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그래서, 우리 마경의 주인께서는 인간이 아니시군?”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빙긋 웃어 보이는 차시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음, 그게 말이네. 인간에게는 게이트라는 게 존재한다네. 나는 이걸 마음의 문이라 표현하네만, 각자의 상태에 따라 게이트의 안정성이 다르지.”
차시우가 소진을 바라보며 예시를 든다.
“소진 양처럼 다혈질일 경우 게이트가 불안정해서 이용했을 경우 방금 전처럼 넘어질 뻔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네.”
“사람에 따라 마음을 달리 먹을 뿐입니다.”
정색한 얼굴로 부정하는 소진.
쩌적─!
‘보이지?’ 튀어나온 소진의 입술을 가리키다 옆으로 휙 물러나는 차시우. 물러난 자리로 마력의 서리가 낀다.
······이게 매를 버는 타입이라는 건가.
“이처럼 안정적인 게이트란 건 존재하지 않네. 그건 마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그런데 말이야······”
차시우가 나를 돌아본다.
“도저히 자네의 게이트에서는 불안정을 찾을 수가 없군. 그런데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들어. 그래서 묻지.”
새까만 동공이 내 밑바닥을 훑듯이 응시한다.
“자네는 정말 인간인가?”
그 질문에 내가 무어라 답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손님에게 그런 질문은 대단한 결례입니다. 협회장님.”
“······.”
말을 한 건 소진이었다. 그녀는 대신 사과를 드리겠다며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동작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이는 게 이 비슷한 일이 한두 번 있던 건 아닌듯했다.
그제야 차시우도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말이 지나쳤군.”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차시우의 사과에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차시우가 왜 저러한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부동의 각인.’
오직 <이터니티 검성전기>의 게임 내에서만 존재하던 플레이어의 고유 스킬.
부동의 각인으로 인해 내 정신과 마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설령 흔들리더라도 돌아온다.
차시우는 이 세계에 존재할 리 없는 부동의 각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어쩌면 내가 정령체에 가까운 몸이라는 사실까지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행동은 깃털처럼 가벼워 보일지라도, 그의 통찰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니.
‘조심해야 겠네.’
이 사람이라면 무엇을 알아차려도 전혀 이상할 바가 없었다.
게이트를 오가며 사람의 내면마저 들여다보는, 오마에 버금가는 괴물이 바로 차시우였으니.
그때 차시우가 화제를 돌리듯 소진에게 물었다.
“백야와 마경 간의 소통은 어찌 됐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음.”
이내 회의장 한편에 피투성이로 혼절한 김진혁을 발견한 차시우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꿀꺽.
클리튼이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차시우가 입을 열었다.
“뭐, 네가 잘되었다면 잘 된 거겠지.”
고개를 숙이는 소진. 클리튼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다입니까?”
“그럼 잘 안되었나?”
“잘 되었습니다.”
“그럼 된 거군.”
“······.”
클리튼의 입이 멍하니 벌어진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차시우가 혼절한 김진혁을 문제 삼아 걸고넘어지기라도 했다간 클리튼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던 것이다.
자칫했다간 클리튼이 길드장의 자리를 위해 마경과 손을 잡고 김진혁을 밀어냈다는 이미지로 비춰질 수도 있었으니까.
맞는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포장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클리튼의 입지는 천차만별 변할 터였다.
그래서 클리튼은 차시우에게 해야 할 말만 수십 가지를 생각해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진혁이 혼절한 건을 아예 묻지도 않고 넘어가 버리니, 클리튼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클리튼의 심사를 알았는지, 차시우가 손사래를 쳐 보였다.
“남의 길드 일에 내가 간섭하는 것도 문제지 않나. 귀찮기만 하고.”
귀찮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회의장의 의자에 털썩 앉아버리는 차시우.
······이 사람 엄청 대충이네.
지켜보던 모두의 입도 벌어진다.
적어도 협회장의 입에서 나올만한 발언은 아니었으니까.
“원래 저런 분이시니,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익숙하다는 듯 말하는 소진.
그녀는 차시우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일상처럼 보였다.
여기까지는 게임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시우는 자신이 나서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되도록 간섭을 자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비서 격인 소진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며, 어지간한 일은 듣지 않고 넘어간다.
이 소진이라는 사람이 그만큼 차시우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과만을 보고받은 차시우는 길드의 간부들과 뒤늦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인사를 끝마친 차시우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협회의 허가증을 받고 싶다 들었네.”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에서만 지내지 않을 거라면 초인협회의 허가증은 필수다.
그게 있어야지만, 우리가 마경의 밖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으니까.
마경에 드나들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받는 것은 원래라면 무척이나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협회장을 통해서라면 그 귀찮은 절차들을 모두 생략할 수 있다.
차시우의 성격까지 감안하자면 허가증 발급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건 나가면서 소진 양에게 받아 가게.”
소진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허가증이 어디 주차권인지 아십니까?”
“어렵나?”
“당장 각국에 밀린 순번을 감안하면 1년은 걸립니다.”
마경이란, 이터니티에 존재하는 필드들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다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에는 재앙과 위험등급에 해당하는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으니.
마인들이 크루트의 연구재료를 구하는 곳도 바로 마경이었다.
그랬기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장소이며, 허가증의 발급또한 까다로웠다.
그런데 그 중한 걸 지금 협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가면서 받아가라 하고 있었으니······ 소진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왜, 되잖아?”
방법은 제시하지도 않은 채 마치 요술방망이를 쳐다보듯 물어보는 차시우.
한숨을 포옥 내쉰 소진이 대답했다.
“발급에는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그렇다는군.”
나를 돌아보며 빙긋 미소 지어 보이는 차시우.
마치 떼를 쓰듯 억지로 장난감을 받아내는 아이처럼 보였으나, 차시우는 그 정도로 가볍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허가증을 발급받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마경의 밖을 불법적으로 오갈 것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아예 합법적으로 오가게 함으로써 협회의 감시하에 놓으려는 수작이리라.
그 방법을 강구하는 거야, 순전히 소진의 몫이었지만.
그렇게 협회에서의 볼 일을 모두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였다.
“가기 전에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말해드리지요.”
“고맙네.”
빙긋 웃어 보인 차시우가 돌연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자네는 어느 편인가?”
그 별것 아닌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걸 물으시는 겁니까?”
“마경의 구성원이 모두 데몬스폰인 것은 확인했네. 자네 뒤에 있는 아가씨가 데몬스폰인 것도.”
나름 놀랄만한 발언이었으나, 나를 포함해 회의장에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인터넷에 백야와의 영상을 게재했었다.
이를 통해 각 단체가 우리의 신원을 파악할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 차시우는 협회로서 민감해야 할 사항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데몬스폰이 협회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네. 그래서 묻는 거네. 자네들은 적인가, 아군인가?”
‘이걸 묻기 위해 부른 거였군.’
백야와의 중재는 단순한 명분에 불과했다.
그는 이것을 내게서 직접 묻기 위해 나를 이 자리에 끌어들인 것이다.
협회장씩이나 되는 인간이 벌일 만한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시우는 그런 품위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품위를 따지며 실리를 져버리느니, 초인사회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건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차시우였다.
그래서 내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마인의 편에 설 것인지, 초인의 편에 설 것인지를.
‘데몬스폰’이란 존재는 어느 편에 서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지금 내가 하는 답에 따라 협회의 마경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리라.
회의장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내 입에서 나올 말을 주시했다. 그리고, 내 입이 열렸다.
“어느 편도 아닙니다.”
“······.”
“마경은 마경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겁니다.”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는지 회의장에 짧은 정적이 일었다.
“흐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대답이지만 초인협회장으로서 달가울 만한 대답은 아니군.”
차시우가 빙긋 웃어 보였다.
“일단 적은 아니라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상황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 정도면 충분하네.”
그걸로 나와 차시우 간의 대화는 끝이 났다.
***
······노을이 지는 저녁. 용무를 마치고 협회를 나온 나와 소피아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강 잠수교의 다리 아래에 저녁으로 사온 컵라면을 들고 앉았다.
시민공원이 있기에 과거에는 바람을 쐬러 종종 오곤 했던 장소이지만, 게임에 들어와서 들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협회의 마법사로부터 외모 변형마법을 받았기에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나는 조금 전 내가 차시우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경은 어느 편도 아니다라는 말.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소피아나 다른 이들의 생각은 또 다를지도 몰랐다.
“상의도 없이 너무 멋대로 정해 버렸나요?”
“아니요, 정말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소피아가 방긋 웃으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영상으로 녹화해서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협회와 부딪힐 수도 있는데요?”
“그때는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해 보이는 소피아.
그 시원한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결국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소피아가 눈을 깜빡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 역시 변장이 안 어울리나 보군요. 바로-”
“아하하! 아니요, 잘어울려요.”
아닌게 아니라 동양인으로 변한 소피아의 외모는 정말 잘 어울렸다. 좀 더 어려보이면서 차분해진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어디까지나 분위기 전환측면에서. 역시 기존의 눈에 띄는 은발이 소피아에게는 더 잘어울렸다. 그러자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럼 왜 웃으신 거죠?”
“망설임이 없는게 참 대단하다 싶어서요.”
“그게 대단한 겁니까?”
“네, 보통은요.”
내가 빙긋 웃었다.
소피아는 언제나 망설임이 없다.
득실을 따져가며 유리한 방향으로만 답을 내리는 나와 달리 소피아는 자신의 마음에 따라 후회가 남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러니 고민하는 바가 없고, 언제나 시원한 답이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곁에 있으면 믿음직스럽다.
그게 정답이건 아니건, 소피아라면 언제나 답을 내려줄 테니까.
그때, 소피아가 보기 드물게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어 보인다.
손에는 편의점에서 가져온 나무젓가락이 쥐여 있다.
그 옆으로는 반으로 나뉘지 못하고 부러진 나무젓가락이 3개째 쌓여 있었다.
아까부터 혼자서 끙끙 앓는 것 같더니, 젓가락을 떼지 못해서였나 보다.
“줘봐요.”
그 사소하면서 황당한 고민거리에 헛웃음을 지은 내가 그것을 빼앗아 반으로 나누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으음, 그런데 젓가락은 어떻게 쥐어야 되는 걸까요?”
“이렇게 쥐는 거예요.”
노을이 져오는 늦은 저녁.
“오, 이렇게 쥐는 거군요! 아앗!”
“그렇게 힘주면 부러진다니까요.”
서투른 젓가락질에 집중하는 소피아의 손을 교정해주며 그날의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