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관조자의 탑이 위치한 섬의 중심. 세례의 광장.
콰아앙─!
대검이 지면을 강타하고, 불길이 허공을 수놓는다.
그러한 공세를 몇 차례고 흘려낸 오거스트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인정하마. ‘교화’는 어렵겠구나.”
“빨리도 인정하시네.”
내가 혀를 찼다.
오거스트는 감정의 조작이 막히었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는지, 지리멸렬한 회피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지금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게 섬에 쌓이고 저장되는 화국 국민들의 감정은 녀석이 가장 아끼고 선호하는 능력이었다.
감정을 덧씌우는 것만으로도 아무런 다툼 없이 상대방을 세뇌할 수 있다는 것은 대화를 중시하는 오거스트에게 가장 이상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리의 마력이 섬에 새겨진 이상 녀석은 더 이상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놀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녀석의 여유를 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당연했다. 감정의 세뇌는 녀석이 가장 아끼는 능력이긴 했으나, 실상 그가 가진 수많은 카드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어쩔 수 없구나.”
대화가 막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오거스트가 품에서 작은 종을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관조자의 탑 꼭대기에 설치된 거대한 종이 공명하듯, 울음을 토해냈다.
대애앵─ 대애앵─
섬 전체로 퍼져나가는 종소리. 그것은 백광인, 즉. 데몬스폰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였다.
다툼을 원치 않는 오거스트는 본인이 직접 손을 쓰는 것을 ‘야만적인 행위’라 여기었고, 그랬기에 감정을 통한 세뇌가 무리라면 이렇듯, 수하들을 부렸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녀석의 결벽적인 성격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광장에 나타나는 데몬스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백광인들은 아렌에게 막혀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을 테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한들 광장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뭐 했어?”
“종 놀이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
나와 소피아의 대화에 오거스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녀석에게서 마기의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조용히 섬 전체를 향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이는 데몬스폰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데몬스폰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은 오거스트가 화국 전체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크루트들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거스트가 지난 수십 년간 손수 화국에 뿌리를 내리게 한 녀석들이야말로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였다.
오거스트의 마기를 느낀 크루트들은 자연스레 그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게 되어있었다. 녀석은 감정의 조작을 통해 크루트들에게 자신을 주인이라 인식시켜 놓았으니까.
하지만 설령 감정을 조작당한 크루트들이라 할지라도 라우라의 능력인 ‘백귀야행’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했다.
마수에 특화된 기프트를 지닌 라우라는 마수에 한해서 오거스트보다 더욱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던 것이다.
마수 스스로가 직접적인 굴종을 하게 만드는 라우라에게 오거스트가 덧씌워 놓은 거짓된 감정을 벗겨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종이 다른 인간에게서 추출한 감정을 마수에게 입혀 놓았으니, 그 속박이 완벽할 리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오거스트의 부름에 나타나는 마수는 이번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 끝났어?”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모양이구나.”
“그럼 내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온 줄 알았냐?”
전투 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정리해 놓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하물며 그게 오거스트라면 손발을 잘라놓고 시작해도 이쪽에 승산이 있을까 말까였으니, 쓸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동원하는 게 당연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속아 넘어간 오거스트가 바보일 뿐이다.
“이제야 직접 싸울 마음이 들었나 보네.”
“감정을 가진다는 건 이다지도 어리석은 일이로구나.”
표정이 불쾌하게 구겨진 오거스트의 등 뒤로 망령의 형상을 취한 수십(數十)의 마기가 일어났다.
우우우──
음울한 울음을 토하는 그것들은 오거스트가 부리는 저주의 망령들이었다.
망령에 먹힌 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죽음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팔다리가 날아가 거동이 불가능하더라도, 상반신의 일부, 혹은 머리만이 남더라도 멀쩡한 정신 상태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생명을 아끼는 오거스트가 창조해낸 괴기스러운 능력이었다.
그 저주스러운 망령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본느가 불길을 방사하고, 소피아가 달려나가 망령들을 베어낸다.
하지만 태워지고 베어내도 망령들은 다시 재생되었다.
절반은 나와 이본느에게 달려들었고, 나머지는 소피아를 노렸다.
스아악─
내 주변을 위성처럼 떠다니는 그람의 단검들이 접근하는 망령들을 남김없이 베어낸다.
베어진 망령들은 이본느의 불길에 잡아먹혀 불타고, 재생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우리가 망령과 대치하는 사이 오거스트의 주변으로는 마기가 안개처럼 짙게 깔렸다.
누가 보더라도 ‘함정’처럼 보이기에 다가가기가 꺼려지는 마기였다.
일반적이라면 접근하지 않고 상황을 보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소피아, 망령은 내버려 두고 오거스트를 노려요.”
“예!”
소피아가 달려드는 망령들을 피해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런 소피아를 쫓아 날아드는 망령의 군세.
부웅─
소피아의 대검이 횡으로 휘둘리며 망령들이 쓸려나갔다. 하지만 재생된 망령들은 오히려 그녀의 사방을 점했다.
공중에서 방향을 틀 수는 없으니 소피아가 망령의 공격을 피하기란 불가능해보였다.
물론, 소피아도 아무런 생각 없이 뛰어오른 것은 아니었다.
내 기력이 촉수처럼 길게 뻗어져 소피아를 향해 날아올랐다.
소피아는 그 기력을 발판 삼아 공중에서 방향을 틀었다.
우우우우─
달려들던 망령의 군세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내 보이지 않는 기력을 볼 수 있는 소피아와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계기였다.
이내 공중을 이리저리 박차며 망령을 흘려내는 소피아. 나와 소피아의 호흡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소피아가 제 스스로 허공을 움직이는 듯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이러한 호흡을 맞추기 위해 화국에 오기 전 내내 서로 간의 합을 맞춰왔다.
이제는 소피아가 어디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지를 보는 것만으로 대강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곳에 기력의 발판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피아를 엄호하듯 아나스타샤가 빛의 화살을 무수히 쏘아냈다.
피잉! 피잉!
별무리처럼 날아드는 아나스타샤의 빛에, 망령들이 연이어 격추당했다. 단 하나의 빗나감도 없는 연발연중이었다.
녀석들이 제아무리 빨리 움직여보았자 빛의 정령인 아나스타샤의 공격보다 빠를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아나스타샤의 엄호를 받아 망령의 군세를 떨쳐낸 소피아가 오거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우우웅─!
수미터 상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대검을 내리찍는 일격.
오거스트는 차마 이를 받아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대마인이라고는 하나, 완력 면에서 소피아를 압도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소피아의 공격도 오거스트에게 닿지는 못했으나 녀석이 물러난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계획은 애초에 녀석을 가격하는 것이 아닌, ‘준비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으니.
오거스트가 제대로 마기를 끌어내고 기프트를 발동하기 위해서는 최소 30초라는 준비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발동된 녀석의 기프트, [용서받지 못한 자]는 생명을 죽게 하는 기운이다.
이 기프트를 발현한 상태의 오거스트는 자신의 신체에 접촉한 대상을 ‘즉사’시킨다.
설령 즉사를 면해도 죽음이 달라붙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물론 그 파급력만큼이나 리스크도 큰 축에 속했다.
준비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즉사의 능력도 배가 되지만, 반대로 준비시간이 짧다면 능력 또한 불완전한 형태로 발현되게 되는 것이다.
오거스트가 주변에 함정처럼 보이는 수상쩍은 안개를 깔아 놓은 것도, 망령을 부리는 것도, 데몬스폰이나 크루트들을 앞세우는 것도 전부 그 준비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책이었다.
기프트를 발동하는 동안의 녀석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어 있었으니.
그리고 준비시간을 벌지 못한 오거스트는 현재 기프트를 발현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과연 오거스트의 표정에 처음으로 낭패감이 어렸다.
데몬스폰과 크루트에 이어 비장의 무기였던 기프트마저 막혀버렸으니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인지한 것이다.
“힘을 끌어내는 걸 얌전히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어?”
콰앙─!
오거스트에게 맹공을 퍼붓던 소피아가 뒤로 밀려났다.
“···너는 나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구나.”
나를 향한 오거스트의 눈에 처음으로 살기가 어렸다.
“허나, 기프트를 막는다고.”
콰앙─!
마기가 소피아가 있던 공간을 채찍처럼 후려친다.
“달라지는 게 무엇이 있지?”
콰앙─!
“이토록 약한데 말이다.”
마기가 치고 지나간 광장이 파괴된다. 땅이 뒤집히고 파편이 튀어 올랐다.
광장의 일면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런 게 순수한 마기라니, 터무니없는 파괴력이었다.
순간, 거대한 마기의 채찍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휘악, 휘악!
이본느가 부채를 연이어 휘둘렀다.
화염의 칼날 다섯 개가 날아가 마기를 조각조각 갈라버렸다.
하지만, 오거스트가 지닌 마기의 총량은 상상 이상이었고, 채찍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이본느가 마기를 조각내며 소모전을 펼치는 한편, 소피아는 망령을 떨쳐내기 바빴다.
휘이익─!
상공으로 뛰어오른 소피아를 향해 망령이 입을 벌리며 달려든다.
기력을 박차 이를 피하면 피한 곳을 노리고 마기가 날아든다.
피잉─ 피잉─
“끼아아아!”
아나스타샤의 빛, 파랑이의 불길이 소피아를 엄호했으나, 오거스트의 마기를 모두 지워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소피아는 허공을 이리저리 박차며 마기를 피하는 한편, 오거스트를 직접적으로 노렸다.
콰앙─! 콰앙─!
소피아의 대검이 오거스트를 노리고 연이어 대지를 박살 낸다.
오거스트는 정면대결을 하지 않고 대검을 피해 다녔다.
반면 오거스트가 하는 공격을 소피아는 모두 기력의 발판으로 피해냈다.
발 디딜 곳도 없는 허공에서,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버리니 오거스트도 그런 소피아를 맞추기란 어려웠다.
허공을 이리저리 오가는 소피아의 모습은 꼭 날다람쥐같았으니.
“···신기한 능력이구나.”
오거스트는 기력을 보지 못하기에 소피아가 허공을 움직이는 원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소피아의 대검을 재차 피하며 오거스트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식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계속 지속된다면 결국 승리하는 건 오거스트였다.
소피아가 지쳐서 조금이라도 틈을 주었다간 오거스트는 불완전하나마 기프트, [용서받지 못한 자]를 발동할 테니.
그렇게 되면 위태롭게 유지되던 균형의 추가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소피아는 땀에 흠뻑 젖은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오거스트를 계속해서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조금씩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거스트가 승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던 그때, 때 아닌 괴성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아─!
뒤이어 괴성의 주인이 광장의 상공에 나타났다.
“왔구나.”
하늘을 올려다 본 오거스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나타난 것은 거대한 칠흑의 동체를 지닌 마수. 오거스트의 애완동물이자, 화국의 수호마수인 흑요(黑曜)였다.
“흑요, 저것들을 없애라.”
오거스트의 말에 화답하듯 흑요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 안에 맺혀 들기 시작하는 거대한 마기.
콰아아아아─
칠흑의 마기가 광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마기가 노리는 대상은 바로 오거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