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소피아와의 마수사냥에서 돌아온 후로 나는 데몬스폰들과 권속계약에 들어갔다.
물론 무리하게 시키는 건 아니었다. 소피아 때처럼 계약에 대한 내용을 잘 숙지시키고, 철저히 본인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거부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내 의문에 백건우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기를 없애고 자유를 주신다는데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거스트와 같은 권속계약인데도요?”
오거스트에게서 권속계약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달은 언데몬이다.
그런 그들이 내 권속계약을 너무도 간단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하, 해솔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간단히 내린 결정은 아닙니다.”
백건우가 뺨을 긁적였다.
“저도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해솔님은 저희에게 무리한 걸 강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이유에서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작 그런 걸로요?”
“그 고작이 저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겁니다.”
“······.”
“그 고작이라는 걸 누리지 못해 저희는 지금껏 숨어 지냈으니까요. 그리고.”
진지한 표정이던 백건우가 풀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저희를 도와주시는 해솔님같은 사람을 누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겠습니까.”
“백 아저씨 말대로입니다. 해솔님.”
방긋 웃어 보이는 소피아. 나는 야외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백건우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거나 긍정의 말을 던진다.
“음.”
처음부터 이러려는 속셈으로 도와준 거긴 했으나 설마 이 정도로 잘 먹혀들어 갈 줄이야.
얼떨떨하긴 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내 입꼬리가 올라가자 아렌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마음에 안들지만 우린 너에게 모든 걸 맡겼다. 이본느님이 허락했다면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이본느가 죽으라면 죽을 거냐.”
“당연히 그럴 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아렌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말했다.
“이본느님이 이유 없이 죽으라 할 리가 없지않냐.”
···이게 미친놈인가.
“아렌은 바보라서 솔직하지 못합니다. 해솔님이 이해해주십시오.”
“그래야겠네요.”
소피아와 나의 대화에 아렌의 피부가 마수처럼 변했다.
“···소피아.”
“뭔가요, 아렌. 또 맞고 싶은 건가요?”
당당하게 나오는 소피아. 아렌이 인상을 팍 구겼다.
“고작 한 번 이긴 거 가지고······”
“원한다면 저는 지금 다시 싸워도 좋습니다만.”
“······.”
소피아가 주먹을 쥐었다 피자 아렌이 꿀 먹은 병아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저 주먹에 전날 처맞고 날아갔으니.
소피아의 괴력에는 안 된다는 걸 아렌도 인지한 모양이었다.
참고로 얼핏 보면 사이가 안 좋아 보이지만, 저 둘은 친남매 같은 관계다.
소피아가 친누나는 아니라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다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아렌도 겉으론 툴툴거리면서도 소피아에게는 은근히 져주는 모양새를 자주 보였다.
안 져주더라도 패대기를 당하겠지만···
쓴웃음을 지은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튼 권속계약에 다들 찬성한다는 거죠?”
“예, 물론입니다.”
백건우의 대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데몬스폰 전원이 나와 권속계약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
나는 소피아의 경험으로 미루어, 권속계약에 어마어마한 기력이 소모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다른 이들은 기력을 그렇게 많이 잡아먹지 않았다. 하루에 다섯 명을 상대해도 문제없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것도 상대에 따라 달랐다.
실력과 잠재력이 클수록 권속계약에 필요한 기력의 양도 많아졌던 것이다.
니엘과의 권속계약을 통해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얘 한 명 하고 그날은 바로 뻗어버렸으니까.
참고로 권속계약을 했다고 해도 사냥을 통한 경험치를 나눠 받는 일은 없다.
현실이 되어버린 이터니티에서는 막타를 먹어야 경험치가 들어왔으니까.
뭐, 굳이 경험치를 떠나서 권속이 된 이들의 무력 자체가 어마어마했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지만.
파랑이와 아나스타샤의 경우는 나와 융합을 한 운명공동체이기에 예외 취급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내 요즘 일상은 권속계약을 하고 쉬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기, 세연아.”
“응?”
“손 좀 놓아주면 안 될까.”
“놓아주면 또 무리할 거잖아.”
“무리는 안 한 거 같은데.”
현재 나는 한세연에게 손을 붙들려 벤치에서 강제로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5명을 줄 세워 놓고 계약을 하다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해솔이는 귀찮은 척만 하고 정작 누구보다 무리하는 걸.”
“내가?”
“응.”
한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피로가 쌓여 있는데 모르고 있잖아.”
“무슨······”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육체는 아무렇지 않다.
정신도 멀쩡했다.
다만··· 영혼이 지쳐있었다.
하긴, 계약이란 결코 가벼운 행위가 아니었다.
영혼과 영혼을 잇는 의식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게 되니까.
계약의 선을 이음에 따라 소모되는 것은 바로 내 영혼.
그 소모된 영혼이 채 복구되기도 전에 연달아 계약을 진행했으니 무리가 오는 것도 당연했다.
보통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정신이 피폐해지기 마련이지만, 부동의 각인으로 인해 정신이 유지되는 나이다 보니, 영혼에 피로가 쌓였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계약의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니까.”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고 있었구나.
피식 웃은 나는 한세연의 어깨에 기대버렸다.
“아, 쉬어야겠다.”
자각을 하니 신기하리 만치 몸이 나른해졌다.
“방에 안 들어가도 돼?”
“어, 여기가 더 편해.”
계속 있고 싶을 정도로.
***
내가 쉬고 있는 한편, 아나스타샤는 마수 사체의 거래에 나와 있었다.
누군가 이어폰으로 지시를 내려줘야 했던 이전과 달리 ‘아멜리아의 특훈’으로 금전감각에 익숙해진 최근에는 아나스타샤 혼자 거래를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좀 많이 잡으셨군요?”
백야의 지부장, 양휘철이 산처럼 쌓인 마수의 사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나스타샤가 사체의 탑을 흘낏 돌아보곤 말했다.
“·········앞으로도 많이 잡을 예정.”
“그, 그렇습니까.”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인 아나스타샤가 양휘철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초인시험에 보안역으로 참여했던 별의 성좌의 간부, 이네시아 로마노와 그녀의 원정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크흠.”
양휘철이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얼마 전까지 그들이 드라이어드와의 거래를 독점하고 있었건만, 어디서 냄새를 맡고 왔는지 별의 성좌가 끼어든 것이다.
'대체 어떤 새끼가······'
백야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게 분명했다. 그로 인해 양휘철은 상부에서 매일같이 욕을 바가지로 퍼먹고 있는 중이었다.
독점거래가 한순간에 길드 간의 경매로 바뀌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네시아는 양휘철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나스타샤를 꼬시기 바빴으니까.
“드라이어드님, 드라이어드님. 역시 저와 계약할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삼시세끼 정령석 제공, 근무 없음. 어때요?”
정령석을 섭취한 정령은 성장한다.
물론 삼시세끼이니만큼 질 좋은 정령석은 아니었으나 정령이 혹할 만한 조건임에는 틀림 없었다.
하지만 파랑이의 엉덩이에서 나오는 게 정령석이라는 사실을 아는 아나스타샤에게는 역효과였다.
“·········지지. 더러운 거 안 먹음. 그보다 제시.”
치. 입술을 삐죽인 이네시아가 마수의 사체를 보곤 말했다.
“흐음~ 상급 마력석 30개면 어떨까요?”
아나스타샤는 아멜리아가 알려준 시세에 따라 짤막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에 드는 제안. 하지만 괜찮은지 묻고 싶음.”
아나스타샤가 계산하기로 지금 쌓인 마수의 사체는 마력석 10개면 충분한 양이었다.
그런데 이네시아는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가격을 제시한 것이다.
“어머, 제 걱정까지 해주시다니, 감사해요.”
이네시아가 감동이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아나스타샤는 손이 뻗어진 거리만큼 샤샤샥- 뒤로 물러났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이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마력석 30개로 매입을 하고 싶습니다.”
아나스타샤가 양휘철을 돌아보았다.
“·········그쪽은?”
양휘철이 이네시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라뇨, 정당한 거래지요.”
이네시아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양휘철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이네시아는 매번 이런 식으로 시세의 수배에 달하는 금액을 제시했다.
엄청난 손해가 나는 거래일 테지만 자금력이 넘쳐 나는 별의 성좌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였다.
반면 자금 상황이 좋지 못한 백야, 그것도 일개 개척지부장에 불과한 양휘철은 이네시아가 제시하는 금액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 결과 최근 5번의 거래에서 양휘철은 마수의 사체를 이네시아에게 모조리 빼앗겨버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양휘철이 모를 리 없었다.
경쟁자 밀어내기.
당장이야 손해를 보는 장사일지 몰라도, 백야가 사라지면 이네시아는 마경에서 나는 마수의 사체를 독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양휘철로서는 이네시아를 저지할 수단이 없었다.
자금력에서 이네시아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다음에도 그렇게 웃지는 못할 거다.”
이네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대출이라도 받으시게요? 저한테 대출 받으시면 싼값에 빌려드릴게요. 뭣하면 이자 기한까지 늘려줄 수 있어요.”
으득.
이를 갈아붙인 양휘철이 세차게 등을 돌렸다.
“가자!”
수하들을 데리고 자리를 뜨는 양휘철. 결국 이번 거래에서도 마수의 사체를 차지한 것은 이네시아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다툼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정령인 아나스타샤에게 인간들의 알력은 관심 밖이었으니까.
그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사체를 넘기고 마력석을 받아오는 것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님,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이네시아가 사체를 챙겨 자리를 뜨자 홀로 남은 아나스타샤는 마을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아나스타샤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님!”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조심스레 뛰어오는 사람.
“·········클로에.”
“네! 클로에예요!”
정령사 클로에. 처음 아나스타샤가 조우했던 백야의 조사단에 속한 여자였다.
“그보다 큰일났어요!”
“·········큰일?”
“네, 큰일! 당분간 절대 숲에서 나오지 말아주세요. 백야에서 아나스타샤님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클로에는 지부장이 술에 취해 떠벌린 이야기를 아나스타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조만간 상부에서 강한 초인들이 파견된다는 것. 그들이 아나스타샤를 생포하려 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백야에서는 거래를 포기하고, 아나스타샤를 잡아 마수를 사냥시키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놀란 아나스타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좋은 정보, 고마움.”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 클로에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었다. 이해솔이 자신을 칭찬할 때 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니까. 그러면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좋았다.
“·········잘했음.”
“···어엇.”
설마 아나스타샤가 머리를 쓰다듬어줄지 몰랐던 클로에는 당황하다가 이내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에헤헤, 칭찬 받았다. 아니, 이게 아니지.”
고개를 휘휘 저어 보인 클로에가 경고했다.
“당분간은 반드시 밖에 나오지 말아야 해요, 알았죠?”
“·········고려해보겠음.”
고개를 끄덕인 아나스타샤는 이해솔에게 지침을 묻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
······마경의 마을.
며칠 전 완공된 저택의 넓은 회의실에 탁자를 둘러싸고 언데몬의 수뇌진이 모였다.
안건은 백야의 아나스타샤 포획작전에 대해서였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어둑서니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아렌의 말에 소피아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편히 가게 두어선 안 됩니다.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마경의 무서움을 보여줄 때라 생각합니다.”
아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에서 활동을 자주해온 아렌은 가능하면 길드와 엮이지 않으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피아가 주장한 대로 했다가는 덜미를 잡힐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다들 소피아의 말에 내포된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리라.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저도 소피아씨의 말대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소피아가 아렌을 보며 웃어 보였다. 물론 내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소피아씨 말대로 했다가 잘못되면 협회에 악인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으니까요.”
“······.”
소피아는 입을 꾹 다물었고, 이본느가 나를 쳐다보았다.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숨을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흠칫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여태까지 오거스트를 피해 숨어 지내오던 이들이다.
숨을 필요가 없다는 내 말은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본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오거스트로부터 벗어났으니 이제 숨을 필요는 없겠군요.”
“예, 모습을 드러내기엔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내가 씨익 웃었다.
‘마경의 주민’을 알리기에 이번 백야의 습격은 아주 좋은 판이었으니까.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하자 회의실에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수요일 오전. 아나스타샤를 포획하기 위한 백야의 초인부대가 마경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