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보세요, 이 보드라운 살결. 하얀 피부. 이건 일반적인 정령이라면 절대 지닐 수 없는 거라고요.”
아멜리아가 아나스타샤의 볼살을 매만지며 주장한다.
“그래서.”
“마경이라는 위험한 숲을 정처 없이 배회하는 소녀라니. 무언가 영감이 팍팍 떠오르려 하지 않나요?”
“아니.”
안 떠오르는데.
“게다가 이 귀여움.”
귀여운 건 또 무슨 상관인데.
“완벽한 숲지기 요정이에요.”
“······.”
눈을 별처럼 반짝이는 아멜리아.
머리가 아찔했다.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정령이라면 가질 수 없는 놀라운 모습.”
“네.”
“위험한 숲을 배회하는 소녀.”
“네에, 네에.”
“···귀여움. 그래서 숲의 관리자라 했다?”
“바로 그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 들어 하던 아멜리아는 내 짜한 시선을 느끼곤 움찔 떨었다.
“무, 물론 당연히 그것만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급하게 수습하려 드는 아멜리아.
지르고 나서 생각을 하는 건지 잠시 뜸을 들인다.
어디 들어나 보자.
듣고 나서 패도 안 늦으니까.
“트윈헤드 오우거를 물린 시점에 마경 깊숙이 들어왔다면 분명 ‘백야’의 모험가들일 거예요. 그들은 한국의 마경에 관해서 가장 정보가 밝거든요.”
“·········백야라는 말, 들었음.”
아나스타샤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이 심장에 무리를 주었는지 헛기침을 하던 아멜리아가 내 재촉어린 시선에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백야에서는 아나를 드라이어드라고 완전히 믿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어떻게든 자신의 실책을 무마시키면서도 아나스타샤를 숲지기 요정으로 만들겠다는 사심 가득한 발언이다. 그런데 꽤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어떻게?”
“언데몬은 마경에서 잡는 마수의 부산물을 잔뜩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유통할 판로를 확보하지는 못했죠. 지금은 블랙마켓을 통해 소량 거래를 하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분명 부족한 것들이 있을 거예요.”
아멜리아의 말대로였다.
마경의 마을은 마수의 부산물을 소량으로 유통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한 상태였지만, 현대인은 단순히 의식주가 해결되었다고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의식주통.’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의식주에 더해 ‘통’이 필요했다.
통이란 바로 정보.
게임이라던가, 너튜브라던가, 뉴스라던가······
현대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컨텐츠다.
문제는 이 ‘정보’를 마경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마력석을 이용하면 쉽다고는 하는데, 대놓고 사용하면 언데몬 마을의 위치가 발각된다고 한다.
이를 방지하려면 기타 설비가 필요한데 이게 또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진다.
그 외에도 마을의 안전, 식수, 기타 민원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였다.
당장 마을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도 마수와 눈을 마주치는데, 언데몬 모두가 ‘전투요원’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전투요원이라 해도 마경에서 안전하려면 그에 걸맞는 무장이 필요했고.
문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마수의 부산물을 팔아야 하는데, 소재가 불분명한 마수의 사체가 주기적으로, 그것도 대량으로 시장에 풀린다?
분명 냄새를 맡고 뒤를 캐려는 놈들이 나타날 게 뻔했다.
아멜리아는 바로 이러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아나스타샤를 드라이어드로 만들자는데······
개수작이 눈에 빤히 보였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
“계속해.”
“예. 백야에서는 드라이어드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2차 원정대를 꾸릴 거에요.”
“그러겠지.”
마경 조사하라고 수하를 보내놨더니, 뜬금없이 전설의 요정을 만나고 왔단다.
나 같아도 못 믿어서 2차 조사단을 꾸리겠다.
“먼저 왔던 이들과 함께 전문가들이 파견되겠죠. 그들을 통해 판로를 확보하는 거예요.”
즉석에서 만들어낸 의견치고는 들어 줄만하네. 아니, 좋았다.
“똑똑하네.”
“헤헤.”
내 칭찬에 배시시 웃는 아멜리아.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굴러간다.
이 좋은 머리를 가지고도 아카데미 순위가 한결같이 낮은 이유는 여전히 미스테리였지만.
아무튼.
“그런데 드라이어드가 인간과 대량거래를 하는 것은 이상하잖아.”
정령이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마수 부산물을 인간과 거래한다? 이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그거예요!”
“?”
뭐가 그거라는 거지?
잘 지적해주었다는 듯이 테이블을 탕 친 아멜리아가 소리친다.
“여기서 저는 환상의 마을, 드라이어던의 구축을 제안하는 바예요.”
“············.”
좋은 아이디어죠? 칭찬해달라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아멜리아.
순간 이마에 핏대가 솟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진정했다.
잘 나가다가 이상한 길로 빠져버리는 건 아멜리아의 주특기였으니까.
그렇게 그만 듣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는데.
“계속 들어보죠.”
언제 들어왔는지 이본느가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한세연이 불고기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젓가락으로 한 점을 집어서 내 입에 가져다준다.
“맛있네.”
“그렇지?”
“응.”
기쁘게 웃는 한세연.
나는 조금만 더, 아멜리아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드라이기인지 드라이어던인지를 더 말하면 금방 끊어버릴 생각으로.
“정령이 부산물을 파는 건 분명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정령과 관계된 사람이 파는 것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렇게 시작된 아멜리아의 이야기는 분명 약팔이였으나, 이 약팔이가 또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서 계속 듣게 되었다.
드라이어드를 따르는 이든, 계약자든 어떠한 형태라도 상관없으니까 사람을 드라이어드와 같이 내세워서 거래를 하자는 이야기.
충분히 말이 된다.
갑툭튀라는 느낌이 없지 않기야 했는데 그거야 최근에 드라이어드와 ‘계약’을 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어때요?”
“좋은 생각이야.”
칭찬을 바라는 아멜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대로 한다면 부산물을 대량으로 팔 수 있는 판로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솔직히 ‘계약자’를 내세울 필요 없이 아나스타샤 혼자만 내세워도 크게 문제될 건 없어보였고.
참고로 환상마을 드라이기인지 뭔지는 바로 기각시켰다.
마경 안에 마을이 있다고 광고할 게 아니라면 그런 건 하지 않는 편이 좋았으니까.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듯싶었는데.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네요.”
“가장 중요한 일?”
“네.”
아멜리아가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드라이어드처럼 꾸며야죠.”
***
······하태진을 비롯한 백야의 마경 조사팀이 개척지로 돌아온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
개척지의 지부장 양휘철은 조사팀이 내민 보고서를 읽어보곤 황당해서 되물었다.
“······그러니까, 미확인 정령을 만났다?”
“미확인 정령이 아니라, 숲의 관리자 드라이어드요.”
양휘철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대답을 한 정령사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클로에양.”
“예, 지부장님.”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리브레에게 당한 건 아닌가?”
리브레는 환상을 보여주는 식물형 마수다.
마경에 서식하는 마수로 백야의 모험가 중에서도 리브레의 향기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하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듯 쳐다보는 양휘철의 눈길에 클로에가 미간을 좁혔다.
“제가 고작 리브레의 환각에 당할 것처럼 보이세요? 그건 확실히 드라이어드였어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양휘철이 시선을 돌려 조사단의 리더였던 하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클로에의 말이 맞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드라이어드였습니다.”
“제가 봐도 드라이어드였어요. 지부장.”
“으음.”
이성적인 하태준과 나탈리아마저 클로에의 의견에 동의하자 양휘철은 곤란함에 뺨을 긁적였다.
이건 양휘철 그가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네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상부에다가 보고했다간 그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소녀가 드라이어드라는 증거는 어디 있나?”
네 사람이 가져온 사진을 팔랑이며 양휘철이 되물었다.
거기에는 영락없는 ‘인간 소녀’로만 보이는 아나스타샤가 찍혀져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아나스타샤가 드라이어드는 커녕 정령이라는 사실마저 입증할 수가 없던 것이다.
“정령 마법을 쓰는 것을 저희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보기만 했다는 거군.”
“······예.”
혀를 찬 양휘철이 고개를 내저었다.
물증이 없는 이상 이 보고서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외에도 조사단이 가져온 보고서는 하나같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트윈헤드 오우거는 서쪽으로 계속해서 자리를 옮기는 중이고 다크우드 숲은 아예 분포가 바뀌었단다. 그밖에 마수들의 위치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이건 다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
양휘철은 다시 한번 마경을 조사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에는 양휘철, 그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
백야의 2차 조사단은 순식간에 꾸려졌다.
개척지의 지부장인 양휘철을 비롯해, 마경 전문 모험가 5인, 1차 조사팀이었던 하태준을 비롯한 4명까지.
총 10명으로 처음에 비해서는 많은 인원이었다.
다른 개척길드의 눈에 띄면 안 되었기에 조사팀은 빠르게 처음 드라이어드를 만났던 장소로 이동했다.
“정말이군. 다크우드 숲이 벌써 나오다니.”
양휘철은 정말 다크우드숲의 위치가 바뀌었음에 놀라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은 머지않아 신비로운 금발의 소녀와 만날 수 있었다.
“·········우연. ·········또 만났네.”
“······.”
우연이라기보단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설마 정령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리는 없었기에 양휘철은 그 어색한 느낌을 기분 탓이라 여기며 떨쳐냈다.
“당신이 숲의 관리자입니까?”
끄덕끄덕.
“고위정령이 확실합니다. 정령 감지기가 강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부관 마법사가 확인시켜주지 않더라도 양휘철은 알 수 있었다.
소녀의 외양은 누가 보더라도 ‘숲의 요정’ 그 자체였으니까.
인간보다 길고 뾰족한 귀.
머리에 꽂힌 갓, 나무에서 뽑은 것만 같은 생생한 나뭇잎.
몸에서 퍼져나오는 신비로운 빛.
양휘철은 소녀에게서 느껴질 리 없는 숲의 내음을 느꼈다.
상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숲의 정령, 드라이어드였다.
“살다 살다 드라이어드를 보게 되는군.”
그의 얼굴에 처음 1차 조사팀이 보였던 것과 같은 커다란 감동이 맺혔다.
“오오오.”
“드, 드라이어드!”
모험가들이 소녀를 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때, 1차조사팀에 속했던 정령사 클로에가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나스타샤님, 어째 귀가 더 길어지신 것 같아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클로에는 왠지 아나스타샤가 당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
“그, 그렇군요.”
클로에는 살짝 이상함을 느꼈지만 스스로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보지 못한 생생한 나뭇잎과, 휘광처럼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은 처음과 달랐지만, 저게 아나스타샤의 ‘본모습’이리라.
그때, 누군가 아나스타샤의 옆에 쌓여있는 마수의 사체 더미를 발견하곤 놀라서 말했다.
“고위마수의 사체가 이렇게나 많이······!”
아니, 그건 발견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마치 보란 듯이 아나스타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쌓여 있었다.
“·········아, 봤네. ·········내가 사냥한 마수.”
아나스타샤가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한다 느껴지는 건 분명 기분 탓이리라.
그때, 지부장 양휘철이 마수의 사체들을 보며 물었다.
“아나스타샤님, 정리하시기 곤란하면 저희가 사체를 치워드려도 되겠습니까?”
클로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양휘철은 치워준다 말하고 있었으나 실은 가져가서 팔려는 속셈인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사례 필요함.”
“사례를 말입니까?”
양휘철이 당황해 되물었다.
정령이 사례를 요구하는 것을 그는 생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아나스타샤님은 사례를 받으세요. 저희를 구해주셨을 때 저는 정령석을 드렸어요.”
클로에의 말에 아나스타샤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대신 말해줘서 고맙다는 얼굴에 클로에가 헤헤 웃었다.
“사례라.”
양휘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수의 사체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설마 대가를 지불해야 할 줄이야.
“어떤 것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동등한 대가.”
“이거면 되겠습니까?”
양휘철이 내민 것은 상급 마력석 한 덩어리였다. 그때, 아나스타샤의 귀에 꽂힌 자그마한 이어폰으로 이해솔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 저어.
도리도리.
“그럼 두 덩이면······”
도리도리.
“·········동등한 대가여야만 함.”
양휘철이 당황하자, 옆에 서 있던 정령사가 설명해주었다.
“지부장, 최상급 정령은 인간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그렇군.”
후우. 양휘철은 아쉬워하면서 아공간포켓에 보관 중이던 최상급 마력석을 꺼냈다.
“이거면 되겠지?”
양휘철이 보았을 때 저 부산물은 최상급 마력석으로 매입이 가능했다.
물론 되팔면 이득이 많이 남기야 하겠지만, 평소에도 그런 거래를 자주 해왔기에 양심에 찔릴 것은 없었다.
진위를 파악하는 드라이어드도 여기까지는 알 수 없으리라.
그런데.
도리도리.
“·········방금 마력석 두 개도 함께.”
“메, 메더슨, 최상급 정령은 생각까지 읽는 건가?”
“저, 저도 잘은······”
이름이 불린 정령사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사실 최상급 정령에 대해서는 인간이 모르는 정보가 더 많아서······”
“으음.”
잠시 망설이던 양휘철은 결국 아나스타샤가 요구하는 대로 마력석을 내어주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되팔면 이익은 챙길 수 있었다.
마경의 마수는 그 희소가치 덕에 일반 마수보다 시세가 더욱 높았으니까.
“아나스타샤님, 다음에도 저희에게 마수 사체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가만 확실하면.”
“오, 그렇군요.”
반가운 소리에 조사단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그날, 모험가 길드 백야의 상층부에 ‘숲의 정령 드라이어드와의 거래’가 기밀사항으로 보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