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꿀빱니다-72화 (73/226)

§ 72화

정령은 저마다의 ‘본질’이 담긴 진명(眞名)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닌, 정령을 존속시키는 힘이자, 이지를 깨우는 언령이었다.

【아나스타샤】

버서커의 진명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아아···

순간, 버서커의 비명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녀석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고개가 내 쪽으로 향한다.

진명을 불린 녀석의 이지가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무척이나 불안정하고,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 조각에 불과했다.

녀석이 미쳐버린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정신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테니까.

스윽.

내 손이 아나스타샤에게 뻗어졌다. 그 손을 녀석은 거부하지 않았다.

검게 물든 아나스타샤의 몸 안으로 내가 손을 집어넣었다.

저항감 없이 들어간 내 손이 녀석의 가슴에 박힌 ‘해신의 진주’를 붙잡았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뽑아버렸다.

순간, 아나스타샤의 몸이 크게 일렁였다.

마력의 원천이 사라지자 녀석에게 깃들었던 방대한 마력이 일거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화아아아······!

푸른 기류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와 함께 검게 물들었던 아나스타샤의 몸이 차츰 빛을 되찾아갔다.

[타락한 정령, 버서커의 이지를 깨웠습니다.]

[놀라운 업적에 전체적인 능력이 대폭적으로 증가합니다!]

띠링! 띠링! 띠링!

무수한 알림창이 상태창을 가득 메워 갔다.

전체적인 능력들의 레벨이 족히 1~2씩은 상승하는 어마어마한 경험치였다.

“정말 해냈군.”

어느새 다가온 은호성이 정화되어가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놀람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게, 폭주한 정령을 되돌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바가 없던 것이다.

지금의 이 같은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은호성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고맙네, 자네가 은가를 구했어.”

“가주님이 잘 붙잡아주셔서 해낸 겁니다.”

“하하, 겸손하군.”

사실 은호성이 폭주한 버서커를 상대로 버틴 데에는 내가 넘겨준 ‘푸른 단약’을 복용한 영향도 있었다.

평시보다 강화된 마력을 바탕으로 버서커를 상대로 더욱 오래 시간을 끌 수 있던 것이다.

이터니티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수준의 비약이었으니, 은호성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연 나를 바라보는 은호성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물론 저런다고 알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령의 진명은 이터니티의 게임에서 얻은 정보였고, 푸른 단약 또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비약이었으니.

─와아아!

뒤늦게 정령의 폭주가 멈추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에게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반면 내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크루트들을 막는데 한세연을 혼자 보내놓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본래라면 이곳만 해결되면 금방 합류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심지어 아직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포화된 마력을 모두 뱉어내야 녀석에게 달라붙은 마기를 제거해주니까. 하는 김에 계약도 좀 하고···

이를 다 끝내기까지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뭐, 괜찮기야 하겠지만···’

반마력체 크루트를 상대로 한세연이 상성상 우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보는 게 아니다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한세연이 모르도를 어느 정도로 다룰 수 있는지는 솔직히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몰랐으니 말이다. 일상에서 쓰는 걸 볼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다만 일전에 폭주 한 것을 생각하자면 그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을 거라 추측할 뿐이었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은가에서 얼마 떨어진 야산을 바라보며 내가 미간을 좁혔다.

***

한편, 그 시각 야산은 크루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저럴 수가!”

크루트 무리를 이끌던 중격 마인, 유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크루트가 무엇이던가?

마인협회에서 마수를 개조하고 또 개조해 더욱 강화된 형태로 재탄생시킨 생명체가 바로 크루트였다.

유혁은 이 크루트 무리를 이끌고 그동안 수많은 초인들을 죽여왔다.

그중에는 마수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프로들도 있었고, 유혁 자신보다 훨씬 강한 초인 또한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에게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크루트에게 잡아먹혔다.

세상 누가 오더라도 도륙 내 죽일 수 있는 살인병기 크루트!

그런 크루트가 무려 50마리씩이나 있었다.

제아무리 강한 자라도 홀로 이 많은 크루트를 모두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불가능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결과는 끔찍했다.

퍼억!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 한 번에 머리가 터진 크루트가 피와 뇌수를 뿌리며 쓰러지고.

뿌드득! 콰득!

“끄아아악!”

어둠에 붙들린 마인이 착즙기에 짓이겨진 열매처럼 구겨진다.

촤아아아─.

찢어진 근육 사이로 허연 뼈가 보이고, 피가 폭포수처럼 흐른다.

하지만, 이를 자행하는 여자에게선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마치 생명체가 아니라, 쓰레기를 치우는 것처럼······

부르르!

유혁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건 뭐지? 단순한 마기가 아니야.’

여자에게서 어둠이 흘러나온다.

그 어둠에.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수십에 달하던 마인과 마수들은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 해본 채 짓이겨지고 찢겨 나갔다.

“우욱!”

“우엑!”

겁을 집어먹은 크루트들이 명령에 불복하고, 마인들이 토악질을 해댔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놈도 보였다.

하지만 여자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산책을 하듯 느긋하게 걸어왔다.

걸음을 따라 어둠이 땅거미처럼 번지며 지면의 모든 것들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다.

그렇게 사라지면 이어서 짐승이 고기를 씹듯, 우적거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귓가를 울린다.

“이런 미친······”

유혁의 얼굴이 공포에 휩싸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

닿으면 죽고, 닿지 않아도 잡혀 죽는다!

유혁이 떨리는 눈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건 인간이 아니었다.

저런 게 인간일 리 없었다.

“괴물 같은 년······”

중얼거린 유혁이 주먹을 제 가슴에 박아넣었다. 입가에서 피가 튀고 흰자위가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드득! 우득!

뼈와 살이 뒤틀리며, 유혁의 몸이 기괴하게 부풀었다.

몸집이 세 배가량 커지며, 하반신과 머리가 ‘말’의 것으로 바뀐다.

그가 계약한 마족, 오로바스에게 몸을 바친 결과였다.

“크르르···, 씹어 먹어주마, 괴물 같은 년!”

중격마인이던 유혁이 오로바스에게 몸을 바쳤다. 현재 그의 신체 능력은 상격 초인조차 능가했다.

전신에서 힘이 미쳐 날뛰었다. 이 정도라면, 저 괴물이 상대라도 질 수 없다.

유혁의 무릎이 굽혀지고, 짐승의 다리근육이 풍선처럼 부푼다.

뻐어엉─!

지면을 박찬 유혁의 몸이 순식간에 한세연의 앞에 나타났다.

짐승의 아가리가 쩌억- 벌어진다.

유혁은 이대로 한세연을 집어삼켜 씹어먹을 작정이었다.

콰득!

유혁의 강철같은 이빨이 한세연을 노리고 번개처럼 닫혀졌다. 하지만, 그 이빨은, 터럭만큼의 거리를 남겨두고 빗나갔다.

‘뭐지?’

유혁은 순간 어떻게 된 건 줄 몰라 당황했다.

왜 시야가 도는 거지?

어째서 내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거지?

목 부위에서 찢겨 나간 괴물의 몸이 보였다.

아니··· 저건 자신의 몸이었다.

어둠이 시야를 가려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목 부위가 찢겨 나간 유혁의 머리가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

“······.”

땅거미처럼 퍼졌던 어둠이 한세연의 발밑으로 스르륵 흡수되었다.

그러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녀의 주위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굴러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이질적일 뿐.

해남은가를 바라보던 그녀가 빙긋 웃었다.

“해솔이는 참 대단하네.”

어느덧, 은가에 나타나 있던 불길한 기운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누가 처리한 지야, 보나 마나였다.

‘기다릴까?’

금방 온다고 했으니 이곳에서 기다리면 해솔이와 단 둘이서 돌아갈 수 있었다.

미소를 짓던 한세연은 이내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야산의 어딘가로 돌아갔다.

이윽고,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가 우거진 나무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게오르그는 나태하지만,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마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분신이 당했을 때를 대비해 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마인들을 항시 배치시켜 놓는다. 김도경 또한 그런 게오르그의 첩보원 중 하나였다.

김도경은 반경 3km 이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그가 계약한 마족, 아이울의 능력, 【악마의 눈】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나, 김도경은 이번 해남은가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눈에 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아들인 정보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이럴 수가.”

노턴이 게오르그를 배신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설 수 없는 봉마진 안에 느닷없이 나타난 여명의 수호자 1팀장에게 목이 잘렸다.

해신의 진주를 흡수한 타락한 정령은 병상에 쓰러져 있어야 할 은호성에게 저지당했고, 어떤 남자에 의해 이지를 되찾았다.

정보를 조합하는 일을 하는 김도경은 이 편린들만으로도 금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군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게오르그가 해신의 진주를 노릴 것이란 것도. 노턴이 게오르그를 배신할 것이란 것도 미리 다 알려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당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손에 다 놀아난 것이다!

‘누구냐.’

김도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취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해남은가?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원성을 사면 샀지,이득을 취하지는 못한다.

여명의 수호자? 그쪽도 아니다.

여명의 수호자가 조직적으로 움직였으면 모를 리 없었으니까.

서하린은 단독적으로 움직였다.

과거의 복수를 위해.

‘배후는 서하린인가?’

노턴을 잡아 은가에게 빚을 지워 놓으려고?

아니야. 김도경은 고개를 저었다.

서하린은 그런 성격이 못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걸고 베팅을 할 정도로 그녀는 독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문득, 그의 뇌리로 정령의 이지를 되살린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 이득을 취한 자는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은가에게 빚을 지움은 물론이고, 분란을 잠재웠다는 명성, 어쩌면 정령까지도.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수도 있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그 한사람밖에 없었다.

“이해솔.”

‘더 월드’의 헤드라인에 실렸던 인물이기에, 정보를 다루는 김도경은 이해솔의 얼굴을 금방 기억해냈다.

“일단, 이건 모두 알려야겠어.”

“누구한테 알리시겠다는 걸까요?”

“그야, 게오······”

말을 하던 김도경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우거진 숲 앞.

한 여자가 방긋 웃고 있었다.

‘···언제?’

김도경은 심장이 철렁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여자가 다가올 동안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하지만 놀란 마음과 달리 그의 표정만큼은 차분했다.

“그야 당연히 본가에 보고를 할 정보입니다.”

“본가요?”

“은검대의 척후조원, 은혁준입니다.”

“흐음, 은검대에는 마인도 있나보죠?”

“!”

표정을 숨기지 못한 김도경의 눈이 흔들렸다. 이내 그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인이라니요, 저는 은가의 사람입니다. 의심이 가시면 제 마력을 확인해봐도 좋습니다.”

김도경이 소매를 걷은 팔을 내밀었다. 마력을 확인해 보라는 듯이.

그는 마기를 감쪽같이 숨기고 있기에 당당했다. 그리고.

‘확인하러 오면 죽인다.’

어차피 지금은 달아나야 할 때였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저벅저벅.

마력을 확인하려는지, 여자가 김도경에게 다가왔다.

다섯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만 더 와라.’

김도경의 손에 은밀한 마기가 맺혀갔다. 그때, 공격 범위의 바로 앞에서 돌연 여자가 걸음을 뚝 멈췄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오시기 전에 사람을 죽이고 오셨던데요?”

“···뭐?”

김도경의 눈이 흔들리자, 여자, 한세연이 방긋 웃었다.

“피 냄새가 나거든요. 지나 올 때 쓰러져있던 분의.”

한세연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김도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소매에 좀 전에 죽이고 온 은검대원의 피가 묻어 있던 것이다.

“···음?”

그때, 소맷자락을 내려다보던 김도경이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닥이······

새까맸다.

마치 검은 도화지처럼.

‘이건······’

김도경이 왠지 모를 불길함에 미간을 좁히던 찰나였다.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으아악!”

그 단말마를 끝으로.

김도경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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