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내 공간을 더럽히다니, 이게, 이게 무슨 만행이냐.”
오거스트에게서 어마어마한 마기의 아우라가 터져 나온다.
콰아아아···!
휘몰아치는 마기의 폭풍. 어지간한 초인이라면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기절해버릴 만큼 아찔한 마기였다.
내 앞을 막아선 소피아의 몸이 조금씩이지만 뒤로 밀려난다.
콰득─!
대검을 땅에 박아 넣어 밀려나는 몸을 억지로 버티는 소피아. 마기에 침식된 핏줄이 거멓게 물들고, 내뱉는 숨결에 검은 재가 섞여 나온다. 내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피아씨, 됐어요.”
“하지만-”
화르륵······!
소피아의 말을 끊으며 일어난 푸른 불길이 그녀를 집어삼키던 마기를 살라 먹었다.
검게 물들었던 혈관이 제 색을 되찾고, 숨결이 맑아진다. 놀란 소피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같이하자고요.”
내가 그녀의 옆에 섰다.
“마기를 막는 쪽은 제가 소피아씨보다 잘하거든요.”
“까아악!”
파랑이가 호응하듯 부리를 벌렸다.
잠에서 깨어난 녀석이 내 어깨에서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
─······.
가슴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아나스타샤의 빛이 어둠을 밝힌다.
휘아악!
뒤이어 휘둘러지는 부채. 바람을 따라 피어난 홍염의 불길이 마기의 일각을 지워버렸다.
“저도 있답니다.”
“물론 알고 있죠.”
이본느의 말에 화답한 나는 마기의 너머를 응시했다.
휘이이······
공간을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던 마기의 폭풍은 어느 순간 기세가 꺾이더니 서서히 잦아들었다.
“······.”
한바탕 마기를 방출한 오거스트의 신색은 언제 분노했었냐는 듯 평안해져 있었다.
되려 우리를 보며 인자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그 극심한 격차가 조울증을 앓는 사람 같았다.
“꽤나 심한 일을 저질러놨어.”
기절한 백광인들, 파괴된 광장을 둘러보며 오거스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무지의 소산에서 벌어진 일이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그리 말하며 우리를 바라보는 녀석에게서 탐욕이 번들거렸다.
“내가 만든 화국은 잘 둘러보았나.”
“어, 잘 봤다.”
“어떻게 생각하지.”
“시체들이 돌아다니더군.”
“표현은 거칠지만 맞는 말이다.”
내 신랄한 비판을 오거스트는 거리낌 없이 인정했다. 정신은 나갔지만, 객관적인 판단은 가능한 녀석이다.
딱─!
오거스트가 손을 튕기자, 돌연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우리가 돌아다녔던 화국의 시장거리였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감정을 빼앗긴 이들이 돌아다니는 거리. 저건 죽느니만 못한 신세였다. 다만 오거스트의 관점은 달랐다.
“다툼이 없고, 만인이 평등하며, 평화만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죽은 자들의 거리를 오거스트는 눈이 부시다는 듯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녀석은 평화를 원했다. 전쟁에 스러져가는 이들을 안타까워했고, 다툼이 없는 세상을 원했다. 그리고 오거스트가 그리는 평화에 감정은 배제되었다. 감정은 인간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불순물’이라 믿었기에.
그러한 오거스트의 뒤틀린 이념이 반영된 세상이 바로 이 화국이었다.
“정신이 나갔군요.”
“그러니 또라이지.”
소피아와 이본느의 표정은 차게 식어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정당한 분노였다.
오거스트의 뒤틀린 이상에 휘말려 희생된 것이 바로 그녀들이었으니.
하지만 그 분노를 터트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미친놈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오거스트는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녀석이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감정은 고스란히 섬에 저장되어 놈의 힘이 된다.
그 힘의 원천이 반전마법진에 의해서 막히고 있다는 사실을 오거스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시간을 끌어주어야 했다. 혀를 찬 내가 오거스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매달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괜찮고?”
“‘방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오거스트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방주?”
“이 섬은 다가올 붕괴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한 요새다.”
“······.”
다가올 붕괴.
그것은 노아가 막고 있는 차원의 틈을 말함이었다.
틈이 벌어지는 순간 둑이 무너진 것처럼 세상은 차원의 저편에 삼켜져 버릴 테니.
오거스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가올 붕괴를 대비해 제 나름의 대비를 해오고 있던 것이다.
뒤틀린 놈일지는 몰라도 멸망을 바라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너희는 화국의 신민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오거스트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기회를 주마.】
그 눈빛이, 목소리에서 퍼져나온 매료의 실타래가 사람의 감정을 속이고 덧씌운다.
그것은 언령(言令)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강줄기처럼 흘러나오던 감정의 실타래는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겨버렸다.
파아앙─!
대검을 휘둘러 마음을 좀먹던 매료의 마기를 부숴버린 소피아가 차게 식은 표정으로 물었다.
“해솔님. 이제 참지 않아도 될까요?”
“예, 마음대로 하세요.”
이본느는 한술 더 떠 이미 부채를 휘둘렀다.
───!
날아드는 홍염의 칼날을 쳐낸 오거스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멈춰라!】
녀석이 달려드는 소피아를 쳐다보며 다시 매료를 시전했으나······
“흥!”
소피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검을 휘둘렀다.
콰앙─!
대검을 막은 오거스트의 손아귀가 찢어지고, 무릎이 반으로 굽혀진다. 녀석의 얼굴이 처참히 찌푸려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긴. 너 좆된다는 거지.”
나는 당황한 오거스트를 보며 웃었다.
기다리던 반전마법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
······한편 섬에 새겨진 반전마법진의 중추가 있는 외곽의 분지.
“마법진의 가동을 위한 마력을 모으려면 10분이 걸려요. 그때까지 여길 지켜야 해요.”
일레인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섬 전체에 ‘서리의 마력’이 새겨지면서 빼앗긴 감정이 움직이는 것은 막아두었으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반전마법진이 제대로 발동되어야 했다.
그 전에 마법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수호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왔어요.”
아멜리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일행에게도 아멜리아가 말한 이들이 보여왔다.
새하얀 옷을 입은 수십의 백광인들. 그 앞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
“아앗!”
“나쁜 노인!”
누군가를 알아본 리디아와 니엘이 소리쳤다.
화상을 입고 피부가 짓물러 머리가 빠져버린 대머리 노신사, 세오릭이었다.
세오릭도 두 아이를 확인했는지, 인상이 슬쩍 구겨졌다.
그의 피부가 짓물러진 원인을 제공한 아이들이었으니. 그러다 옆에 선 인물을 보곤 눈매를 좁혔다.
“설마 싶었지만, 이것을 그린 건 역시 너였구나.”
세오릭이 발치에 새겨진 마법진을 툭 찼다.
그는 섬에 새겨진 마법진을 지우기 위해 별짓을 다 해보았다. 하지만 마법진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세오릭은 잘 알고 있었다.
‘서리의 마력’은 한 번 새겨지면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소진.”
“오랜만입니다, 세오릭님.”
소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게 세오릭은 어찌보면 그녀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소진이 ‘서리의 마력’을 각성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것도, 감정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해주었던 인물이 바로 세오릭이었기에.
한편 마법진 수호에 가담한 천우진과 은가예의 표정은 각오로 물들어 있었다. 세오릭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였다.
“감히 화국에 이상한 짓거리를 하다니, 저 벌레들을 죽여!”
성질을 내며 일행을 손가락질하는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바로 마릴이었다.
분위기상 그녀는 두 사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자존심 상하네.”
“그러게.”
천우진이 사나운 미소를 짓자, 은가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 일행을 향해 백광인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해 발이 묶여버렸다.
스스스스스─
일레인이 사전에 설치해 놓은 저주의 마법이 발동하며,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준비시간을 가진 저주술사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으니.
수십의 저주마법이 깔린 이곳은 이미 일레인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굳거나, 느려지고, 감각을 상실하는 등, 상태이상에 걸린 백광인들은 일행의 상대가 아니었다.
콰아아앙─!
아멜리아의 광역마법이 작열하고, 천우진과 은가예, 두 사람이 달려 나가니 백광인들이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익! 쓸모없는 것들!”
버럭 소리친 마릴이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을 타고 수가닥의 거미줄이 공간을 가른다.
적아를 구분치 않는 잔인한 일격. 하지만 그 거미줄은 채 뻗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축 늘어져 버렸다.
“···뭣?”
놀란 마릴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
은가예가 대검을 휘두르자, 그 일대의 백광인들이 맥을 못추고 엎어지고 있었다. 거미줄도 그와 함께 늘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늘어져버린 거미줄은 천우진의 검에 의해 빠짐없이 절단되었다.
그때, 시선을 마주친 은가예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마릴의 관자놀이가 튀었다.
“이 년이······!”
***
마릴이 천우진과 은가예와 싸움을 시작한 사이, 세오릭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콰드득─!
지면에서 일어나는 돌덩이를 피하고 부수며 달려드는 세오릭.
리디아가 손을 휘젓자 세오릭의 머리가 물방울에 갇힌다.
물방울은 세오릭의 마기에 부글부글 끓더니 증발하려 했다. 그러나 증발하기 전에 쩌적- 얼어버린다. 소진의 마력이었다.
이내 얼음이 깨트린 세오릭이 숨을 몰아쉬며 땅을 박차려 하자, 돌연 지면이 움푹 들어가 버린다.
“!”
땅을 박차려던 세오릭의 신형이 균형을 잃고 기울었다. 니엘이 지면을 낮춘 것이다. 그렇게 주춤거리는 찰나, 머리에 퍼부어지는 물세례.
촤아아아! 쩌적-!
졸지에 물에 푹 젖은 세오릭이 얼어버린다. 리디아가 끼얹은 물을 소진이 얼린 것이다.
“더러운 잔재주를······”
전신에 얼음을 매달은 세오릭이 인상을 구겼다. 어느새 세 사람은 아멜리아의 공간마법에 의해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다가가기만 하면 순식간에 없앨 수 있건만, 계속해서 이런 더러운 수작만 부리며 거리를 벌려버리니 세오릭으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물론, 세오릭은 혼자가 아니다. 화국의 중대사에 고작 백광인만 데리고 오지는 않았으니.
“잡아라.”
스윽, 스윽, 스윽.
돌연 일행이 있는 곳의 공기가 흔들리더니, 세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
갑작스럽게 나타난 적의 등장에 일행이 당황했다. 세오릭은 생각 없이 공격을 한 게 아니라 수하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그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훼에엑!
세 방향에서 몰아치는 칼날. 니엘, 리디아, 아멜리아, 소진 네 사람은 적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으나, 그 바람에 서로 간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것은 공간이동 마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물며 나타난 적은 그 셋만이 다가 아니었다. 세오릭의 뒤에 거진 백에 달하는 백광인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위험해.”
마법진의 중추에 서 있던 일레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전마법진의 가동까지 앞으로 5분이나 남아있었다. 그러나 마법진을 사수하기에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반면 아멜리아를 비롯한 마법전력은 어느새 달려든 세오릭에게 발이 묶여버린 상태.
이대로라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일레인이 어찌해야 하나 전전긍긍할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돌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
“?”
이상을 감지한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분지의 사방에서 모래먼지가 자욱하게 일더니, 일련의 대군(大軍)이 나타났다. 그것들을 본 일레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캬르르르르···”
그것은 물경 수백에 달하는 크루트떼였다.
그때, 하늘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서는 거대한 공룡. 녀석의 너른 등판에는 두 사람이 타 있었다.
잠에 빠져든 라우라와 한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