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쿠구구구구구-
지축이 뒤흔들리는 굉음. 평야를 가득 메우며 ‘검은 해일’이 밀려 들었다.
콰아아앙─!
그 압도적인 해일에 휘말린 백광인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본 채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고 쓸려나갔다.
“아악!”
“크아악!”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백광인들.
“캬르르르!”
100여 명에 달하던 백광인들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와해되어버렸다.
낙엽처럼 사방을 날고, 도망치다 짓밟히고······
와르르 무너지는 도미노를 보듯 허망한 광경이었다.
“이게 대체······”
세오릭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쿠구구구구-
검게 물들어가는 평야. 순식간에 지워져 나가는 백색.
거대한 해일처럼 시야 전체를 까맣게 메운 그것의 정체는 ‘크루트’였다.
화국에 존재하는 크루트란 크루트는 다 이곳으로 몰려든 듯한 압도적인 물량이었다.
세오릭은 쓸려나가는 백광인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건 그가 어떻게 할 수준을 넘어선 ‘재앙’이었으니.
그때 돌연 지상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든 세오릭의 눈이 흔들렸다.
칠흑처럼 새까만 거체가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섬을 울리는 포효를 내지르는 마수는 세오릭도 익히 잘 아는 괴물이었다.
“···흑요(黑曜).”
6성급을 넘어선 어둠 속성의 대마수이자 오직 오거스트만이 부릴 수 있는 애완동물.
“어째서 저 괴물이······”
오거스트의 부름이 없다면 섬의 최심부에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세오릭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이 수많은 크루트의 무리가 나타난 배경조차 파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아비규환 속에서도 세오릭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인지했다.
바로 섬을 장악한 이 정체 모를 마법진의 발동을 멈추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진의 가동을 위한 중추를 부숴야만 했다. 마침 마법진의 중앙에는 거대한 마력석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세오릭은 그것이 마법진의 중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미끼’였다. 진짜 마법진을 가동하기 위한 중추는 따로 있었다.
파밧─!
세오릭은 그 ‘중추’를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
크루트의 대군에 정신이 팔려있던 소진은 갑작스러운 세오릭의 기습에 뒤늦게 반응했다.
쩌저적─!
서리의 마력이 뿌려지며 세오릭의 오른팔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세오릭은 이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퍼억─!
그의 무릎이 소진의 복부 깊숙이 틀어박혔다.
“크학!”
허리를 굽히는 소진의 뒤통수를 세오릭이 손날로 가격했다.
눈을 부릅뜨다 축 늘어져 버리는 소진. 세오릭이 기절한 그녀를 들쳐 엎었다.
마법진을 완전히 저지하자면 소진을 죽여야했으나 세오릭은 그러지 않았다.
기실, 서리의 마력을 지닌 소진은 오거스트가 탐내는 그릇이었으니.
인간에게서 감정이란 심지를 얼려 버리기 위한 중요한 소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멋대로 죽이는 것은 곤란했다.
밀려드는 크루트의 대군을 피해 세오릭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그의 오른쪽 어깨가 박살 났다. 얼어붙은 팔이 조각 져 떨어져 나갔다. 세오릭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바닥을 굴렀다.
콰아앙─!
거대한 어둠이 그가 있던 공간을 파괴했다.
오거스트의 대마수, 흑요의 공격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오릭이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파멸의 일격에 어깨가 찢기고 발끝이 사라졌으나 세오릭은 가까스로 현장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아니, 성공했다 ‘믿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탈했다고.
“······.”
한세연은 숲 너머로 사라지는 세오릭의 등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뒤로 세오릭의 수하로 보이는 두 명의 데몬스폰이 따라붙자 흑요가 입을 벌렸다. 한세연이 그런 흑요의 목을 쓰다듬었다.
“크르르···”
공격을 하려던 흑요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세오릭은 스스로의 힘으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여겼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흑요가 공격하는 척만을 하면서 그를 놓아주게 만든 것은 바로 한세연이었다.
애초에 이해솔이 소진을 끌어들인 이유는 반전마법진의 완성을 위함도 있었으나, 덤으로 신검 차시우가 올 가능성도 고려해서였다.
그림자를 게이트로 이동하는 차시우라면 소진의 그림자를 통해 화국까지 당도하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소진을 아끼는 차시우라면 화국에 나타날 수도 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소진이 납치를 당하는 것은 이해솔의 당초 계획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차시우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확인한 한세연이 의도한 상황이었다.
이해솔의 생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몰아갈 필요성이 있었으니.
그림자란 ‘게이트’로 이어진 차시우는 소진의 위기를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아멜리아, 부탁할게.”
“어? 응.”
한세연은 잠에 빠져든 라우라를 아멜리아에게 맡겼다.
얼떨결에 이불과 함께 라우라를 받게 된 아멜리아는 당황하면서도 그녀를 편하게 눕혔다.
이윽고, 정리되어가는 전황을 주시하던 한세연이 입을 열었다.
“가자.”
그러자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흑요.
그 활공은 관조자의 탑이 존재하는 섬의 중앙으로 이어졌다.
***
한세연이 섬의 중앙으로 향한 한편, 마릴은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익! 끈질긴 년!”
그녀에게서 뿜어진 수십 가닥의 거미줄이 은가예를 노린다.
콰과광─!
거미줄에 스친 숲의 교목, 바위 등이 예리하게 갈라진다.
풍경을 가르는 그 강도는 흡사 강철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은가예의 대검이 휘둘러지면 여지없이 탄력을 잃은 고무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늘어진 거미줄을 찬연한 광채가 베고 지나간다.
파츠즈즈즛─!
질풍처럼 공간을 가로지르며 마릴에게 달려드는 천우진.
“잡것들이!”
마릴이 거미줄을 방사했으나, 평정을 잃은 그녀의 손은 흔들림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게 바로 뒤에서 크루트의 대군이 그녀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조급함에 마릴은 마구잡이로 거미줄을 방사했다.
붉은 거미줄, 혈주사가 천우진의 전면을 메운다.
천우진은 그중 세 가닥만을 벤 채, 나머지 거미줄을 피해 달려들었다. 그만큼 지금의 거미줄은 엉성했고, 틈이 많았다.
평소의 마릴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흑요의 등장과 크루트의 대군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 마릴을 벼랑으로 몰아붙이고 있던 것이다.
쿠구구구구-
어느새 등 뒤까지 몰려든 크루트의 군세를 확인한 마릴의 드레스가 올올히 풀렸다.
휘아악-
풀린 드레스 자락은 혈주사로 변해 천우진의 사방을 점했다. 이를 끝으로 마릴은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꺼져-!”
달려드는 은가예의 대검은 거미줄 뭉치로 쳐냈다. 찰나, 마릴은 오싹함을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보인 광경에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천우진이 어느새 그녀의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녀가 풀어낸 혈주사를 천우진은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내며 헤쳐나온 것이다.
설마 저런 정신나간 짓을 할 줄은 미처 몰랐기에 마릴은 천우진의 접근을 허용해버렸다.
목을 향해 들이닥치는 찬연한 광채를 본 마릴의 드레스가 올올히 풀어졌다.
그것이 광채를 막아섰다. 새까맣게 물든 거미줄. 마릴의 최후의 지주사. ‘검은 죽음’, ‘흑사(黑死)’였다.
콰츠즈즈즈즛!
검과 흑사가 부딪히며 불똥이 요란하게 튀긴다. 그리고.
투둑, 툭.
흑사가, 하나 둘 끊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이형(異形)을 베어버리는 천우진의 기프트, ‘검성’이 발현된 것이다.
“이런!”
목으로 다가드는 검을 본 마릴의 표정이 하얘졌다. 그러나 흑사를 모조리 베어버릴 듯만 하던 검성의 광채는 갈수록 움직임이 더뎌지더니 마지막 두 가닥의 흑사를 앞에 두고 진로가 막히었다.
치이이이잉─
검과 흑사가 대치한 면에서 소름 끼치는 소성이 울렸다. 하지만 흑사는 끊기지 않았다. 긴장하던 마릴의 얼굴에 뒤늦게 안도의 웃음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안도였다. 순간, 팽팽하던 흑사가 탄력을 잃은 것처럼 늘어졌다.
“!”
막혔던 검은 늘어진 흑사를 지나, 마릴의 목에 닿았다.
키기기기긱─
거미줄로 이루어진 그녀의 단단한 목이 톱날에 베이는 거목처럼 서서히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마릴의 시야에 어느새 다가든 은가예가 씨익 웃는 것이 보였다.
흑사를 늘어트린 주범은 바로 은가예였던 것이다.
“너, 너 이 녀어어언!”
마릴이 은가예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와중에도 질기게 베이지 않는 목에, 은가예가 천우진의 반대편에서 검을 휘두른다. 두 사람의 검이 마릴의 목 양옆을 베고 들어갔다.
“싫어어어어······!”
처절한 비명을 지르던 마릴의 목이 툭- 굴러떨어졌다.
***
······한편, 소진을 납치한 세오릭이 향한 곳은 ‘교화소’였다.
아무것도 없이 온통 새하얀 백색만이 존재하는 공간.
우연치 않게, 혹은 의도적으로 섬에 들어와 ‘다툼’을 일으킨 이들은 이 교화소에 감금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감금되었던 이들은 모두가 감정을 잃은 무감인이 되어 화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교화소’라 불리는 그곳에 세오릭은 소진을 내려놓았다.
“엉망이군요.”
어느새 깨어난 소진이 세오릭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세오릭은 오른팔과 왼발을 잃었으며, 피부는 독극물에 녹아내린 처참한 몰골이었다.
“죽음보다는 낫지.”
세오릭은 자신이 소진을 인질로 삼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걸 알았다.
만약 그에게 인질이 없었더라면 다른 이들은 그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을 테니.
인질을 개의치 않는 흑요로 인해 신체의 일부를 내줘야 하긴 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그 장소에 있던 마릴을 비롯한 백광인들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 세오릭은 확신했다.
그만큼 처참했고 끔찍한 아비규환이었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그런가?”
“······!”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오릭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언제?’
자신이 등을 빼앗기다니.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입구를 지키던 수하 둘이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그 사이에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여어-”
“······.”
“오랜만, 아니면 잘 지냈냐 물어봐야 되나?”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남성은 세오릭이 익히 잘 아는 사내였다. 그리고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차군.”
“그런 식으로 불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어깨동무를 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내는 신검, 차시우였다.
하지만 어깨동무를 풀었음에도 세오릭의 두 수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우리 부관이 신세를 좀 진 모양이야.”
뚜벅뚜벅-
차시우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멍하니 앉아 있는 소진에게 다가갔다.
세오릭은 차시우가 옆을 지나침에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쯧, 휴가를 간다더니 엄한 데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구나.”
소진의 앞에 쪼그려 앉은 차시우가 그녀의 옷에 묻은 흙을 손수 털어주었다.
“협회장···”
소진의 몸이 종이처럼 떨렸다.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건 긴장이 풀려서 나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만 울어라. 못나 보이니까.”
소진이 웃으면서도 눈물을 그치지 않자, 혀를 찬 차시우가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만 가자.”
그렇게 소진을 데리고 나가려는 차시우에게 세오릭이 물었다.
“안 죽이나?”
“귀찮게 왜.”
“······.”
세오릭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시우는 정말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오릭은 아니었다.
그에게 이 세상에는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존재가 바로 차시우였으니까.
그 강함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는 갈망이 세오릭을 오늘까지 이끌었다.
“죽으려는 건가? 못 본 체 지나가 줄 수도 있다만.”
“······.”
말없이 하나 남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세오릭을 보며 차시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죽이기가 싫다니까.”
한때는 마음에 들던 식구를 죽이는 일은 할 짓이 못되었으니.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마무리를 지어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합!”
기합을 지른 세오릭의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강맹한 마기를 담고 질러지는 그 주먹을 차시우는 손을 펼쳐 가벼이 감쌌다.
아무런 기세도,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세오릭의 내부에는 돌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니.
부르르 떨던 세오릭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매단 채.
이를 조용히 일별한 차시우가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봐야겠군.”
그러곤 걸음을 옮겼다. 섬의 중앙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