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토요일 오후 1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북한산에서 산 배낭에 전날 넣어놓은 짐들을 점검했다.
양치 도구, 옷, 양말, 스마트폰 충전기 등등.
해신연이 벌어지는 것은 내일이었으나 출발은 오늘 오후 2시였다.
은가예가 바삐 가봐야 될 일이 생겼다고 해서 우리까지 하룻밤을 묵기로 한 것이다.
그 바쁜 일이란 물론 가주인 은호성의 안위때문일 것이었다.
“그럼 가볼까.”
갈아입을 옷 한 벌 정도만 챙긴 가벼운 가방을 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방을 나와 뙤약볕의 교정을 거닐 때였다.
“여기야!”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은가예가 손을 흔들었다.
먼저 온 일행이 해를 피해 나무의 그늘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곰 인형을 옆자리에 앉힌 일레인, 여행에 들떴는지 시끄럽게 떠드는 데오릭.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는 한세연.
“아멜리아는?”
“아직 안 왔어. 곧 온다니까 들어가 있어.”
웬일로 늦는 아멜리아를 의아하게 여기며 나는 재빨리 그늘로 들어섰다.
“어우, 목이 다 뜨겁네.”
한여름의 열기를 피해 벤치에 털썩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손 부채질을 하고 있자니 문득 옆에서 기계적인 바람이 불었다.
위이잉─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작은 손풍기를 든 한세연이 내게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덥지?”
“오, 고마워. 덕분에 살 것 같다.”
살짝 감동을 받은 내가 과장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하자 한세연이 픽 웃었다.
쉬지 않고 떠들던 데오릭은 말을 들어줄 상대가 사라지자 입을 삐죽 내밀곤 홀로 부채질을 했다.
“다들 하나씩 마셔.”
한편에서 가방을 뒤적이던 은가예가 얼려온 물을 꺼내서 하나씩 나눠줬다.
“땡큐.”
“키야- 살 것 같네.”
우리가 얼음물을 마시며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빠앙- 빠앙- 경적이 울렸다.
“다들 타세요!”
리무진의 조수석 창가로 고개를 내민 아멜리아가 소리쳤다.
“···데려갈 사람 하난 진짜 잘 뽑았네.”
냉기의 룬어가 차체 전반에 걸쳐 로고처럼 들어가 있는 걸 본 내가 혀를 내둘렀다.
***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린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강남 워프존에서 우리는 워프게이트를 통해 곧장 해남에 도착했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오! 강 아저씨가 왔어?”
“하하! 가예아가씨가 온다는데 당연히 제가 나와야지요. 다른 놈들에게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은가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중년인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가예아가씨의 동기분들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은가장의 집사인 강진혁이라 합니다.”
우리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눈을 맞춰가며 강진혁이 인사를 했다.
“아가씨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신신당부를 해대는 모습에 우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만해, 좀!”
은가예가 그런 강진혁의 주책에 질색을 하며 말려댔다.
“아오, 다들 미안. 강아저씨가 좀 주책맞아보일 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외지에 나가는 거라 걱정되셔서 그래.”
“아니야, 괜찮아. 충분히 이해되니까.”
내가 고개를 저었다. 척 봐도 강진혁은 은가예를 어려서부터 돌봐오던 사람 같았으니까.
딸 같은 아이가 처음으로 외지에 나가서 동기생들을 데리고 돌아왔으니 당부를 하는 거야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오히려 은가예를 대하는 강진혁의 마음이 진심임이 느껴져서 좋기만 했다.
“다들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럼 가자.”
이내, 게이트존 밖에서 기다리던 강진혁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해남은가로 향했다.
***
해남은가의 영역은 대단히 넓었다.
게이트를 나와서 얼마 가지 않아 펼쳐진 녹색의 대지가 모두 은가의 영역이었으니.
“이야, 여기 영맥이라더니 진짜 마력이 엄청 짙긴 하네.”
은가의 영역에 분포된 마력의 농도에 데오릭이 나직한 감탄을 터트렸다.
아카데미보다야 현저히 농도가 낮다지만, 은가의 영맥은 여타의 지역보다 훨씬 마력이 짙은 공간이었다.
“어디 휴양지라도 온 거 같네.”
고즈넉하고, 정취가 좋은 게 쉬어가기엔 딱인 곳이었다. 반대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게 따분하고 놀 것이 없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해남은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들판을 지나쳐 도착한 은가의 저택은 근현대가 어우러진 대저택이었다. 지어진 지 꽤 오래됐지만 낡았다기보단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저택의 로비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무리와 맞닥뜨렸다.
“흥, 너희도 왔구나.”
은가예를 보며 콧숨을 쉬는 생도는 은소백이었다. 학년대항전에서 은가예에게 된통 깨진 2학년 생도.
요 몇 달 잠잠하더니 그새 또 자존심이 회복되신 모양이다.
은소백의 뒤에 있는 건 영국의 유망주, 유스칼 아르세이였다.
“너도 해신의 진주가 풍기는 마력파장을 분석하러 왔나 구나.”
“아, 예. 뭐, 구경온 건 맞죠.”
유스칼이 호감을 보이며 내민 손을 내가 어색하게 마주 잡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인간은 내가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내일 연회장에서 보죠.”
“쩝, 그래. 내일 보자고.”
내버려 두었다간 마력에 대한 토론이라도 하려는 분위기에 내가 먼저 말을 끊자, 유스칼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2학년 생도들과의 짤막한 만남을 가진 우리는 강진혁에게 각자 개인 방을 배정받았다.
“다들, 좀 쉬다가 밥 먹을 때 보자.”
은가예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우리가 방을 배정받자 어딘가로 급히 사라졌다.
‘가주를 보러 가나 보네.’
양아버지가 쓰러졌다니, 한시라도 빨리 상세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터였다.
“그럼 우리도 식사 때 볼까요?”
아멜리아의 말에 우리도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데오릭과 일레인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나머지 두 사람을 다시 데리고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다시 불려 나온 아멜리아와 한세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둘 다 이거 받아.”
나는 두 사람에게 ‘노턴의 반지’를 나눠주었다.
“이게 뭔데요?”
“보험.”
“···보험이요?”
“응.”
나는 두 사람에게 내일 해신연에서 있을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는 말고, 마인들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안 거예요?”
“그 반지를 가지고 있던 마인한테.”
내가 블랙마켓 1층에서 반지를 얻었다고 이야기하자, 아멜리아는 충분치는 않으나 어느 정도 받아들인 표정이 되었다.
질서가 어지러운 블랙마켓의 1층, 다운타운에서는 마인들도 종종 나타나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 반지가 마인의 공격에 보호 작용을 한다는 이야기네요.”
“마력을 불어넣으면 하루 동안 발동하니까 지금 사용하지는 말고.”
아멜리아는 마인의 습격이 있을 가능성은 낮다 판단하면서도 대비는 해두는 편이 좋다 생각했는지, 반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저희 둘한테 주는 거예요?”
은가예나, 일레인, 데오릭도 있는데 왜 자신들이냐는 의미를 담아 아멜리아가 나를 쳐다보았다.
“걔네는 안 돼. 특히 은가예는 줘봤자 오히려 싸운다고 덤벼들걸? 차라리 기절하면 데리고 나가는 게 나아.”
“확실히 그럴 것 같네요.”
두 사람 다 내 말에 동의했다.
가문의 보물인 해신의 진주를 약탈하러 온 마인들을 등지고 은가예가 도망갈 리 없었으니까.
그 밖에, 일레인이나 데오릭은 상성이나, 실력 때문에 반지를 주지 않았다.
일레인은 저주를 거는 데에는 도가 텄으나, 본인의 교전능력 자체는 그리 탁월한 편이 아니었다. 데오릭 또한 교전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고.
‘나머지 반지 하나는 서하린한테 줬으니 알아서 하겠지.’
내가 노턴을 대비해 준비한 패가 바로 서하린이었다.
그러니, 서하린이 노턴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반지를 가지고 있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반지를 넘긴 나는 아멜리아를 먼저 들여보내고, 혼자 남은 한세연에게 따로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연회장 외에도 한세연은 따로 해줘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초인’이 아닌, 오직 한세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지 분배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가주를 치료하는 일뿐이었다.
나는 1층 로비를 나와 은가예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
“···후우.”
은가의 가주, 은호성의 처소에서 나온 은가예는 울적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본 은호성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불과 세 달 전까지만 해도 근육질의 날렵한 몸을 지니고 있던 은호성은 삐쩍 말라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 마치 딴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은가는 축제의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가문의 회랑에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가주가 쓰러졌는데 그 사실까지 비밀로하면서 해신연을 열어야 하는가에 대해, 은가예는 분노가 치밀었다.
“하아, 좆같네.”
그깟, 가문의 명성 좀 깎이면 어떻다고······
은가예가 회랑의 기둥을 퍽퍽 차대며, 화를 삭이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네.”
“···뭐야, 쉬고 있으라니까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회랑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이해솔을 본 은가예가 다급히 침울한 표정을 수습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였다.
“다 봤는데, 이제와서 표정 숨긴다고 뭐가 되냐?”
“아오, 좀 모른 척 넘어가면 안 돼?”
“다른 때라면 그러겠는데, 이번엔 안 되겠다.”
“그게 뭔······”
은가예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으려던 때였다.
“너희 아버지, 내가 치료할 수 있거든.”
말을 끊으며 들려온 이해솔의 말에 은가예의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
“내가 치료할 수 있다고.”
말과 함께 이해솔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신성스러워 보이는 새하얀 나뭇가지였다.
***
내가 보인 것이 세계수의 가지라는 말에 은가예는 흠칫 놀랐다가, 불신어린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로 아빠를 정말 치료할 수 있다고?”
“잠깐만 시간을 벌어주면 가능해.”
나는 은호성의 처소를 바라보았다. 앞에 지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수시로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내가 기척을 차단하고 들어간다고 해도, 은호성의 처소에 누군가 들어선다면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은호성을 치료하는 것도 무리였다.
고작 은가예의 동기생에 불과한 내가, 확실치도 않은 세계수의 가지를 들고 가주를 치료하겠다는데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조금이라도 신뢰하는 은가예를 믿어보는 수밖에.
과연 은가예는 바로 승낙했다. 그리곤 이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안에 주치의가 있어.”
“뭐, 잠깐 기절시켜야지.”
“그, 그러면 되겠네.”
내 막무가내식 발언에 입을 멍하니 벌렸던 은가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최선의 수였으니까.
“그런데 시간은 어떻게 벌게?”
“받아.”
“?”
“목소리의 형태야. 목소리를 채취하는 마도구.”
“아, 그 보이스피싱······!”
꽤나 유명한 마도구였는지, 은가예는 바로 알아보았다.
“이걸로 주치의 목소리를 흉내내자는 거구나.”
은가예가 나를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준비하고 왔을 줄은 몰랐다는 듯.
솔직히 나 또한 여기서 이 마도구를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혹시 쓸모가 있을 지도 몰라 챙겨왔는데,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었다.
“가자.”
“엇.”
은가예의 손을 덥썩 잡은 내가 <기척차단>Lv.2를 일으켰다.
“이, 이게 뭐야?”
순간, 놀란 은가예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의 기척 또한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을 느낀 것이다.
“말하지 마. 말하면 풀리니까.”
“아, 알았어.”
그렇게 우리 둘은, 지금도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회랑을 소리소문 없이 지나쳐 가주의 처소로 들어섰다.
“음? 왜 다시 들어오는 거냐?”
문이 열리는 것을 본 주치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퍼억!
기력에 턱을 얻어맞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잽싸게 달려간 은가예가 기절한 주치의를 소리가 나지 않게끔 옆에 눕혀놓았다.
“누가 오려하면 들어오지 말라 해. 10분이면 되니까.”
“알았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은가예가 방문 앞에 섰다.
이를 확인한 나는 병상에 누워있는 은호성을 돌아보았다.
‘허, 완전 다 빨렸나보네.’
아마의 씨앗에 마력을 계속 빼앗기고 있는지, 은호성의 몸은 삐쩍 말라있었다.
도저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대 검호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앙상한 외양.
과연, 이 사람을 깨운다고 도움이 되기는 할까 살짝 불안했지만, 그래도 일단 온 김에 깨우기는 해야 했기에 나는 세계수의 가지를 은호성의 가슴부위에 올려놓았다.
우웅···.
그러자 하얀빛을 내뿜기 시작하는 가지. 이내 은호성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흘러나와 세계수의 가지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