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잘 부탁해.”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너울거리며 눈매를 휘어 보이는 이리나.
“어, 나도.”
나는 대충 대답을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리나는 할 말이 남았는지, 은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수석이라고? 대단하다. 나는 편입을 간신히 통과했는데.”
“여기가 좀 빡세긴 해.”
문득 입학시험을 떠올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기는 그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떨어졌을 것이며, 필기조차도 백지를 제출했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진짜 합격한 게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내 반응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자신한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일까.
“흐음······”
뭐를 얼마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리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으나,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리나 밀러라는 존재가 예상치 못한 변수이기는 했으나, 그렇기에 얽히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내 결정이 무색하게 이리나는 귀찮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해솔이는 이 둘 중에 뭐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이제 조례가 끝났건만 벌써부터 친근하게 이름까지 불러온다.
흘낏 쳐다보니, 그녀의 손에는 붉은 계열의 넥타이와 리본 타이가 들려 있었다.
아카데미의 여자 교복은 리본타이와 넥타이 중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었으니.
내가 눈길을 주자, 입꼬리를 올린 이리나가 보여주듯 제 하얀 목에 리본타이와 넥타이를 번갈아 대며 고개를 슬쩍 기울여 보인다. 어깨를 타고 보랏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저 의견을 구하는 평범한 손짓에 고갯짓이건만, 은근한 색기가 묻어나왔다.
그렇게 이리나가 내게 의견을 구하는 눈짓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콰앙─!
교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웬 고릴라 같은 사람이 들어왔다. 체육교관 곽진호였다.
“1교시 수업 변경이다.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집합해라!”
교실을 울리는 곽진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투덜거린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느긋하게 쉬고 싶건만, 첫교시부터 이 난리네.
의자를 끌며 일어나던 나는 깜빡 잊었다는 듯 이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너 원하는 걸로 매.”
“······.”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이리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리본 넥타이.”
“어, 그래라.”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입던 도중에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아, 넥타이.”
그거 생도증 인증하고 매야 되는데.
아카데미에서 지급되는 물건은 평범한 생활품이 아니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자율방어 마법진이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어서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인증을 안하고 맸다간 트랩에 걸려버린다.
속이 메스껍고, 뒤틀리는 저주계열이었던 거 같다.
지금이라도 알려주러 가야 되나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뭐, 괜찮겠지.”
설마 체육 시간인데 넥타이를 맸으려고.
***
······나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 멀리뛰기를 하는 생도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아주 날아다니네.’
멀리뛰기가 맞긴 한 지, 8m를 가볍게 훌쩍 훌쩍 뛰는 생도들.
이런 수업이 의미가 있나 가끔 의문이 들곤 한다.
아, 참고로 이리나는 지각했다. 알고 보니 도중에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수업이 잠시 지체되었는데, 너도나도 이리나를 찾겠다며 다수의 학생이 움직였다.
어째 찾는 것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나는 그냥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우르르 몰려가는데 거기에 나 하나 없다고 있던 애가 증발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누군지 알아보긴 해야 하는데.’
나는 허공을 나는 이리나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리나, 7m 30cm.”
““와아아···!””
이리나가 모래에 안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환호가 터져 나온다.
반응만 보면 무슨 세계신기록이라도 세운 줄 알겠다.
모래판을 벗어나 내 옆으로 다가와 앉는 이리나.
무슨 향수라도 뿌리는지, 진한 복숭아 향이 코를 자극했다.
“잠깐 들고 있어 줄래?”
뛰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푼 이리나가 내게 머리끈을 맡기곤 양손으로 보랏빛 머리를 올려 묶었다.
드러난 흰 목. 턱선으로 떨어지는 땀방울. 체육복 위로 은근하게 드러난 상복부가 눈길을 잡아끈다.
‘확실히 예쁘기는 한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도들의 시선은 모두 이리나를 훔쳐보기 바빴다.
고릴라처럼 박수를 치는 곽진호야, 저 인간은 원래 저랬으니 그렇다 치고······
니콜라이 쟤는 왜 저러지?
쟤는 한세연 일편단심일 텐데.
필요 이상의 과도한 관심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뭐, 한창 혈기 왕성할 때이니 이성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긴 했다. 되려 관심을 안 주려는 내가 이상한 거지.
상념을 접으며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리니 마침 일레인이 뛰고 있었다.
유연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펭귄마냥 뒤뚱뒤뚱 움직이는 게 절망적인 몸치다.
분명 뛰는 것 같긴 한데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무슨 통나무 하나가 뛰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폴짝.
뒤뚱뒤뚱 걸어와 모래판 바로 위로 폴짝 떨어지는 일레인.
펭귄이 왜 날 수 없는지 알 것 같다.
삐이이익──!
휘슬을 분 곽진호가 매정한 점수를 외쳤다.
“일레인, 불합격! 0점!”
0점을 아주 우렁차게도 외쳐준다.
저거 교관 맞아?
“······.”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술을 오물거리며 돌아오는 일레인.
분명 처량해야 하는 모습이건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방과 후에 단약이라도 하나 들려줘야겠다.
***
······체육 시간이 끝나고, 이어진 2교시는 역사수업이었다.
이리나는 아직 교본을 지급 받지 못했기에, 이해솔 쪽으로 책상을 붙이려 했다.
수석이라는 것도 그렇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꽤나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탁─.
“?”
오른쪽 책상이 먼저 그녀의 책상에 딱 달라붙었다.
시선을 드니 반장이라던 여자아이가 방긋 웃고 있었다.
“첫날이라 교본 없지? 같이 보자.”
“···어, 응.”
이해솔한테 붙으려던 이리나는 아쉬움을 접고, 이름을 물어보려 입을 떼었다.
“한세연이야.”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묻기도 전에 돌아오는 대답.
“···세연이구나. 잘 부탁해. 이리나야.”
“응. 잘 부탁해.”
한세연이 방긋 웃어 보였다.
***
이터니티 아카데미의 수업은 수준이 굉장히 높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처음 듣게 된다면 익숙해지기까지 적응 기간이 필요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리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세연의 설명이 너무 친절하고 귀에 쏙쏙 들어왔던 것이다.
“마력 수치가 다르지? 기본 값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그래.”
“아, 그래서······”
알아듣기 쉬운 설명에 이리나는 저도 모르게 한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내가 아는 한세연은 먼저 나서서 다른 생도를 챙겨주는 애가 아니었다.
생도 쪽에서 먼저 다가와 물어보면 친절하게 챙겨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흥미가 없는 것에는 냉담하리만치 무관심한 게 바로 한세연이었으니.
‘마음에 들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마치 단짝처럼 붙어서 이리나의 수업을 도와주는 한세연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리나 밀러.
그것은 칠악. 색욕의 마인이 지닌 수많은 가명 중 하나였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데 누구보다 뛰어나며, 초인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마인.
강대한 힘을 지니고, 타고난 기운마저 속일 수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여지껏 숨을 죽이며 지내와야 했다.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다며 몸소 그녀의 능력을 거두어간 어떤 정신 나간 미치광이 하나 때문에.
오거스트.
이리나는 그 미치광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거스트가 죽으면서 그가 걸어두었던 ‘금제’가 풀린 것이다.
금제가 풀리자, 매혹의 봉인이 풀렸고, 그녀는 다시 초인사회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거스트가 죽었다지만, 언제 힘을 억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매혹’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제외하면, 순수한 무력에서 그녀는 칠악 중에서도 상당히 뒤떨어지는 편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이리나 밀러라는 가명을 써가며 이터니티에 들어오게 된 것도 그러한 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는 그녀의 부족함을 채워줄 그릇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이리나가 이터니티에 들어온 지 3일.
“매점 가는데 마실 거 사다줄까?”
“응. 그래주면 고맙지.”
“그거 이리 줘. 가면서 버려줄게.”
그동안 그녀는 같은 반의 생도들을 포로로 만들었다.
그녀가 조금 무례하게 대하더라도, 친절한 답이 돌아왔다. 사람을 홀리는 도화의 기운이 작용한 결과다.
물론, 다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에 교수진을 비롯한 몇몇은 아직 매혹에 걸리지 않았으나, 그도 시간문제였다.
모든 게 그녀가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부담이 가는 사람도 존재했다.
“여기 노트. 챙겨가야지.”
“···어, 응. 고마워.”
바로 지금 그녀가 잊은 물건을 챙겨주는 한세연이었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보듯 할 말을 먼저 말하고 앞서 행동하는 생도.
특히 옆자리의 이해솔에게 뭔가 도와 달라 하려 할 때마다 정말 우연찮게도 한세연이 먼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이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한세연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분명 나쁜 것은 아닌데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기에 내심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차마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고,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니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이리나가 태어나서 난생 처음 겪어보는 부류의 강적이었다.
‘혹시?’
세뇌가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그녀는 한세연에게 노트를 건네받으며 도화의 기운을 일으켰다.
휘이이이···
그녀에게만 보이는 자색 기류가 한세연의 코로 빨려 들어갔다.
이내 기류가 완전히 스며든 것을 확인한 이리나가 입을 열었다.
“세연아.”
“응, 왜?”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한세연.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반응에 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여자, 설마 이게 먹혀든 건가?
지금하는 한세연의 행동 자체가 세뇌의 결과인 듯했다.
‘그런데 왜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어이없네. 이리나는 황당해하며 교실을 나섰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세뇌가 아니었다.
‘레오크의 요괴를 깨워야 해.’
그녀가 가지지 못한, 순수한 무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터니티 필드의 어딘가에 잠들어있을 「레오크의 요괴」를 찾아 깨워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터니티에 들어온 이유를 상기시키며 교실을 나섰다.
“······.”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세연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