아니고 마물을 겁주려고 말하는 것에 살짝 어이가 없기는 했다.
“마침 저기 오시군요.”
멀리 산간의 초입에서 거대한 마수의 머리를 인 채 걸어오는 여인을 남자가 경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몸보다 큰 마수의 머리를 인 채 내딛는 일보 일보마다, 수미터를 이동하는 여인.
“속도봐, 미쳤다.”
“와···, 저게 기사인가요?”
은가예와 아멜리아가 탄성을 토했다. 나 또한 내심 놀랐다.
내가 신체가속을 한다해도 저것보단 빠를 수 없었으니까. 아니, 등에 저만한 사체를 매는 것부터가 무리다.
‘대체 뭘 잡은 거야?’
혀를 내두르고 있자니, 어느새 여인이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어라?’
무척이나 낯이 익은 얼굴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된 내가 눈을 빛냈다.
‘타이밍 딱 좋네.’
그녀는 마침 다음 에피소드를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할 패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었다.
“반가워. 다들 낯이 익네?”
순식간에 나타나 웃으며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초인. 그녀는 여명의 수호자의 1팀장, 백은의 기사 서하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