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그런 건가.”
나는 상태창에 떠오른 「마흔의 시련」이란 문구와 이지를 잃은 일행, 그리고 내 멀쩡한 상태를 통해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 인지를 파악했다.
바위 언덕. 태양을 가리며 땅거미를 드리우는 거대한 검은 바위를 보았다.
스스스스······
눈으로 보일 정도로 유형화된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며 다가든다.
마치 유혹하듯, 꼬드기는 요악한 뱀처럼, 사탄의 속삭임처럼 말을 건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약속한다.
그리고 내 대답은.
“꺼져.”
화르륵─
오연히 일어난 푸른 불길이, 수마처럼 밀려드는 마기를 불태웠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사념의 속삭임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처럼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다만, 상급 부동의 각인이 새겨진 내 정신에 그것은 단순히 시끄러운 ‘노이즈’에 불과했다.
저벅저벅.
나는 태연히 바위의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검은 바위의 앞에 서자 머리를 맴돌던 잡음이 포말처럼 부수어져 내렸다.
[마흔의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1000SP가 지급됩니다.]
[칭호, ‘굴하지 않는 자’가 생성됩니다.]
띠링 띠링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보상이 수여되었다.
칭호 : 【굴하지 않는 자】
─당신은 마기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굴하지 않는 자는 당신에게 강철같은 의지와 영웅의 기개를······
나는 상태창을 뒤적여 ‘폐기란’을 열었다.
[폐기]
─주어진 능력을 버리는 대가로 상응하는 SP를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 [이상의 투영자]
+ [영혼의 선각자]
+ [신체 가속]
.
.
.
[【굴하지 않는 자】를 정말 폐기하시겠습니까?]
“어.”
[칭호, 【굴하지 않는 자】를 폐기하셨습니다. 1500SP가 상환됩니다.]
[보유 포인트 : 19400SP]
“600SP만 모으면 되겠네.”
이상의 투영자를 강화하려면, 2만SP가 필요했으니 조만간 강화가 가능할 듯했다.
이를 위해 굴하지 않는 자를 버려버린 이유는 너무도 당연했다.
정신을 강화해준다 알려진 칭호였고, 게임에서 나도 쏠쏠하게 써먹은 칭호이긴 했으나, ‘좋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치다.
상급 부동의 각인을 지닌 내게 굴하지 않는자는 그냥 상태창을 한 칸 차지할 뿐인 폐기물에 불과했다.
그런 폐기물을 버려서 1500SP를 벌었으니 나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폐기물을 버린 나는 균열이 간 검은 바위를 바라보았다.
‘마흔’.
이곳에는 어떠한 존재의 사념의 편린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고, 하물며 영멸의 마인의 것하고도 달랐다.
그보다 훨씬 깊고, 추악한 무언가였다.
“······.”
나는 움직임이 멎은 생도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사념이 보여주는 환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각자가 싫어하는, 혹은 마주치기 싫은 장면들을 끊임없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은가예는 공부라도 하는지 아악 우억- 등 각종 해괴한 비명을 남발하며 허둥대었으며, 아멜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곱씹으며 나도 할 수 있어요··· 왜 이런 기프트가··· 등 열등감에 기인한 발언들을 쉴새 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천우진은.
“여.”
“······.”
···괴물이냐?
멀쩡한 모습의 녀석이 기분 좋게 웃으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빠르다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내가 늦었네. 하하.”
“늦었다면서 왜 좋아하는 건데.”
변태냐?
“글쎄, 더 올라갈 계단이 있으면 막 의욕이 넘치고 두근거리지 않아?”
···변태 맞네.
좀 더 노력해야겠다며, 유쾌하게 웃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문득 천우진의 악몽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게, 게임에서 천우진을 플레이할 때는 악몽이란 게 나오지 않았었으니까.
그저 마흔에 다가가면 엔딩이 뜨면서 다음 분기로 넘어갔었다.
“무슨 악몽이었냐.”
“악몽?”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녀석이 말했다.
“그냥 마수를 베다 보니 눈이 떠졌어. 아, 그게 악몽이었구나.”
악몽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자각하는 녀석을 보며 내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 녀석은 글러 먹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천우진이나 여타 주연들은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긴 했다.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단순한 사념의 조각이 주는 악몽 따위는 홀연히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갈 녀석들이었으니까.
다만, 그렇지 못한 ‘조연’도 있었다.
내가 그 조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세연.
모르도의 계약자로, 원래는 ‘마기의 폭주’에 휘말리는 운명을 타고났던 비운의 조연.
그렇기에 사념이 주는 마기에 누구보다 동조되기 쉬운 녀석.
한세연에게 있어 마흔의 시련이 주는 난이도는 다른 녀석들에 비해 몇 배에 달하는 악몽일 터였다.
심하면 수십 배에 달할지도 몰랐다.
마기 사용자는 마기의 영향을 가장 쉽게 받기 마련이었으니······
이를 알고도 내가 한세연을 마흔에 데려온 이유는 다름 아닌 ‘노아 맥도웰’ 때문이었다.
창설제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살려준 인물.
하지만 나는 그녀가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살려주었다고는 믿지 않았다.
쓸 수 있는 패라면 마인이건, 마수건 괘념치 않는 사고관을 가진 그녀였으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그런 존재들을 경계하는 이가 바로 노아 맥도웰이었다.
‘만약 한세연이 마흔의 사념에 휘둘린다면······’
노아는 망설임 없이 한세연을 ‘폐기’할 것이다. 적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패를 살려둘 정도로 노아는 무르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마흔의 시련을 통해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한세연이 마흔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신뢰 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어쩌면 지켜보고 있을 수도.’
카메라를 이용해서건, 수정구를 통해서건 어딘가에서 한세연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었다.
제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면 믿지 않는 것 또한 노아라는 인물이었으니.
그랬기에 나는 한세연에게 가해지는 마흔의 사념을 저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버려 두었다.
이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한세연 혼자서 뛰어넘어야 하는 시련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계속 저렇게 세워둘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제법 시간이 걸릴 듯싶었으니까.
“천우진, 나 좀 도와줘라.”
“뭐를?”
“쟤 좀 앉혀 놓게.”
“음, 깨우는 게 좋지 않을까?”
안색이 살짝 좋지 못한 한세연을 보곤 천우진이 물었다.
“통과하면 알아서 일어날 거야.”
새근새근 숨을 고르는 한세연을 잠시 쳐다본 내가 말했다.
천우진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내게는 또렷이 보여왔다.
한세연의 영혼이 마기의 사념과 맹렬히 싸우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천우진의 도움을 받은 나는 한세연을 언덕의 바위에 기대 앉혔다. 그리곤, 나 또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만약 한세연이 폭주라도 했다간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오직 나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그럴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내가 바위에 기댄 한세연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세연이 지금껏 시달려왔던 모르도에 비하면 사념 따위는 애교 수준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분명 잘 헤쳐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한세연이 눈을 뜬 것은 오후 7시를 훌쩍 넘긴 저녁 무렵이었다.
***
“으음···”
한세연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곁에 앉아있던 내가 시선을 돌렸다.
“깼냐.”
“응.”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던 녀석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치 자다 일어나서 베개를 발견한 사람처럼. ···내가 베개냐?
“······.”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 평상시와 같은 행동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잘 통과하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기에 일말의 불안도 있던 것이다. 그게 해소됐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로 한세연을 향한 노아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는 수그러들 터였으니까.
한동안 내게 몸을 기대고 있던 한세연은 바위에 오래 기대어 있던 탓에 찌뿌둥했는지, 우으음- 기지개를 쭉 피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아무도 없어 휑하기만 한 바위 언덕을 둘러본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기다려준 거야?”
“어, 나 말고도 밖에 교관 두 분 더 있어.”
기말고사의 1차 시험인 ‘마흔’의 선착순 100명이 모두 찬 것은 오후 5시경이었다.
그리고, 생도들은 ‘마흔’에 도달하기 무섭게 바로 이곳을 벗어났다.
마흔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나, 사념의 속삭임을 계속해서 버티고 있을 수는 없던 탓이다.
그건 교관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바위 언덕에 남을 수 있던 것은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불사조의 불꽃과 부동의 각인을 지닌 내게는 마흔의 사념이 일절 통용되지 않았으니까.
생도들은 내일 있을 2차 시험을 대비해 모두 태백산맥의 임시 기숙사로 들어간 뒤였고, 교관 두 사람만이 남아 언덕 밖에 대기 중이었다. 나야,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모르도의 폭주를 대비해 남아있는 것이었고.
이런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건지, 한세연은 내가 설명하는 내내 웃기만 해보였다.
왠지 모를 멋쩍음에 볼을 긁적인 내가 먼저 등을 돌렸다.
“가자. 교관님들 기다리니까.”
“응.”
***
태백산맥의 정상에는 이터니티의 건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1차 시험을 합격한 100명의 생도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렇게 이튿날 아침, 현관으로 나온 생도들이 간단한 체조를 마쳤을 때였다.
교관이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다들 잘 자서 그런지 얼굴들이 좋군. 그럼 오늘부터는 모두 밖에서 잔다.”
“예?”
“···밖이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생도들을 위해 교관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서로 싸워라. 1명 잡을 때마다 포인트는 기본 1점이 주어진다. 물론, 포인트를 많이 가진 생도를 잡으면, 그 포인트는 전부 잡은 녀석의 몫이다. 포인트 순으로 성적을 매기겠다. 단, 무대는 이 건물 밖의 산맥에서다.”
“······.”
교관의 말은 간단했다.
태백산맥에서 100명의 생도가 서바이벌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인트가 제일 많은 생도 순으로 성적을 매기겠다는 건데, 탈락한 생도는 이 건물에서 대기하란다.
단, 산맥에서 식수를 구하기는 어려웠기에, 건물의 이용은 가능하다고 한다.
건물의 안에서는 서로 싸우는 것과 취침이 금지되어 있었고.
포인트를 벌자면 어쩔 수 없이 모두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포인트는 지급 받은 팔찌에 기록되고, 팔찌에 내장된 실드가 완전 소실되면 탈락으로 규정한다. 질문 있나?”
생도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식량은 어디서 구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예?”
의아해 하는 생도들을 보며 교관이 혀를 찼다.
“동물이나 마수를 잡아 먹어라.”
“······.”
“아니면 산에서 풀이나 버섯을 따먹던지. 그러니까 알아서 먹고 자라는 소리다.”
“건물 안에서 취침할 방법은 아예 없는 겁니까?”
“있다.”
“오오.”
생도들의 눈에 안도감이 스치자, 교관이 씨익 웃었다.
“포인트 10점을 내면 안에서 재워주지.”
“그, 그건 자지 말란······”
말도 안되는 점수에 질문했던 생도가 당황하자 교관이 박수를 짝! 쳤다.
“자, 그럼 서바이벌 시작이다. 다들 밖으로 나가라.”
***
건물 밖으로 내몰린 생도들은 산에서 취침을 할 생각이 없는지, 빠르게 끝내자는 암묵적인 룰이 세워졌다. 이런 야산에서 아무런 장비도 없이 날을 지새운다는 건 제아무리 이터니티의 생도라 할지라도 고역이었으니까.
그들은 뛰어나지만, 아직 어린 10대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서바이벌이 시작되고 반나절이 지났을 때에는 무려 50명의 탈락자가 발생해 있었다. 미리미리 결과를 내곤 건물에서 자려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성적을 위해서라면 산에서 자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생도들이 몇 명씩은 꼭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자, 생도들은 식수와 모포를 구하기 위해 하나 둘 건물에 들렸다.
“아, 죽겠네.”
은가예는 터덜터덜 시체처럼 건물로 들어섰다. 무지하게 힘든 하루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노동 뒤의 뿌듯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도 그럴 게, 대낮의 교전에서 무려 4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점수를 획득한 것이다.
“에헤헤.”
잘만 하면 1등도 노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꾸만 입가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은가예가 룰루랄라 건물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응?”
해괴한 광경을 목격한 은가예가 자리에 멈춰 섰다.
“웬 줄이······”
건물 밖까지 생도들이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탈락한 생도들인가 싶어서 면면을 확인해보았지만, 대부분이 생존자들이었다.
“아하.”
이내 무슨 상황인지를 깨달은 은가예가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냥 밖에서 자라 할 리가 없지.”
이건 분명 교관이 야영 물자를 나눠주기 위한 줄임이 틀림 없었다.
내심 어떻게 야영을 해야 할 지가 고민이었던 은가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느긋하게 쉬면서 줄이 줄어드는 걸 기다릴 생각에 은가예는 건물의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안의 상황은 그녀가 예상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현관 앞에 누가 편의점이라도 차려 놓았는지, 음식과 페트병 묶음, 침낭 등이 잔뜩 쌓여져 있던 것이다. 야영물자치고는 종류도 종류지만, 너무 과했다. 여기까지야 그럴 수 있다 치는데, 문제는 그 옆에 놓인 커다란 형광 팻말이었다.
[포인트 1점 - 빵]
[포인트 2점 - 메론빵]
[포인트 2점 - 라면]
[포인트 2점 - 김치]
[포인트 3점 - 침낭]
[포인트 4점 - 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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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은가예가 큰 눈을 끔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