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필기시험의 결과는 벼락치기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룬어시험은 엎어져도 만점이니 제쳐두고, 근현대사도 제법 성적이 좋았다.

게임의 내용이야 빠삭해서 년도 수만 따로 외워주면 장땡이었으니까.

물론 그놈의 수정된 역사 때문에 사실을 써놓고도 오답처리된 게 꽤 있어서 손해를 좀 보기야 했지만······

그 외의 다른 시험의 성적은 좀 구렸다.

시험의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도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알 수밖에 없었다.

시험 과목이 끝날 때마다 꼭 공부 잘하는 애 책상에 벌떼처럼 우르르 모여들어서 오답체크 하는 시간을 국룰처럼 갖는데, 이터니티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또 하필이면 내 옆자리였다.

무슨 정답지 발표하는 것마냥 한세연의 시험지를 들고 한 아이가 외치면 애들이 단체로 체크를 하니, 나도 체크하는 수밖에···

근데, 빗줄기의 여왕이라는 은가예의 시험지가 오늘따라 화창했다.

그동안의 ‘필기고문’의 성과가 허사는 아니었는지 은가예의 이번 성적이 제법 좋았던 것이다. 이게 비온 뒤 맑음이란 건가.

“훗, 공부 가르쳐 줄까?”

“아니.”

“가르쳐 줄게.”

제 결과가 뿌듯한지 건방지게 공부를 가르쳐주겠다고까지 한다.

은가예를 이렇게 만든 한세연이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제주입을 시키면 애가 이렇게 달라지는지······

아무튼, 내 시험 성적은 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구렸지만, 결과는 꽤 나쁘지 않았다.

상대평가이다 보니, 알아서 떨어져 주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렇다.

이 세상은 알다시피 마법이다 주술이다, 뭐다 해서 기상천외한 컨닝방법이 수두룩하게 존재하는 동네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꼭 멍청하게 컨닝하는 애들이 시험 때마다 무조건 존재했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등수가 오르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는 컨닝하는 애들이 많이 나오지 않기에 앉아서 등수가 오르는 것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번 시험에는 부정행위로 탈락한 불운한 생도들이 이상하게 제법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세울님의 포션을 마셨더니 마력 효율이 증가해서 생도들이 시험에도 사용해본 모양이에요.”

아무튼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알다시피 마력 효율이 증가하면 마력을 숨기는 능력도 증가하니까요. 물론 지속시간이나 불안전성인 측면도 있어서 보완은 필요해 보여요.”

그러니까 나한테 보고좀 하지 말아줄래.

이러면 내가 애들 다 탈락시킨 것 같잖아.

“너 가방에 만화책 있다고 다 불어버린다.”

순간, 아멜리아의 얼굴이 수증기가 일 듯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 없거든요?”

누가 들었을 새랴 주위를 휙휙 돌아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힘주어 부정하는 아멜리아. 그냥 넘겨 짚어봤을 뿐인데 정답이었나.

“···글쎄 아니라니까요?”

“뭐가 아닌데.”

“···만화책 같은 거 없다고요, 좀.”

시험이 끝나면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취향이 듬뿍 담긴 서적을 컬렉션으로 잔뜩 모으는 아멜리아다.

중간고사 때도 그러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그건 변함이 없었나 보다.

“오! 만화책 있어? 어디, 나도 보여줘.”

“그런 거 없어요······멋대로 가방 만지지 마욧!”

우리의 은밀한 대화를 엿들은 은가예가 빌려달라며 달라붙자, 아멜리아가 필사적으로 가방을 사수한다.

타인과 공유하기는 어려운 취향이 담긴 서적인 모양이다.

아무튼.

얼마 전에 푸른 단약의 열화판을 포션으로 만들어서 생도들에게 시험 삼아 팔았었는데, 아멜리아의 이야기대로라면 그게 제법 반응이 좋은 듯했다.

안 좋은 쪽으로 악용하는 정신 나간 친구들이 나오는 불상사가 발생하긴 했지만······ 뭐, 그건 본인이 자초했으니 자업자득이 아닐까.

결코 누가 등을 떠민 적은 없다. 의도치 않게 내 등수가 좀 높아지기야 하겠지만.

그나저나, 단약의 포션화가 제대로 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이게 단약을 포션으로 낮추는 과정에서 부작용이나, 지속 시간의 불규칙함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듯했으니까.

큰 부작용은 아니고, 약간의 상태 이상 정도라, 임상실험 과정에서 아멜리아가 포션을 마시고는 얼굴을 붉히며 히끅히끅 울거나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등, 애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최근에는 포션을 습관처럼 마시는 것 같아서 내가 주의를 주고 있는 중이었다.

─생도지도실에서 전파합니다. 1학년 1반 이해솔 생도는 방송을 듣는 즉시 생도지도실로 와주십시오.

“······?”

─다시 한번 전파합니다. 1학년 1반 이해솔 생도는······

왜지.

실기 때 물건 팔아서? 포인트 분배해서? 납치? 포션 때문에? 그도 아니면······

딱히 규정에 어긋날만한 짓은 저지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 생도지도실로 향했다.

똑, 똑.

“1반 이해솔입니다.”

─들어오게.

안에서 들려온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생도지도실에는 두 사람이 자리해 있었다.

학년주임 정해준과, 처음 보지만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모습의 여자.

“오늘은 내가 아니라 이분이 용건이 있으시다 해서 불렀네.”

정해준이 마주 앉은 여자를 가리켰다.

“시엘 아르세이님이네. 마력이론 교수직과 수호직을 겸임하고 계시지.”

이터니티에는 보안요원이 대처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한 특무조와 그 상위의 직책인 수호직이 존재한다. 시엘은 그 수호직의 한 사람이다.

아하. 이름을 듣고서야 상대를 알아본 내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난 나가 있을 테니 이야기가 끝나면 불러주게.”

“네.”

정해준이 생도지도실을 나가자, 나와 시엘만이 방에 남았다.

“왜 저를 부르신 거죠?”

시엘에게서 말이 없었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슥─

“?”

탁자 위의 종이를 내게 밀어 보이는 시엘. 나는 의아해하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1학년 마력이론 필기시험>

“마력이론 시험지네요.”

톡. 톡.

시엘이 하단의 서술형 2번 문항을 가리켰다.

【II.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대 마력치와 그 이유에 대해 서술하시오.】

“제가 틀린 문제네요.”

솔직히 이 문제를 보자마자 옳다구나 바로 답을 적었었다.

이건 내가 잘 알고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보기 좋게 틀렸다.

“흥미로운 답을 적어내셨더군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력의 최대치는 ‘무한대(∞)’이다. 개인의 마력이 적다면, 타개체의 마력을 받아들이면 된다.〕

“인간이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육체라는 그릇이 마력의 한계치를 넘어서면 붕괴하기 때문이죠.”

“예, 그렇죠.”

“누구나가 다 아는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해솔 생도는 그 해답 또한 제시했더군요.”

〔그릇은 아무리 강화시켜 봤자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무한대의 마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해야 할 것은 그릇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생도를 불렀습니다.”

내가 써 놓은 서술을 붉은 펜으로 그어보이며 시엘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릇을 버린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육체를 버리라는 뜻입니까?”

“···음, 육체를 버린다기보단, 마력을 받아들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마력은 무한대로 뭉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그 무한대의 마력을 견딜 수 없다.

마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릇의 역할을 포기한다면,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존재로는 정령과 같은 ‘정신체’가 있다. 정신체인 정령의 성장에는 한계란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시엘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인간이 정령화가 될 수 있냐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연구 중인 분야였다. 그밖에 문제는.

“사람은 타인의 마력을 받아들이면 반발합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릇에 ‘속성’이 부여되어있으니까요. 그건 생도도 잘 알텐데요.”

타개체의 마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체라도 불가능하다. 정신체에게도 ‘속성’이란 존재하니까.

아멜리아와 같은 순수마력을 쓰는 생도도 기본 5대 속성만을 받아들이지, 거기서 변질된 속성마력까지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이다.

“예, 그래서 속성을 버리자는 거죠.”

“원론적인 이야기군요.”

“···뭐, 그렇죠.”

허황된 이야기라는 말을 돌려 표현하는 시엘. 마치 그게 가능하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예, 가면서 주임교수님 들어오셔도 된다고 말해주세요.”

나는 생도지도실을 나가며 속으로 지금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속성’이 부여되지 않은 그릇.

그런 그릇은 이터니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날때부터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들에게는 개개인의 속성이란 게 존재했으니까. 그러니 애초에 속성이 없는 그릇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걸 왜 말했냐고?

‘그야 있으니까.’

마력수치 ‘0’의 무속성 무마력자이면서 기프트 【어느 필멸자의 고민】으로 인해 정령과의 융합이라는 전대미문의 진화를 이루어가는 존재가.

시엘이 허황되게 생각하고, 내가 서술에 써낸 무한대(∞)의 그릇이란, 바로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

필기시험을 마지막으로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날 방과 후. 나는 언데몬의 새로운 거점, ‘마경’에 가기로 했다.

가는 방법이야 간단했다.

언데몬에는 서로 간에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서 이동까지 가능한 검은 종이, ‘마화(魔話)’가 존재했으니까.

이걸 이용하면 얼마든지 마경을 자유로이 오가는 게 가능했다.

되돌아갈 때도 처음에 마화를 사용했던 좌표로 이동하기에 무척이나 편리한 이동수단이었다.

블랙마켓의 블루마블과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가볼까.”

마화에 그람의 마력을 불어넣자, 시야가 번쩍하더니 기숙사가 사라지고, 마경의 풍경이 펼쳐졌다.

“오! 해솔님. 오셨군요.”

내가 나타나자 야외의자에 앉아 있던 마인, 백건우가 벌떡 일어나며 나를 반겼다.

“예, 건우씨, 그런데 벌써 거의 다 지어졌네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황량한 공터였던 마경에는 이틀 만에 벌써 그럴싸한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도 한쪽에선 니엘이 골렘을 조종하며 집짓기 놀이에 한창이었다.

볼때마다 기가 차네.

“하하, 겉모습만 그렇습니다. 내부까지 제대로 공사하려면 아직 멀었죠.”

웃으며 고개를 저은 백건우가 눈을 빛냈다.

“그래서,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사냥을 나가시려는 겁니까?”

“네, 시험해볼 게 있어서요.”

사실 내가 마경에 들린 이유는 한 가지 확인해볼 게 있어서였다.

[이상의 투영자]

*SP를 소모하며 능력의 강화가 가능하다.

오거스트전으로 얻은 SP를 통해 강화한 이상의 투영자에는 새로운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바로 SP를 소모해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문구.

오늘은 강화된 이상의 투영자가 가지는 힘이 어느정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마경에 들린 것이었다.

마경의 마수를 상대로 한다면 마음 놓고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마침 이 근방에 고블린 군락이 있는 걸 확인해두었습니다.”

“그거 좋네요.”

“하하, 지우려던 걸 해솔님이 사냥을 나가신다해서 이본느님이 남겨두었습니다.”

웃으면서 백건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고블린이라 해도 마경의 놈들은 일반 고블린보다 훨씬 강하거든요.”

“예, 그래서 마경에 온 겁니다.”

능력 확인도 하면서 경험치도 좀 쓸어 먹으려고.

언데몬의 마인들을 데리고 가면 경험치 이벤트가 쏠쏠할 거라는 예상에서였다.

“소피아라 합니다.”

어느새 다가온 은발의 여성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언데몬에 찾아갔을 때 함께 식사를 했던 간부 중 한 명이었다.

그 뒤로는 10여 명의 마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내가 사냥을 나갈 거라는 전달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대기를 하고 있던 듯했다.

“모시겠습니다.”

“예,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는 소피아를 따라 공터를 벗어나 마경에 들어섰다.

***

“꽤 크네요.”

마경의 숲. 소피아를 따라 30분 가량을 걷자, 거대한 고블린 군락이 나타났다.

적게 잡아도 100개체 이상이 생활하는 듯, 움막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홉고블린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한 녀석들입니다. 조심해야 할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는 소피아.

마경의 마수가 일반 개체와 다르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죠.”

“예.”

내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사박사박······

“키이이익!”

수풀을 밟고 나가자, 바로 반응하며 소리를 치는 고블린.

내 위로 어느새 9개로 늘어난 비도가 날아올랐다.

“키익! 키이익!”

순식간에 우리들 앞으로 모여드는 고블린 무리.

녀석들의 손에 독침을 내뿜는 기다란 장대가 쥐어진다.

[이상의 투영자]

─SP를 이용한 능력의 강화를 시행하시겠습니까?

‘어.’

우웅!

순간, 비도에 맺힌 그람의 마력이 대폭적으로 증가했다.

"!"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소피아를 비롯한 마인들이 흠칫 놀랐을 때다.

──────────!

죽음의 비가, 모여드는 고블린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