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꿀빱니다-126화 (127/226)

§ 126화

백야와의 싸움은 대승(大勝)이었다.

양측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전에 백야의 수뇌부는 모두 패배해버렸고, 소피아가 우렁찬 목소리로 이를 알리며 투항을 권고하자, 전의를 상실한 모험가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버린 것이다.

“후욱, 후욱···. 죽는 줄 알았네.”

은가예가 숨을 몰아쉬며 퍼질러진다.

양손은 다 터지고, 몸은 땀에 푹 젖은 생쥐 꼴이다.

그녀가 상대했던 이현은 기회를 틈타 도망치려다 리디아와 니엘에게 걸려서 결박을 당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후욱, 아나스타샤님, 괜찮으시죠?”

끄덕끄덕.

“·········클로에, 잘 싸웠음.”

아나스타샤에게 머리를 쓰담쓰담받고 여자가 보인다. 저 사람이 그 클로에인가 하는 정령사인가 보다.

백야에서 아나스타샤를 생포할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넘겨준 여자.

백야의 생포단에 조용히 끼어와서는 되려 아나스타샤를 지키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며 분발하던 게 상당히 눈에 띄었다.

우리 편에 서준 거야 고맙긴 하지만 저건 훌륭한 ‘배신자’였으니까. 누가 보면 내가 세작이라도 심어 놓은 줄 알겠다.

반면, 클로에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숲 관리’ 같은 정체성을 벗어난 활동에만 관심을 보이던 아나스타샤가 그 밖에도 미소를 짓다니······

아나스타샤가 첫 친구를 사귀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어머, 벌써 끝났군요.”

그때 뒤늦게 이본느가 돌아왔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두 사람, 김수찬과 독인(毒人) 박도경이 따르고 있었다.

어째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후들거리는데, 처음의 오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온순한 태도였다.

나는 그게 하도 신기해 물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겁을 좀 주었답니다.”

부채로 입을 가리며 후후 작게 웃는 이본느. 그 웃음에 듯 두 사람이 부르르 떨었다.

대체 어떻게 겁을 주면 사람이 저렇게 불쌍해질 수가 있는지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백야의 수뇌진이 내 앞으로 끌려왔다.

개척지부의 지부장, 본단의 모험자. 특임반의 8명 등.

아렌이 데리고 온 아이는 기절해 있었으며,소피아가 상대했던 세 사람(미오, 유진성, 모리츠)은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모습이다.

그런데, 나를 보는 세 사람의 눈에 어째서인지 놀람과 공포가 자리해 있다. 경외도 언뜻 보이는 듯하다.

소피아에게 너무 호되게 당해서 그런가?

의아함에 갸웃거릴 때였다.

쿠웅─!

“마경의 주인 앞이다. 예의를 갖추어라!”

대검을 찍은 소피아의 외침. 몇몇 이들이 허둥거리며 고개를 숙인다. 특히 소피아에게 당한 셋은 더욱 그랬다.

“···저기, 소피아씨.”

“예, 해솔님.”

소피아를 조용히 부른 나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언제 마경의 주인이 되었죠?”

“어둑서니의 영역을 차지했으니, 해솔님은 마경의 주인이십니다.”

“·········.”

소피아는 나를 현대판 마왕으로라도 만들고 싶은 걸까?

그러한 작전이라면 훌륭히 성공했다 할 수 있었다.

소피아의 발언에 특임반은 물론이거니와, 그 소리를 들은 백야의 모험가들마저 동요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잘된 건가?’

나는 백야 모험가들의 영핵을 부수어 그들에게 ‘금제’를 가할 생각이었다.

우리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못하게끔. 가능하면 우리 측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이대로 내보냈다간, 나와 한세연, 아멜리아, 은가예 등이 아카데미 생도라는 것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입막음을 위해 영핵을 부술 필요가 있었는데, 특임반처럼 나보다 강한 상대에게서 영핵을 부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영핵을 볼 수도 없거니와, 설령 보인다 하더라도,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기에 부수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이처럼 나에게 전의를 상실하고 겁을 먹은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들은 내게 정신적으로 굴복을 당한 상태이기에, 영핵이 흐릿하지만 보였으며, 움직임도 굼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핵을 부수고 암시를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전에 나 이상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지만.

“라우라.”

“흐아함- 예. 말씀하세요···”

졸다 왔는지, 눈가를 비비며 대답하는 라우라. 나는 특임반을 가리키며 물었다.

“암시를 걸 수 있죠?”

“간단한 거라면요. 인간은 자의식이 강해서 제 능력이 잘 안 통하거든요···.”

특히 특임반 같이 강한 이들이 상대라면 그조차도 어려울 수 있다며 라우라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우라. 나는 대답 대신 기력을 움직였다.

노린 것은 아까부터 넋이 나간 듯, 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성’이라는 남자였다.

그의 영핵은 움직임이 엄청 둔해져 있어 부수기가 쉬워 보였다.

쩌어엉─!

영핵이 기력에 충돌하자, 영혼의 소음이 유발된다.

“···허억!”

유진성이 입을 벌리며 몸을 퍼덕인다.

명색이 상격초인이라는 건지, 그의 영핵에는 실금만이 갔을 뿐, 단번에 부수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부서질 때까지 가격을 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연달아 영핵을 가격하자, 어느 순간 유진성의 영핵이 콰득! 과자처럼 부수어졌다.

“······.”

영핵의 반절이 손실되고, 유진성의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어라?”

라우라가 눈을 비비더니, 졸음이 달아난 눈을 말똥거린다.

“암시를 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거죠?”

“영혼을 조금 손 봤습니다.”

“역시 마스터!”

“···마스터는 또 누구죠?”

“소피아가 알려줬어요. 마스터라고.”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직함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 우리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던 특임반장 강시우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영혼을······ 손 봤다고?”

사람의 영혼을 손 본다니, 듣도 보도 못한 괴사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나, 유진성의 상태를 보자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어서.”

마경주(魔境主)의 말에 따라 인형처럼 일어나는 몸. 초점이 사라진 눈.

이지를 상실한 그 모습은, 흡사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돋았다.

“이, 이게 무슨···!”

“시, 싫어!”

“으아악-!”

유진성 모리츠, 미오, 이현, 리우트······ 차례차례 이지를 잃어가는 특임반.

모두가 공포에 젖은 눈으로 이를 행하는 ‘마경의 주인’, 이해솔을 바라보았다.

***

······회색의 첨탑이 숲을 이룬 도시, 서울.

그 서울의 한복판. 눈에 띄는 첨탑의 상층부에서 도심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클리튼님, 드라이어드의 생포에 실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특임반이 가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드라이어드에게 당한 겁니까?”

“음, 그게 드라이어드에게 당한 것은 아니고······”

“그럼 별의 성좌겠군요.”

“아닙니다.”

남자, 백야의 3팀장 클리튼이 의아해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에게 당했다는 말입니까?”

“···마경의 주민이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

클리튼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물었다.

“특임반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복귀는 했으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상태가 안 좋다고요?”

“···그게, 평상시에는 멀쩡합니다만, 마경에 관련된 것만 물으면 발작을 일으키며, 마경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다들 돌아오기라도 해서 다행입니다.”

“예. 그리고 밖에 동생 분이 와 계십니다.”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부관이 나가고, 잠시 후 그의 동생이 들어왔다.

“클로에, 네 말이 맞았구나.”

“제가 모두 당했다고 몇 번을 말해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치. 동생 말 좀 믿으라고요.”

“······.”

입을 삐죽이는 클로에. 클리튼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동생인 클로에는 정령사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틀 전에 돌아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느닷없이 특임대가 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경의 주민’이란 이들한테.

단순히 그런 거라면, 조금 놀라고 말았겠지만, 마경의 주민은 마력도 아니고 마기도 아닌 기운을 사용한다고 한다.

수뇌부는 모두 최상격 초인에 버금가며, 클로에 본인은 전설의 정령, 드라이어드와 친구를 맺었다고······

하나만 해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연달아 떠들어 대니 클리튼으로서는 허황된 말로만 들렸다. 어디 꿈이라도 꾸고 온 줄 알았다.

‘그게 진짜였다니······’

놀랍지만, 클로에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라 밝혀졌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중요했다.

현재 백야는 창설 이래 최고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마경의 재앙, ‘검은 뱀’의 토벌에 나섰던 길드장과 수뇌부가 전멸함으로써 의도치 않은 세대 교체가 일어났고, 길드장의 자리는 1년째 공석으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어수선한 길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길드장의 자리가 채워져야 했다.

하지만 클리튼은 길드장의 자리하고는 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길드를 운영할 감각도 있고, 나름 인망도 두터웠으나 실력에서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내심 길드장 자리를 포기하고 있던 찰나, 길드장이 확실시되던 2팀장, 김진혁이 지시한 드라이어드의 포획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월권으로 특임반까지 동원하고도 실패했으니 이는 김진혁의 평가가 뒤흔들릴 만한 엄청난 실책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으나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것이 클리튼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만은.

“좋은 일인지 모르겠구나.”

“분명 잘 될 거예요. 마경의 주인님은 좋은 분이시거든요.”

“마경의 주인이라······”

클리튼은 과연 동생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클리튼의 고민으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때, 세간은 온통 ‘마경의 주인’에 관한 것으로 떠들썩했다.

백야의 특임대가 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너튜브에 하나의 영상이 공개되었다.

쿠웅──!

[이곳은 마경의 땅. 살고 싶다면 무릎을 꿇고 엎드려 투항해라!]

스마트폰 액정 너머. 대검을 찍은 여성이 백야를 위시하며 오연히 선포한다.

─와, 저 누님 누구임? 개지린다.

└마경 주민임.

└ㄴㄴ 내 여자임.

차가운 인상의 남성 앞에 무릎을 꿇은 특임반.

─마경 주인이다.

└강시우가 발렸다고 하더라.

─저 새끼들, 하는 짓 보고 언젠가 저렇게 됄 줄 알았음.

└‘됄’ 이 아니라 ‘될’입니다. 맞춤법부터 똑바로 써주세요.

전투 장면이 담기지 않은 3분 가량의 짤막한 영상은 순식간에 조회수 백만을 기록하며 엄청난 파급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은 온통 마경의 주인에 관한 기사로 쫙 깔려버렸으며, 뉴스에서조차 연일 마경의 주인에 관한 게 화제로 다뤄질 정도였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클리튼이 비워진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협회의 회의장이었다.

협회에서는 ‘마경의 주인’을 특별히 초청했다.

명목은 ‘백야’와의 중재였다.

마경에서 올린 영상으로 인해 백야의 위신은 깎일 대로 깎여나갔다.

백야 내부에서는 마경에 2차 파견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백야를 자중시키고, 원만한 합의를 보게 하기 위해 협회에서 마경의 주인을 부른 것이다.

물론, 공개된 영상의 채널로 초청장만을 보내 놓았기에 마경의 주인이 참석할지 여부에 관해서는 협회측에서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협상을 하지 않으면 백야와 담판을 짓게 되겠지만···.

“안 오는가 보군.”

백야의 2팀장, 김진혁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는 이번 일로 인해 체면을 완전히 구겨버렸고, 길드장의 자리에서 한 발짝 멀어진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마경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다.

“에이,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네요.”

별의 성좌의 2팀장, 이네시아가 입맛을 다신다.

“음.”

위그드라실의 김도진이 침음한다.

“······.”

서하린은 조용히 침묵했으나 시선만큼은 회의장의 문을 향해 있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으나, 마경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게 백야 외의 길드들이 자리한 이유는 순전히 마경의 주인을 구경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째깍─ 째깍─

정처 없이 흘러가는 초침. 팔짱을 끼고 있던 김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흥, 역시 오지 않는 게 겁을 먹은 모양이군. 내가 직접 마경에······”

끼이익──

순간, 나무의 소음이 일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겁을 먹었다고?”

“!”

당당히 들어서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 그 뒤에 대검을 맨 여인.

“······마경의 주인.”

클리튼의 목소리가 남자의 정체를 알렸다.

“어, 내가 마경의 주인이다.”

외모를 변형하고 온 내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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