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꿀빱니다-73화 (74/226)

§ 73화

내 예상과 달리 아나스타샤가 포화된 마력을 모두 걸러내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검은 정령’이었던 녀석은 이제는 완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녀석의 몸에는 검은 마기가 얼룩처럼 물들어 있었다.

저것이 해신의 진주와 어우러져서 멀쩡했던 녀석을 미쳐버리게 만든 것이다.

“쯧.”

눈살을 찌푸린 내가 아나스타샤의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항마력이 일어나며 녀석의 몸에 번진 마기의 얼룩을 말끔히 지워냈다.

─······.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정령, ‘아나스타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찾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

뭐 하는 것인가 의아해하는데 상태창 알림이 떠올랐다.

[정령, 아나스타샤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오.”

그렇지 않아도 계약을 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구나. 알아서 계약을 해준다니 기꺼운 마음이 된 내가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계약하자. 그런데 왜 그렇게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는 거니?

‘아, 계약진이 없어서인가?’

픽 웃은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계약진 하나는 내가 또 기가막히게 잘 그리지.’

이래보여도 모르도와 한세연의 계약을 성사시켰던 몸이다.

나는 정원의 공터를 찾아 계약진을 그리려다, 주변의 시선이 쏠린 것을 확인하곤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이리와.”

귀엽게도 내 손짓대로 따라오는 아나스타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은호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어디 가는 건가?”

“얘 돌려보내 주려고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다시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어요.”

“호오, 나도 같이 가서 구경해도 되겠는가?”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정령은 주변에 보는 눈이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해신의 진주를 뽑았는데 아나스타샤의 상태가 다시 나빠질 일은 절대 없었고, 보는 눈이 많다고 정령이 스트레스를 받는지도 나는 모른다. 내가 정령 전문가도 아니고 그런 세세한 설정까지 알 리가 있나.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댔을 뿐이다.

“그런가? 그거 아쉽군.”

내 능수능란한 둘러댐에 입맛을 다신 은호성이 물러났다.

은호성의 도움을 받은 나는 정령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조용한 후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후원의 마당에 계약진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가 쳐다보자니 알림창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나스타샤가 당신에게서 마력을 조금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따라서 계약의 이행이 불가합니다.]

계약진을 그리던 내 나뭇가지가 파직 부러져 나갔다.

“시발.”

이것도 안 된다고?

내 기대감 돌려 내. 쓰레기 상태창아.

귀여운 정령 키우는 소소한 힐링라이프를 즐기고 싶었단 말이다.

“후.”

박살난 꿈에 내가 할 말을 잃고 있을 때였다. 새로운 알람이 떠올랐다.

===

기프트 : 【어느 필멸자의 고민】

▶융합 신수

+ 불사조

===

“아, 이거······”

실의에 빠졌던 내 눈이 반짝였다.

하도 보질 않아 잊고 있었다. 파랑이를 얻은 게 계약으로 인한 게 아닌 ‘융합’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융합은 계약의 상위개념이다.

문자 그대로 소환수와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파랑이와 체질을 공유했기에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한 상처 정도는 내버려둬도 금새 나아버린다.

심지어 파랑이가 어디에 날아가 있건 불러들일 수 있으며 기척 또한 감지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이 감각의 공유는 한계가 확실해서 위치정도만 느껴지지, 오감까지 공유하는 기상천외한 능력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다.

‘못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뭐, 그거야 나중에 차차 확인해 보기로 하고······

아무튼 이 융합신수란이 떴다는 것은 아나스타샤 역시 내 신수란에 수용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말이 정령이지, 정령계의 존재는 아니라서 인가?’

정령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정령계 태생과 자연계 태생으로.

정령계 태생은 말 그대로 아예 다른 차원인 ‘정령계’의 존재고, 자연계 태생이란 인간세상에서 마력이 모여 우연히 탄생한 자연적인 존재를 말한다.

신화에 나오는 호수의 신이라던지, 바다의 신 같은 녀석들은 대부분 이 자연계 정령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역시 해남은가의 영맥에서 탄생한 존재였다.

해신의 진주가 빚어낸 자식.

[융합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 신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운이 좋네.”

예상치 못한 융합의 기회에 내가 웃음을 지었다.

자연계 정령은 마주치는 것조차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드물기 드문 존재였다. 그런 존재와 융합이라니? 이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물론, 아나스타샤의 의사는 존중할 생각이었다. 나야 좋지만, 융합은 정령에게 있어서 꽤나 큰 중대사였으니까.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보아하니 아나스타샤는 아주 간단한 제스처만 이해하는 듯했다.

“대화가 안 통하면 물어보지도 못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나스타샤와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손짓을 해댔지만, 아나스타샤는 멀뚱히 고개만 갸웃거렸다.

“······음.”

내가 감조차 잡히지 않는 문제에 난감한 표정으로 아나스타샤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파앗!

돌연 아나스타샤가 눈부시게 발광했다.

“웃!”

느닷없이 몰아닥친 빛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나스타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뭐야? 아나스타샤?”

갑자기 사라진 아나스타샤의 모습에 당황한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알림창이 갱신되었다.

띠링!

===

+ 불사조

+ 아나스타샤

===

“오!”

신수 란에 아나스타샤가 추가된 걸 확인한 내가 입을 벌렸다.

불현듯 느껴지는 가슴의 화끈거림에 옷 속을 들여다보니 왼쪽 가슴에 새로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파랑이의 불사조 그림 문양과 달리 하얀색의 기호였다.

『ᛊ』

빛을 상징하는 룬 문자, 시겔(Sigel)이다.

“···이러다 몸이 그림판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쓸데없는 걱정에 고개를 저으며 새로 갱신된 ‘아나스타샤’란을 열어보았다.

===

▶아나스타샤 Lv.1

─빛의 자연계 정령

*빛을 이용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가령, 상대의 시야에 착란을 일으키거나, 플레이어의 시야가 밝아질 수도 있다.

===

빛을 이용한 다양한 일이라니. 포괄적이지만 소박한 설명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 맛이지.”

파랑이처럼 처음부터 전설의 신수인 것도 좋지만, 이런 소박함도 나름 좋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키워나가며 그 강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름 뿌듯하다고나 할까.

이런 소소한 재미 때문에 게임을 할 때는 일부러 하급 정령을 계약해서 상급까지 키워보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플레이어의 시야가 밝아진다는 문구 때문인가? 이상하게 눈이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진짜 좋아졌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 심어진 나무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마당의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또렷이 눈에 담겼다.

신경 쓰지 않는데도, 내 소매에 내려앉은 먼지까지 보여왔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두운 던전에 들어서더라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을 듯했다.

파랑이가 내게 재생력을 주었듯이, 아나스타샤는 밝은 시야를 선물해준 것이다.

소환계약으론 얻을 수 없는, 오직 융합자만이 가지는 체질의 공유였다.

“휴, 다행히 늦진 않겠네.”

시계를 바라본 나는 내심 안도했다. 아나스타샤를 얻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

이 정도라면 한세연이 있는 야산까지 뛰어가더라도 내가 예상한 시간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렇지, 한세연은 모르도의 계약자다.

그와 같은 군주급 마수의 능력이라면, 그 일부만 다룰 줄 알더라도 충분히 크루트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을 것이었다.

‘혼자 정리하길 바라는 건 오바겠지?’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일전의 폭주로 보아 한세연은 모르도를 다루는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아 보였다.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근거에는 ‘의지력’이 약할수록 소환수와의 ‘동화율’이 떨어져서 그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다는 이터니티의 법칙 탓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계약을 하고도 소환수의 능력을 일부조차 끌어내지 못하는 소환사들도 있는 게 바로 이터니티였으니까.

영혼의 색이 옅은 한세연이라면 더더욱 다루는데 힘이 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일전에 폭주까지 가버린 것이었을 테고.

반대로 ‘동화율’이 미치도록 높은 경우에도 폭주를 한다곤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동화율로 인해 폭주한 경우는 이터니티 역사상에서도 손에 꼽는다고 하니까.

아무튼, 빨리 가봐야 겠다. 괜히 저번처럼 폭주라도 했다간 골치가 아팠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장 후원을 벗어나 야산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나는 금방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해남은가의 후문. 야산으로 향하는 어귀에 한세연이 서 있었다.

‘뭐야, 벌써 끝났다고?’

눈을 깜빡이던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한세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다행이다. 길이 엇갈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거든.”

“너 벌써 끝냈어?”

“응,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

“그래?”

너무도 멀쩡한 한세연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마력체 크루트가 마력 외의 기운에 쥐약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상성 차가 컸었나?

‘하긴, 모르도라면 순수마기니 그럴 수도 있으려나.’

불순물이 내포되지 않은 기운일수록 더욱 강한 법이었다. 반마력체 크루트에게라면 더욱 잘 통하겠지.

괜히 설레발쳤다는 사실에 힘이 빠진 내가 자리에 멈춰 섰다.

“가자.”

“응.”

그것도 모르고 빙긋 웃은 한세연이 내 옆에 따라붙었다.

***

해신의 진주를 노린 마인들의 습격사건은 금방 정리되었다.

마인들의 목적이 귀빈들이 아닌 해신의 진주였던 탓에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물론, 그 와중에 일을 꾸몄던 게오르그와 노턴, 그리고 정원에 나타났던 버서커가 나와 서하린의 손에 정리되었기에 우리 둘은 순식간에 은가장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실상 내가 한 거라곤, 은호성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가서 아나스타샤의 이름만 불러준 게 다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덕에 나와 일행은 대접이라는 명목으로 은가장에 하루 더 묵어가는 것으로 되었다.

당장 내일이 수업이 시작되는 월요일이라 가야되는 걸, 은호성이 직접 아카데미에 전화까지 걸어 수업을 패스시켜준 것이다.

물론 은가장의 분위기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해신연을 성공적으로 치루지 못한데다, 희생자도 적지만 나온 것이다.

‘혈족’으로 묶인 해남은가이기에 희생자란 그 의미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식솔이기 이전에, 피로 묶인 가족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따로 대접하는 걸 이해해주게.”

“저야 대접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른 늦은 밤. 나는 은호성의 처소에서 단둘이 마주하고 있었다.

실상 은호성은 서하린까지 부르고 싶어했으나, 그녀는 전날 바로 해남은가를 떠났다.

‘제 스승같던 사람을 죽였으니. 기분이 좋지 못하겠지.’

마인인 노턴이었으나 서하린에게는 그 의미가 큰 인물이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은호성과 단둘이 마주하게 된 게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단 둘뿐인 대작.

“하하, 가예가 마력석을 각성제라고 먹는단 말인가?”

“예, 참 신기하더라고요. 혹시 은가의 식단이 좀 특색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우리도 지극히 정상적인 식단을 먹네.”

은호성은 은가예의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솔직담백하게 모두 대답해주었다.

물론, 각성제를 먹는 거야 은가예가 비밀로 해달라고 싹싹 빌기까지 헀으나, 은호성은 그 사실을 이미 알면서 모른체를 해주고 있는 거였다.

때문에 은가예가 마력석을 각성제라고 빡빡 우기면서 먹어댄다는 사실도 말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찰나, 은호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군.”

“예,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건 있습니다.”

“말해보게, 은가를 구해준 영웅인데, 대답을 해줘야지.”

나는 표정을 바로하곤 물었다.

“가령 이번에 쳐들어왔던 살 찐 돼지에 대해서 좀 듣고 싶네요.”

“호오, 내가 알고 있을 거라 보는 건가?”

‘살 찐 돼지’가 게오르그를 지칭하는 것이란 걸 알아차린 은호성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군. 해솔군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은호성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

한편, 그 시각 해남은가의 별관 지하 1층 죄수동.

그곳에는 이번에 사로잡힌 마인들이 다수 수감되어 있었다.

은가 침공에 가담했다가 생포된 마인인 ‘유종혁’ 또한 이 죄수동의 개인실에 수감되어 있었다.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벽에 기대 멍하니 창살만 바라보던 유종혁이 돌연 눈을 크게 떴다.

털썩.

옥을 지키던 간수가 갑자기 옆으로 허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가 치솟듯 횃불이 밝히는 땅에서 스스스스- 어둠이 일어났다.

일어난 어둠은 이윽고, 한 여자의 형상을 이루었다.

“무, 무슨······”

당황한 유종혁이 눈을 부릅뜨는데, 여자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어왔다.

“유종혁, 맞나요?”

“마, 맞다!”

자신을 꺼내주러 온 것이라 생각한 유종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

유종혁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검은 어둠이 덮쳐왔다.

그게 유종혁이 본 마지막이었다.

콰드득!

작은 파육음이 들리고, 깔끔하게 비워진 감옥. 그곳에는 유종혁이 존재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유종혁.

그는 은가침공이 있기 전 마인들의 회합에서 이해솔이 변장한 마인이었다.

그 변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한세연은 알고 있었다.

이해솔은 단순히 어떠한 능력을 이용해 기억을 지우는 선에서 그친 듯했지만, 한세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런 건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나중에 뒤탈이 없는 법이었으니까.

“해솔이는 마음씨가 너무 착하다니까.”

골아 떨어진 간수를 내려다보던 한세연이 어둠이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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