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이터니티의 방어기제는 생도 수준에서 뚫어낼 수 없다.
마인을 적으로 상정하고 만든 방어기제가 생도한테 뚫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맞겠지?’
스가악!
수준을 떠나, 모든 이형(異形)을 베어버린다는 천우진의 기프트, ‘검성’은 방어기제 안으로 검 끝을 들이밀었다.
그 검 끝에 걸린 모니터 테이블이 반절이나 베여 나갔다.
살 떨리는 광경이었으나, 다행히도 검만이 슬쩍 들어왔을 뿐, 천우진이 방어기제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내 승리는 확고하다.
그렇게 ‘5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수업 종료. 승리는 마인 팀입니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마인팀의 승리를 선언했다.
방식이 다소 유연하긴 했으나 그런 사소한 것을 일일이 따지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닌 결과니까.
애초에 주연이라곤 니콜라이 하나만 툭 던져주고, 주인공과 그 파티들을 막으라고? 그거야말로 부조리의 극치다.
주인공이 이기라고 만들어놓은 지나가는 스토리에서 잠자코 희생양이 되어줄 수야 없지.
검을 거둔 천우진이 뒷목을 긁적였다.
“하하, 이거 한 방 먹었네. 역시 해솔이야.”
지고도 웃는 천우진의 모습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음에는 방어기제도 뚫을 수 있게끔 노력해야겠는 걸.”
그 주인공다운 발언에 우리반 치유담당인 김하윤은 아예 뿅이 간 표정이었고, 오진혁이나 킨델 등도 존경어린 눈빛을 보냈다.
오직, 은가예만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천우진을 해괴한 생물 바라보듯 쳐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노력은 노력이고, 이거 반칙이잖아.”
“아니야, 가예야.”
천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아닌데?”
그래, 뭐가 아니야? 나도 좀 알자. 궁금해서 천우진을 바라보니, 녀석이 나를 의미심장하게 돌아보았다.
“해솔아, 정말 놀랐어. 설마 이런 생각을 할 줄이야.”
“···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생각이냐고요.
아는 척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천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했어. 그리고 해솔이는 마인팀이지. 해솔이는 철저하게 수업의 본질을 파악하고 ‘마인의 사고방식’대로 움직인 거야. 그래서 보안기제를 건든 거지. 마인이라면 분명 자신의 마기를 이용해 보안기제를 건들였을 테니까.”
“뭐, 뭣?”
놀란 은가예가 입을 벌리자, 천우진이 나를 돌아보며 묘한 웃음을 짓는다.
“내 말이 맞지, 해솔아?”
“······어, 어.”
그런··· 거였나?
나도 몰랐던 내 진의를 깨닫게 된 내가 천우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얘, 진짜 천재인가?’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발상을···
얼핏 그럴싸한 말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수습한 내가 은가예를 돌아보았다.
“들었지?”
“뭐, 뭐를······”
여전히 당황한 은가예를 보며 내가 쯧쯧 혀를 찼다.
“져서 억울한 건 이해하겠지만, 마인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상했어야지. 이게 마냥 공격조 방어조하면 끝나는 단순한 수업인 줄 알아?”
······솔직히 나도 공격조 방어조 같은 단순한 수업인 줄 알았다. 저런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심오한 수업일 줄이야.
마찬가지 생각을 했던 은가예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천우진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아쉽지만 그런 거야, 가예야.”
그러곤, 어느새 방어기제가 걷힌 결계룸으로 다가와 내게 손을 내민다.
“해솔아, 우리가 졌다.”
“그래.”
노을이 져오는 수련의 관 4층.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천우진의 손을 맞잡으며 훈훈한 마무리가 연출되었다.
그런 우리를 생도들이 웃으며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교수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어디, 어디에요!”
“지금 여기 마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4층을 둘러보는 요원들.
정령학을 담당하는 윤선아 교수가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다들 다친 데는 없니?”
“···예, 없는데요. 그런데 교수님. 마인이라뇨?”
김하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되려 윤선아가 눈을 찡그렸다.
“마인이 나타났잖아, 너네, 못 봤니?”
“아, 그렇게 된 거네요.”
뒤늦게 이해한 김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거라니?”
“교수님, 마인은 없어요.”
“뭐? 분명 여기서 마기가 느껴졌는데?”
“그게 아니라······”
김하윤이 차분히 설명하는 걸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4층을 빠져나왔다.
***
3층으로 내려오자,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나 진흙무더기에서 작은 머리만 톡 튀어나와 울상을 짓고 있는 아멜리아였다.
“누가 이런 처참한 짓을······”
“흐끅, 당신이 그런 거잖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이제 막 4층에서 내려왔는데.”
내 <이기어검>의 레벨은 무려 ‘7’이다. 반경범위만 20m이기에, 4층에서 3층에 있는 비도를 조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시야의 부재쯤이야, 그람이 알아서 조종하는 것이기에 큰 문제도 되지 못했고.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아멜리아를 구속한 진흙은 내가 아닌 데오릭이 한 짓이다.
이를 알 리 없는 아멜리아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분명 비도였는데······”
“구해줄까?”
“빨리 꺼내주세요······ 흐끅.”
진흙탕과 인연이 없는 아멜리아는 얼굴이며 머리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일단 스마트폰부터 꺼냈다.
안쓰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여운 게, 이건 무조건 찍어야지.
“지금, 뭐 했어요?”
“아무것도.”
무소음 모드로 사진을 찍고 그것을 집어넣자니 아멜리아가 재촉했다.
“···그보다 빨리 도와주세요.”
“대신 조건이 있어.”
“뭐, 뭔데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조교들이 와서 꺼내줄 것이었으나, 공황에 빠진 아멜리아는 거기까지 생각할 경황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했다.
다만 이걸 꺼내주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겉에 둘러진 마법을 항마력으로 풀어야 하는데다, 이미 굳은 진흙을 일일이 걷어내야 했으니까.
그 과정에 나도 묻을 수가 있는데 공짜로 치워달라고?
절대 안 되지.
“저번에 단약 테스트했던 거, 계속해주면 꺼내줄게.”
일전에 푸른 단약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아멜리아를 데리고 테스트를 했으나 그 테스트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열화단약은 가장 기본적인 붉은 단약을 제외하고는 그 정확한 설명이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플레이어 전용이라 나를 제외한 사람이 복용하면 그 효과가 낮게 적용되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효력을 지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먹어보면서 구체적인 오차범위를 파악해야 했다.
여러 가지 단약을 함께 복용했을 때 상승작용이 있는지 여부와, 쪼개서 먹었을 때의 효력 차이도.
이런 건 미리 데이터를 수집해 놓는 편이 만약을 위해서라도 좋았다.
그리고 이 실험에는 아멜리아가 가장 적격이었다. 얘는 단약의 미세한 차이조차 느낄 정도로 마력에 민감한 체질이었으니까.
“그런데 단약에 부작용은 없는 거죠?”
“···없어.”
“방금 뜸 들이신 거 아니에요?”
“···기분 탓이겠지.”
한세울의 말에 따르면 ‘열화 단약’은 한 번 섭취한 상태에서 일정 시간 이내에 또 섭취하면 효과가 반감되거나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원래 그런 거기에 몸에 악영향이 가는 건 아니라고······
아무튼 푸른 단약은 주연을 돕자고 만드는 단약이지 나 좋자고 만드는 단약이 아니다. 신체 회복단약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풀어주지?
나가서 삽자루라도 가져와?
내가 진흙을 어찌 걷어낼 지 방법을 고민하는데, 의외로 그 문제는 깔끔히 해결되었다.
파파파파팡!
“꺄아아악! 어풉!”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한세연이 마력탄을 난사하자 진흙무더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 과정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멜리아가 비명을 지르고, 얼굴에도 진흙을 뒤집어 쓰는둥 난리가 났지만 뭐··· 맞지 않았으니 된 거 아닐까? 방식이 다소 쿨하긴 했지만.
“괜찮아?”
“히끅!”
엉덩방아를 찧은 아멜리아는 한세연의 위로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히끅히끅 딸꾹질을 해댔다.
뭐 때문인가 싶어 한세연을 돌아봤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다.
마력탄을 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는 3층에 어지러이 놓아두었던 그람의 단검을 주워 묶여져 있던 벌레들을 떼었다.
우연찮게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된 아멜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히끅, 거봐요. 당신이 한 거, 히끅, 맞잖아요.”
“데오릭이 한 짓이야.”
진흙 건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아닌 데오릭이 한 게 맞다. 그걸 돕는 거야 같은 팀이니 당연한 거다. 아니면 3층 뚫리게 놔두리?
문득 교복 안 주머니를 뒤지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아, 내가 먹었나.’
메론빵의 부재에 머리를 긁적이는데, 조교들이 올라왔다. 뒤이어 방송이 울렸다.
─수업 끝났다. 1반, 수련의 관 앞으로 집합!
***
하진우는 수련의 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스마트폰을 통해 모두 지켜보았다.
4층의 모니터룸은 그의 스마트폰과 연동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곤 했지만, 수업에서 어떤 미친놈이 보안시스템을 건들인단 말인가?
그 바람에 근처에 있던 교수들이 뛰어 올라가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으니, 하진우로서는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수련의 관 앞에 생도들이 집합하자마자 바로 이해솔을 보며 물었다.
“이해솔, 네가 말해봐라. 왜 보안시스템을 건들인 거냐.”
“마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호오, 마인의 입장?”
“예.”
기발한 발상의 전환에 하진우가 눈을 번뜩였다.
“마인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서 마력석을 지킬까 골몰하니 해답이 나오더군요.”
“음, 하지만 보안 시스템은···”
“설마 교수님이 공격조와 방어조같은 단순한 발상으로 수업을 짰을 리가 없다 판단했습니다.”
“···정확하군.”
하진우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수업에 저런 심도 깊은 의미 따위를 담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수업을 단순한 발상으로 짰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결국 하진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다들 잘 들었지? 이해솔 말대로다. 항상 마인의 입장에서 놈들이 어떻게 움질일 지 생각하는 자세를 가진 자야말로 진정한 일류 초인이라 할 수 있다.”
별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떤다 여기는지 머쓱해 하는 이해솔을 보며 하진우는 내심 놀랐다.
‘대단한 놈이군.’
본의는 아니었으나, 이런 단순한 수업에서조차 의미를 찾아내는 이해솔의 능력을 하진우는 높게 평가했다.
마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고를 견지하는 것이야 말로 대마인전에서 요구되는 필수능력 중에 하나였으니까. 하진우는 그걸 잊고 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리고 수업을 위해 보안기제조차 건드려 버리는 이해솔의 강단에 감탄했다.
니콜라이가 경악한 표정으로 떠듬거렸다.
“이해솔, 그, 그런 거였냐?”
“···어.”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 대단하군.”
생도들에게서도 찬사가 빗발쳤다.
“역시 해솔이야.”
“나는 전혀 생각도 못했어.”
“대단해..”
“······.”
이거, 맞는 거겠지?
“박수.”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아주 조금 양심이 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