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계약의 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잿빛의 기운.
기력과 마기가 섞인 그 정체불명의 기운은 나와 소피아가 계약을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충족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피아도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는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솔님은 인간이 아니십니까?”
“불만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당치도 않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어 보이는 소피아.
픽 웃은 나는 여전히 잿빛을 뿌리고 있는 계약진을 보며 눈을 가라앉혔다.
본래라면 내가 ‘하프’가 되었다고 해서 계약의 조건은 성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프라 해도 어디까지나 반절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소피아와 계약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플레이어라서인가.’
이 계약의 빛은 세계가 나를 이질적인 존재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그렇지 않은 이상 지금의 계약이 성립될 수는 없었으니까.
당장 오거스트만 해도 인간이라는 뿌리를 져버리지 않았기에 계약을 흉내냈을 뿐, 진정한 의미의 계약이라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데몬스폰과 오거스트 사이에 이어진 얄팍한 선을 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소피아씨.”
“예, 계약하겠습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아니, 애초에 계약으로 인해 벌어질 변화에 대해서 하나도 설명을 하지 않았다.
계약을 나누면 어떤 리스크가 존재하고 무엇이 변하게 될지 등.
그런 설명도 듣지 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제 목숨은 이미 해솔님에게 한 번 구해졌습니다. 그날 구해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오거스트에게 가느니 죽음을 택했을 겁니다.”
“······.”
“그리고 해솔님이 제게 좋지 못한 계약을 하실 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소피아.
저렇게 쳐다보면 나쁜 짓을 하려다가도 못하겠다. 내가 그렇게까지 양심이 없는 인간은 아니어서.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고민 좀 하라고요.”
“고민을 안 하는 게 제 장점입니다.”
소피아가 씨익 웃어 보였다.
···진짜 단점 같은 장점이네.
헛웃음을 흘린 내가 사실대로 말했다.
“오거스트와 같은 권속계약을 하려 합니다.”
“예.”
스스로 말했던 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소피아.
전적으로 나를 믿는 게 느껴졌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나는 왜 권속계약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대등한 계약을 나눌 경우 서로의 힘을 공유할 뿐, 기운이 섞이지 않습니다. 소피아씨는 이 소환진을 비추는 잿빛의 기운이 아닌 마기를 계속 사용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소피아를 비롯한 데몬스폰들은 마인이라는 꼬리표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제가 소피아씨의 권속이 되어도 문제입니다. 힘을 부여받는 건 권속계약에 묶이는 존재이지, 주인이 아니니까요.”
권속계약은 일방적으로 주인이 권속에게 자신의 기운을 부여해줌으로써 성립되는 계약이다.
데몬스폰 모두에게서 마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을 권속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유는 확실했으나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형편 좋은 변명으로 들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이 길만큼 데몬스폰을 구할 확실한 방법은 없었으니까.
마기를 사용하는 이상 그들에게 씌워진 색안경은 절대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다 들으셨죠?”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럼 시작하죠.”
“예.”
계약진에 올라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앗!
계약진에서 뿜어져 나온 잿빛의 기운이 소피아를 휘감았다.
내 몸에서 기력이 흘러나와 맞닿은 손을 통해 소피아에게 흘러들기 시작했다.
처음 계약진에 주입했던 기력은 한참이나 모자랐는지 계속해서 소피아에게 흡수되어가는 기력.
그러던 어느 순간 소피아에게 족쇄처럼 이어져 있던 오거스트의 시꺼먼 지배의 선이 투둑, 끊어져 나갔다.
이어서 내 영혼에서 그보다 훨씬 굵고 단단한 줄이 흘러나와 소피아의 영혼에 이어졌다.
그것은 서로의 영혼을 이어주는 계약의 선이었다.
계약의 선이 이어진 후로도 끝을 모르고 흘러 들어가던 기력은 무려 절반이 넘어가는 양이 사라지고서야 멈추었다.
“후우.”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계약진에서 내려왔다.
소피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잿빛의 기운에 휘감겨 있었다.
천천히 스며드는 기운을 보자니, 끝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이런 건가.”
나는 소피아와 나 사이에 이어져 있는 계약의 선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고작 줄이 하나 이어졌을 뿐인데, 소피아의 존재가 이전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나 파랑이한테서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예상 밖으로 기력이 많이 소진되어버렸다.
“이거, 설마 전부 다 이렇게 기력을 많이 가져가는 건가.”
그러면 완전 헬인데.
마경에 거주하는 데몬스폰의 숫자만 무려 60명이다.
그들과 일일이 다 이렇게 계약을 맺어야 된다면 한 달이 걸려도 모자랐다.
소피아 하나만 했는데도 뻗어버릴 지경이었으니까.
“뭐, 천천히 해도 상관은 없지만.”
잿빛에 휘감긴 소피아를 지켜보던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조용히 방을 나왔다.
***
······마경에 완공된 대저택의 어느 작은 침실.
나는 방문에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을 걸어놓곤 뻗어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다음날 오전.
“흐아함-”
기지개를 쭉피며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세안을 하곤, 대충 옷을 걸쳐 입곤 밖으로 나왔다.
“깨어나셨습니까.”
방문을 열자 나를 맞이하는 건강미 넘쳐 보이는 미녀.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내가 물었다.
“···소피아씨?”
“예. 소피아입니다.”
방긋 웃으며 말하는 소피아. 나는 눈을 비비곤 다시 쳐다보았다.
“···어, 음. 많이 변하셨네요?”
“예, 이전보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나는 창가의 햇살에 비치는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흉터가 있던 피부는 하얘지고, 머릿결도 고와졌다. 마기로 인해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던 인상도 밝아졌다.
음, 이건 뭐랄까.
“더 이뻐지셨는데요?”
“정말입니까?”
“예.”
아닌 게 아니라, 원래도 건강미 넘치던 소피아가 인상까지 밝아지자 그 변화가 대단했던 것이다.
“그렇군요, 저는 이뻐졌군요.”
내 긍정에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는 소피아.
처음 하는 계약이었기에 잘못되지 않은 것에 내심 안심하면서 나는 궁금하던 점을 물었다.
“새로 얻은 기운은 써 보셨어요?”
“물론입니다. 해솔님이 주신 이 기운은 정말 놀랍더군요.”
소피아의 오른손에 회색의 기운이 맺힌다.
“마력만큼 안정적이면서 위력은 마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호오, 그 정도예요?”
나는 눈을 빛냈다.
마기는 마력보다 위력이 강하지만, 안정적이지 않기에 그 제어가 까다롭다.
그 정교하지 못한 부분이 마인의 약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력은 그대로이면서 마력만큼 안정적이라면 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피아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본인의 말대로 육체도 날렵해지고, 기운도 대폭 늘어난 듯했으니까.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알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는 변화였다.
===
[권속, 소피아 포코르니의 종족이 데몬스폰에서 데몬으로 상향조정됩니다.]
===
‘데몬이라.’
처음 듣는 종족 명이다.
이것도 게임에서의 변화라고 봐야 될까.
아무튼.
“오랜만에 함께 사냥하러 가죠.”
“다른 이들도 불러올까요?”
“아니요, 오늘은 제가 아니라 소피아의 달라진 실력을 확인하려는 거니까 다른 이들은 괜찮습니다.”
“예, 어디로 모실까요?”
“음, 가고일 둥지부터 가보죠.”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함께 사냥하는 것에 신이 났는지 날 듯이 걸음을 옮기는 소피아.
저 활기 넘치는 분위기는 하나도 변하지가 않았네. 아니, 전보다 의욕이 더 늘어난 것 같기도······
뭐, 소피아가 좋다니, 그걸로 된 거겠지.
쓴웃음을 지어 보인 나는 소피아의 뒤를 따랐다.
***
나는 이전까지의 소피아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상격 초인에서도 중간에 속하는 정도. 위력으로만 따지자면 물론 그보다 위겠지만, 마기 특유의 제어가 어려운 특성으로 인해 많이 쳐줘야 상격에서 중간 수준인 거다.
그래서 내심 이번에는 한 단계 더 성장했으리라 기대하고 움직인 사냥이었다.
그런데.
“······미쳤네.”
나는 소피아의 사냥을 보며 내 눈을 의심했다.
퍼억─! 퍼억─!
대검을 움직이는 족족 가고일이 죽어 나간다. 하늘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
무릎을 굽힌 소피아가 뛰어오른다. 아니, 날아올랐다. 탄탄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점프력.
가고일보다 빠르게 뛰어오른 소피아가 대검으로 가고일의 등을 가른다.
퍼억─!
원샷 원킬이었다.
혀를 내두르며 소피아의 학살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부리를 아래로 향한 가고일이 나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내가 약점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때, 부메랑처럼 날아온 대검이 회전하면서 가고일의 몸통을 가르고 돌아간다.
“끼아악─!”
괴성을 지르며 추락해 땅에 처박히는 가고일.
“어디 하급한 마수 따위가!”
녀석을 발로 차 저 멀리 날려버린 소피아가 내게 달려와 물었다.
“해솔님! 괜찮으신가요!?”
“···어, 네. 덕분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본 광경을 떠올렸다.
대검을 부메랑처럼 날려서 가고일을 벤다고?
‘저거 4성 마수인데······’
내가 대체 무슨 괴물을 탄생시킨 거지.
가고일을 고블린 베듯 베어버리는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냥 한 단계만 실력이 상승해도 박수를 쳐줄 생각이었는데, 이건 단계 수준이 아니었다.
오거스트의 간부에 비교하자면, 마릴은 일단 상대도 안 될 것 같았고, 그 괴물 같던 노집사와 비교해 봐도 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잿빛 기운이 마기보다 훨씬 안정적인 기운이라는 것까지 감안하고 보자면 어쩌면 유리할 지도 몰랐다.
내가 보고 판단하기로 잿빛 기운은 마력보다도 안정감이 높은 듯했으니까.
‘기력이 바탕이라서 그런 건가.’
부동의 각인 덕에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내가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소피아씨.”
“예, 해솔님. 가고일을 몰살시킬까요?”
“아니요, 몰살은 안하셔도 되고, 오늘 사냥은 여기까지 하죠.”
“예? 이제 시작인데······”
“괜찮아요, 소피아씨가 강하다는 건 충분히 잘 봤습니다.”
더 봤다간 근방 마수들의 씨가 마를 지도 몰랐다.
홉고블린, 그렘린, 트롤 등 오늘의 코스를 읊으며 아쉬움을 내보이는 걸 보면 분명 그렇게 될 거다.
아쉬워하면서도 내 강하다는 칭찬 한마디에 만족스러워하는 소피아.
소박한지, 스케일이 큰지 분간이 안 갔지만······
‘보기 좋은 건 확실하네.’
나까지 활기가 차오르는 소피아의 분위기에 피식 웃은 내가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죠.”
“예, 해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