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마기를 사용한 전투는 이성이 잠식되기에 싫어하지만······”
분노한 세오릭의 전신에서 유형화된 마기가 일어난다.
그의 몸을 뒤덮었던 만티코어의 독극물이 증발하고 전신의 근육이 풍선처럼 부푼다.
흰자위가 사라진 두 눈은 마기에 먹혀 검게 물들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기분이 아니군.”
”괴물이야!”
“괴물!”
세오릭의 끔찍한 외양에 놀란 리디아와 니엘이 동시에 소리친다.
핏대를 꿈틀거린 세오릭이 두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기가 넘실거리는 주먹이 쇄도하자 니엘이 거대한 암석의 벽을 세웠다.
콰앙!
주먹은 암석의 벽을 관통해 니엘의 얼굴 앞까지 다댜랐다.
리디아가 일으킨 물의 칼날이 세오릭의 주먹을 잘라간다.
하지만 세오릭의 손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마냥 물의 칼날을 붙잡았다.
"아앗!"
물의 칼날이 허무하게 깨져나가자 리디아가 놀라 소리쳤다. 뒤이어 암석의 벽이 허물어져 내리며 세오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디아가 생성한 물이 세오릭의 눈코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숨을 쉴 수 없게 된 세오릭이 멈춰서자 천장이 무너지며 세오릭의 머리 위로 암석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마기를 일으켜 물 덩어리를 치워버린 세오릭은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방사형으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떨어져 내리는 암석 파편들을 막아섰다.
암석 파편들이 마기의 막에 막혀버리는 광경에 니엘과 리디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스르륵.
돌연 마기가 흐트러지며, 방사형의 막이 흔들렸다.
“뭣!?”
놀란 세오릭이 눈을 부릅 뜰 때, 암석이 콰과광! 떨어져 내렸다.
마기가 흔들린 세오릭은 고스란히 암석의 무덤에 깔려버렸다.
공방을 지켜보던 내가 기회를 봐서 항마력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리디아와 니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니엘은 세오릭을 뭉갠 암석들을 하나로 단단히 뭉쳤으며, 리디아는 그 주위로 만티코어의 독이 담긴 물의 칼날을 쉴 새 없이 생성했다.
‘뭐, 여기까지는 예상범주 안인데······’
솔직히 이러한 고비가 있을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죽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
오거스트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세오릭이 녀석의 의사에 반해 내게 살심을 품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세오릭은 그저 스스로가 의지를 지녔다고 착각할 뿐인 불쌍한 ‘인형’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 인형극에 휘말려 죽을 가능성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광기에 가까운 「수집욕」을 지닌 오거스트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얻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져줄 생각도 없지만.’
그때, 세오릭을 덮친 암석더미가 와르르 흔들리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둘 다 내가 눈 감으라면 감아.”
“네에!”
“네에!”
리디아와 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나는 염력을 이용해 니엘이 생성해낸 돌덩이들을 모조리 공중에 띄워 올렸다.
‘아나스타샤.’
고개를 끄덕인 아나스타샤가 상공으로 떠올랐다. 녀석의 앞으로 거대한 빛이 뭉쳐 든다.
「광포화」
아나스타샤가 가진 비장의 무기로, 해남은가의 가주 은하성조차도 당황하게 만들었던 파멸의 빛이었다.
물론, 해신의 진주를 잃은 지금의 광포화를 그때의 광포화와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었으나 세오릭을 몰아붙이기에는 충분했다.
녀석이 시멘트 구덩이에 갇혔을 때 짧은 시간 동안 모은 빛 포화만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혔었으니까.
콰아앙!
순간, 암석 무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세오릭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내가 소리쳤다.
“감아!”
쌍둥이자매가 눈을 꼬옥 감는다.
이어서, 번쩍! 아나스타샤의 빛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크윽!”
암석 더미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눈이 마비된 세오릭이 주춤거린다.
“리디아!”
나는 소리침과 동시에 무방비가 된 녀석을 향해 아나스타샤의 광포화를 떨어트렸다.
리디아가 생성해놓은 물의 칼날과, 염력으로 띄운 돌무더기, 그람의 비도도 함께였다.
─────────!
세오릭 한 사람을 노리고 집중되는 화력의 포화.
얼핏 녀석의 비명이 들려왔으나, 이어지는 폭발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제아무리 오마의 간부이고, 최상급에 근접한 초인이라 해도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집중포화를 당하게 된다면 쉽게 넘기기란 어려웠다.
이를 막으려면 녀석도 전력을 다해 마기를 방출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그 순간을 노리고 항마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단숨에 지운다.’
녀석이 몸을 보호하던 체내의 마기마저 밖으로 돌리는 순간.
그때가 바로 기회였다.
직접 신체를 접촉하지 않는 이상 세오릭의 마기를 오래 붙잡아 두는 건 무리였으나 녀석이 체외로 모든 마기를 방출했 때 항마력을 날린다면 한순간이나마 녀석을 완전한 무력화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건 가능했다.
그 순간을 노린다면 세오릭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노리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세오릭을 향했던 공격의 포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고, 붕괴의 소음도 금방 잦아들었다.
아니, 멈췄다.
튀어 오르던 암석, 날아들던 돌무더기, 물의 칼날, 그람의 비도······
그 모든 것들이 허공에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마치 정지된 영상의 장면처럼,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
고요에 잠긴 일대.
눈을 의심케 하는 거짓말 같은 광경에 세오릭도, 나도, 쌍둥이자매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랬기에 그 걸음이 고요를 깼을 때, 모두의 이목은 선명히 청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저벅저벅─
마치 산책을 나온 듯한 걸음걸이,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병약한 외모가 그 홀로 가위로 오려낸 듯,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어도,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거짓말 같은 광경을 자아낸 이가 바로 저 병약해 보이는 청년, 오거스트라는 것을.
“꼴이 말이 아니구나, 세오릭.”
인형극의 막을 고하는 것처럼, 지하를 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
오거스트가 무감한 시선으로 온몸이 파열된 세오릭을 응시했다.
세오릭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졌다.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마기를 터트리면 이런 공격쯤은······”
그가 항변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졌다.”
“······.”
“마기를 터트린 시점에 네가 진 거야. 세오릭.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오거스트의 시선이 세오릭에게서 내게로 옮겨갔다.
그 흥에 겨운, 탐욕으로 들끓는 변태 같은 시선을 마주한 내가 인상을 구겼다.
내가 그러든 말든 오거스트는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저 아이는 네가 전력으로 마기를 방출하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그래야 마기를 지우기 쉬울 테니까.”
“······.”
속내를 꿰뚫린 내가 혀를 차고, 세오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세오릭도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것이다.
항마력을 본 순간부터, 마기를 방출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역시 흥미로워.”
오거스트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리디아와 니엘을 응시했다.
그 뱀이 핥는 듯한 시선에 리디아와 니엘이 내게 쪼르르 도망쳐 왔다.
“그 아이들에게는 내 계약의 선을 강하게 이어놓았을 텐데, 지배가 통하지 않는구나.”
나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강하건 약하건, 내게 있어서는 실을 두 개 이었느냐 세 개이었느냐의 차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뭐,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인지 리디아와 니엘에게는 계약의 선이 네 가닥씩이나 이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게 그거지.’
이런 내 싱거운 반응에 오거스트가 눈을 빛냈다.
“너는 나를 겁내지 않는구나.”
“죽일 생각도 없는 사람한테 겁낼 이유야 없지.”
내 말이 맞다는 듯 오거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나는 네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구나.”
“권속이 되라는 개소리 할 거면 일없으니까 포기해.”
오거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권속이 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러면?”
“지켜보니 네 몸은 일반적인 초인보다 약해 보이더군. 어떠한 특수능력으로 일시적인 증폭을 하는 부류로 보인다.”
“······.”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네.
“나와 계약을 하면 네 몸을 강화시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계약이 꼭 권속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저 계약만 나누고 싶다.”
“싫다면?”
“왜지? 육체를 강화할 수 있다면 네가 손해보는 조건은 아닐 텐데.”
오거스트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데몬을 보아서 알겠다만, 나와의 계약은 마족과의 계약과 다르다. 조금 성정이 강하게 변할 수는 있으나 다른 마인처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과는 달라.”
어쩐지 일반적인 마인과는 달라 보인다 느꼈는데 그래서였나.
“만약 언데몬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라면 그들의 자유도 인정해주겠다.”
“마인의 말을 믿으라고?”
“너는 마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잘못 이해할 건 없다고 보는데.”
이해고 자시고 마인은 초인을 먹이로 삼아 괴멸시키려는 미친놈들이다.
차원의 균열을 열어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도 마인이었고.
하물며 오거스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미쳐버린 놈이었다.
본인은 다른 오마나 칠악과는 다른 ‘선한 존재’라고 여기는 또라이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입에서 내가 예상한 그대로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다른 오마나 칠악과는 다르다.”
“······.”
“마인은 초인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거였다.
이놈의 사상은 ‘미쳐’있었다.
마인 중에서도 유일한 ‘반전’, ‘평화주의자’로, 지난 100년간 일어난 두 차례의 대전쟁의 시기에도 오거스트는 단 한 번도 참전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절망에 빠진 이들을 차례차례 데몬스폰으로 만들어왔다.
부모를 잃어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마릴을 구해 데몬스폰으로 만든 것도.
가문이 몰락해 팔려나갈 위기에 처해있던 이본느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은 것도 바로 오거스트였다.
노쇠하는 몸과 부족한 재능에 절망하던 세오릭에게는 강건한 육신과 수명을, 전쟁고아들에게는 살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데몬스폰이 된 모두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존재.
얼핏보기에는 무척이나 선량해 보이고, 그 사상 또한 지극히 옳으며, 그것을 실천할 강대한 힘마저 지닌 존재가 바로 오거스트였다.
그랬기에 이본느 또한 한때는 오거스트를 따랐던 거고.
하지만 이 놈의 실체는 그냥 ‘사이비’에 빠진 미친 교주에 지나지 않았다.
‘초인’보다 ‘마인’이 우월하다는 사상을 지녔기에, 괴로움에 빠진 이들을 무조건 데몬스폰으로 만들어온 것뿐이었으니까.
초인이란, 포섭하고 구제해야 할 하등생물일 뿐이지,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에 적 또한 될 수 없다는 또라이 같은 사상을 지닌 게 바로 오거스트인 것이다.
언데몬이 생긴 이유도 마인이 되길 원치 않던 이들이 ‘구제’라는 명목으로 억지로 마인이 되어버렸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더불어 데몬스폰이란, 자신이 의사를 가졌다 착각할 뿐, 녀석의 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형’에 불과한 존재였다.
조금 전의 세오릭이 내게 품은, 이룰 수 없는 ‘살심’처럼 말이다.
‘매료의 마안’ 탓에 세오릭은 이놈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자신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고 도망쳐 나온 존재가 바로 이본느였다.
아무튼,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또라이 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데몬스폰이 되라는 개소리인데, 어디 들어줄 가치가 있어야지.
그럼에도 나는 이 미친놈과 괴로운 사상적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내게는 시간을 끌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내심 혀를 찬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나도 마인은 초인과 어울려 살아가야한다고 봐.”
“호오, 대화가 통하는군.”
······시발. 미친 새끼.
“어, 음, 하지만 그 전에······”
그렇게 내가 이제는 입에 달라붙기 시작한 머리를 거치지 않은 궤변을 무작정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콰아아앙─!
내 궤변에 심취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던 오거스트가 돌연 알 수 없는 힘에 강타당해 지하의 저편에 처박혔다.
그 엄청난 참사에 내가 입을 쩌억 벌렸을 때다.
“해솔아-!”
돌연,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더니 누군가 기습적으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존재를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한세연?”
얘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나는 지하의 격벽을 6개나 뚫고 사라진 오거스트가 있을 곳을 보며 어색하게 굳어졌다.
···좆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