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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꿀빱니다-113화 (114/226)

§ 113화

미궁을 빠져나오는 건 쉬웠다.

뒤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이들과 달리 우리는 일레인의 1회용 솜인형들의 희생 아래 미궁을 일직선처럼 이동했으니까.

그렇게 갈래길만 자그마치 6번이나 지나치고, 마수 8마리를 사냥하고서야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거, 혼자 빠져나왔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아무튼, 드디어 나오게 된 밖은 거대한 분지였다. 산이 둥글고 완만하게 들어간 지대.

“어머, 빨리 나오셨네요.”

미궁 밖으로 나오자 우리를 맞이하는 그레이스. 응? 그레이스?

“···어떻게 벌써 나와계시는 거죠?”

“각 지형에는 <긴급 워프진>이 설치되어 있답니다. 만에 하나 미궁에서 고립되어버리면 큰일이잖아요?”

“아하. 고립되어 계셨던 건가요?”

“네, 제가 길치거든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길치라면 애초에 미궁 스타트지점까지 걸어들어온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넘어가자.

“이 언덕을 내려가면 나오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시험장이 나올 거예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용건을 마치자 다시 긴급워프진을 타고 사라지는 그레이스.

말이 긴급 워프진이지, 저건 그냥 편의시설이다. 그레이스는 걷는 걸 싫어하나 보다.

‘엄청 편해 보이긴 하네.’

마경에도 저런 걸 하나 설치할까 하는 고민을 하며 언덕을 내려갈 때였다.

“어? 세연이다. 한세여언!”

멀리서 한세연을 발견한 은가예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한세연은 시험관으로 보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관이 어딘가 벙찐 표정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길래 저런 표정이 되지?

궁금함에 한세연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지만 수수께끼 같은 말만이 돌아왔다.

“미래 이야기.”

“미래이야기?”

“응.”

나긋하게 웃는 한세연. 더 물어보았자 답해줄 것 같지 않았기에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바로 길목을 지키던 시험관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으니까.

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사방을 점거하고 타오르는 불길들.

그것들이 일제히 날아들었지만, 9자루의 비도가 지키는 내 몸에 닿지는 못했다.

비도에 요격당하자,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시험.

“보구에 너무 의존하는 습관은 버리는 게 좋겠군.”

“예.”

시험관의 평가는 박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보구빨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실이기도 했고.

“이번엔 내 차례인가?”

나 다음으로 나선 은가예는 대검을 묵직하게 휘둘러 다가드는 불길들을 전부 격추해버렸다.

그런 은가예는 마경에 가기 전과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던 해남은가의 가전검법을 고집하던 이전과 다르게 불길들을 격추하는 은가예의 검에서는 형식 따위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좋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가예는 형식에 얽메이기보단 자유롭게 검을 휘두르는 편이 어울렸다.

게임에서 가문의 검법을 벗어던진 은가예는 자유로움을 추구했었으니까.

‘저렇게까지 무식하게 대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던 것 같긴 한데.’

‘무희’ 은가예는 자유롭되 화려한 검술을 사용했다. 저렇게 무식하지는 않았다.

그 괴리감에서 소피아의 그림자가 짙게 보이긴 했지만 뭐······ 괜찮겠지?

당장 본인이 홀가분한 모습이니 좋은 변화일 거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뒤이어 다가온 일레인의 차례.

상대에게 저주를 걸지 않는 일레인이 과연 불길을 어떻게 막아낼지 궁금해서 지켜보자니, 일레인은 안고 있던 곰 인형을 땅에 내려놓았다.

“티니, 부탁해.”

드디어 곰인형도 버리는 건가.

티니에게 모든 걸 맡긴 채 본인은 뒤로 물러나서 구경하는 일레인.

저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시험관이 뭐라 안 하는 걸 보니 괜찮은가 보다.

나도 다음에는 아나스타샤를······

음, 그건 좀 아니지.

나쁜 생각을 털어버리며 관전을 하자니, 곰인형이 어째 아까보다 비대해져 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은가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곰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저주술식, 광란을 걸었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어 보이는 일레인.

‘광란이라.’

광란은 인위적인 마력의 폭주다.

광란이 걸린 대상은 이성이 날아가지만, 통상보다 훨씬 강해진다.

하지만 애초에 ‘이성’이 없는 대상인 인형이라면 광란의 단점도 보완이 가능했다.

그리고 일레인의 곰인형은 일레인이 지닌 마력의 대부분이 담긴 일종의 ‘골렘’이자, ‘보구’였다.

일레인을 지키는 가디언.

광란이 추가된 녀석은 괴물이 따로 없었다.

퍼버버벙!

‘무섭네.’

마력을 발산하며 마구잡이로 앞발을 휘두르는 곰인형.

불길을 모두 터트린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작아지더니 얌전히 일레인의 가슴에 안겼다.

이런 애를 체력이 딸린다는 이유로 조기 퇴학시키려던 아카데미도 참 분별력 없네.

하긴, 본체가 약하면 전장에서 반쪽짜리인 건 맞긴 했지만.

아무튼, 모두 시험을 통과한 우리는 오솔길을 따라 시험장에 도착했다.

숲길 사이로 나타나는 높다란 고층 건물.

“이게 시험장이야?”

은가예가 놀라 중얼거린다. 그도 그럴 게 건물은 시험장이라기보다는 고급 호텔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이곳은 호텔이 맞았다.

숙박만을 위한 시설이고, 시험장은 이 산간분지 전체였으니까.

“다들 오셨네요.”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아멜리아가 로비의 테이블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와, 빨리왔네. 언제 온 거야?”

미궁을 최단시간에 돌파했기에 단연 우리가 1등이라고 생각했던 은가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아멜리아는 마침 잘 물어 봐주었다는 듯 흐흥 웃으며 대답했다.

“호문을 통과하고 10분쯤 지났을 때예요.”

“······.”

저거 반칙 아니야?

누군 미궁에 떨어졌는데, 편한 곳에 떨어져서 걸어왔나 보네.

그나저나.

나는 아멜리아의 커피에서 김이 나는 것을 발견했다.

‘쟤 뜨거운 거 못 마시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몰래 호호- 불어가며 홀짝이고만 있는 게 내 눈에 보였다.

중간에 혀를 살짝살짝 내미는데 뜨거워서 식히는 거다.

쯧, 아이스티나 시키지.

내심 혀를 차는데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어머, 아멜리아. 왜 마시지도 못하는 원두커피를 마시고 있는 건가요?”

호텔의 안에서 걸어나온 그레이스였다.

저 사람은 또 언제 온 거지. 요괴인가.

“어, 언니! 무슨······”

당황한 아멜리아가 부인하기도 전에 그레이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멜리아는 딸기우유밖에 안 마시잖아요.”

“······.”

아, 끝났네.

아멜리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어라? 아직도 비밀이었나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그레이스가 입가를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네 분. 카운터는 이쪽이랍니다.”

그레이스는 화제를 돌리려는지 우리를 붙잡고 카운터로 도망갔다.

그렇게 그레이스에게 끌려간 우리는 601호실부터 차례로 키카드를 받았다.

특이하게도 키카드는 목에 걸수 있게끔 줄이 매달려 있었다.

“키카드는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품에서 떼어놓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의 말에 은가예가 갸웃거렸다.

“그건 왜죠?”

“시험이 시작되면 아시게 될 거예요.”

아리송한 답을 하며 그레이스가 나직이 웃어 보였다.

“객실은 직원에게 안내받으시면 돼요. 제가 안내해드리고 싶지만 일이 바빠서 이만.”

뒤로 갈수록 말이 빨라지던 그레이스는 도망치듯 후다닥 사라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았던 곳을 보니 아멜리아가 씩씩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

본격적인 시험의 시작은 내일부터다.

그래서인지, 시험의 참가자들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이번에 중급 초인자격을 따기 위해 모인 사람의 수는 무려 500명.

시간 내에 시험장에 도착한 수가 300명가량이니, 200명 정도가 걸러졌다고 보면 된다.

그 200명의 탈락자 중 반절이 미궁에서 발생했다고 하니 일레인에게는 고맙다 해야겠다.

참고로 아멜리아는 딸기우유의 충격 탓인지 토라졌다.

사람들 앞이라면 메론빵 한점도 우아하게 섭취하는 아가씨인 아멜리아에게 그레이스의 만행은 실로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멜리아는 지금도 주변을 살피며 그레이스를 찾고 있다.

오늘 중에는 찾지 못할 거다. 직원에게 얼핏 듣기로 그레이스는 조기퇴근을 했다고 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왜 불러낸 거냐, 이해솔.”

니콜라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카데미의 생도 20명은 내 요청으로 인해 모두 호텔의 로비에 모여있었다.

다른 사람이 불렀다면 나오지도 않았을 아이들이 내 말 한마디에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다.

이게 학년 수석의 위엄인가.

내심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니콜라이와 생도들을 슥 둘러보며 물었다.

“왜 불렀냐고? 너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냐?”

합죽이가 된 채 눈만 깜빡이는 생도들.

그 순진한 반응에 내가 혀를 찼다.

“잘 생각해봐. 시험은 내일부터 시작이지. 그런데 왜 굳이 하루 전에 응시자들을 모아놨겠어?”

“모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맞아.”

니콜라이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시험장까지 오면서 느꼈겠지만 협회는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아. 이 호텔까지 오는 것만 해도 힘들었지.”

“맞아. 감각이 차단당해서 제시간에 도착 못할 뻔했어.”

“나는 늪에서 빠져서······”

각자의 고난을 이야기하며 공감하는 생도들.

나야 힘들지 않았기에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그런 친절하지 않은 협회에서 우리에게 숙박시설에서 편하게 자게 시킨다? 이상하지 않아?”

“으음.”

“듣고 보니······”

그때, 내 시선을 받은 한세연이 목에 걸어두었던 키카드를 빼서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백지의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아니, 백지는 아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군.”

“어. 우리 위치지.”

백지의 한 부분에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건물의 그림과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확인한 바로 이 키카드를 들고 이동할 때마다 하얗게 칠해진 부분이 지도로 바뀌어.”

확인한 건 아니고, 게임의 내용이 그랬다.

“내 예상으로 이 산간분지 전체가 백지의 영역이야. 우리 모두가 움직여서 밝혀도 하루 안에 밝히기는 어렵지.”

“정보전이란 말이군.”

“맞아. 지도를 가장 많이 밝히고 시작하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거지.”

“서로가 밝힌 지도를 공유하는 것도 가능할까?”

천우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그것 때문에 너희를 불러 모은 거니까.”

내가 한세연의 키카드에 내 키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한세연의 키카드에 있던 정보가 갱신되며 지도에 오솔길이 표시되었다.

“서로 흩어져서 지도를 밝혀.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건 정보는 많은 쪽이 좋아 보이니까.”

이번 시험의 내용까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초인시험의 내용은 랜덤하게 적용되니까.

하지만 유리한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이 지도를 미리 밝혀놓는 게 필수였다.

“이견없지? 그럼 조사장소를 정하자.”

내 말에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디를 조사할지를 정하고는 호텔 밖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만 빼고.

“파랑아.”

“까악-”

어깨에서 파랑이가 튀어나왔다.

한참 꿀잠을 자고 있었는지 나오기 무섭게 부리를 쩌억 벌리며 하품을 하는 파랑이.

“어이구, 잘 잤어?”

“까악!”

이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밥 달라며 소리친다.

나는 그런 파랑이의 목에 키카드를 걸어주었다.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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