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이리나의 순수한 무력은 칠악중에서도 중하위권에 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위험도는 칠악 중에서도 단연 최상위권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바로 ‘세력’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인재가 있다면, 그게 마인이건 초인이건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게 바로 색욕의 마인이 지니는 무서움이었다. 그리고 이리나가 현재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인재란 바로 ‘이해솔’이었다.
교실의 모두가 도화의 기운에 중독된 와중에 오직 이해솔에게만은 그러할 기회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타이밍이 맞지를 않는 건지, 대화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우연찮게 한세연이 먼저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
교재를 함께 보려 하면 어느 순간, 책상이 옆에 붙어있고, 노트를 빌리려면 이미 노트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매번 이런 식이었기에 이리나는 여지껏 이해솔과 이렇다 할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나의 탐욕은 그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터니티 아카데미는 초인사회의 최상위권 인재들이 모이는 장소다.
하물며 그곳에서도 ‘수석’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그런 극상의 재료를 이리나가 놓칠 리 없었다.
“정리는 다 했어?”
“응, 고마워. 세연아.”
이리나는 싱긋 웃으면서도 속에서는 진절머리가 났다.
‘제발 좀 떨어져라.’
이리나는 최근,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한세연 탓에 탈모가 올 지경이었다.
뭐만 할라치면 한세연이 꼭 빠지지 않고 달라붙었으니.
친절도 과하면 정신이 나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한세연으로 인해 경험하고 있었다.
이제는 한세연의 웃는 얼굴만 봐도 현기증이 올라왔다.
떨어져 주기만 하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기회란 보란 듯이 찾아왔다.
나흘째 이해솔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시던 점심나절. 한세연이 학급 업무로 자리를 비운 것이다.
비록 점심시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상관없었다.
기회만 있다면, 일개 생도를 함락시키는 것쯤이야, 그녀에게는 일도 아니었으니.
교실을 나서는 이해솔을 바라보며 이리나가 혀로 붉은 입술을 핥았다.
***
나는 매점에서 빵을 고르고 있었다.
마치 전세라도 낸 듯, 매점에는 카운터의 아주머니를 제외하곤 사람이 없었다.
12시 15분.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어중간한 시간이야말로 매점에 사람이 없는 황금시간대였다.
아카데미의 급식은 레스토랑 뺨을 칠 만큼 퀄리티가 좋았기에 매점에서 점심을 떼우는 생도가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물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아멜리아가 가끔 빵타임을 즐기러 출몰하긴 한다.
아무도 없는 매대 사이에 숨어 메론빵을 오물거리며 웃음꽃을 활짝 피우는 게 아멜리아의 고상하지 못한 취미였으니까.
여지껏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오늘은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매일 습관처럼 빵셔틀을 자처하다 보니 최근 들어 출몰의 빈도수가 잦아들고 있긴 했다.
이게 빵을 사주는 게 호구처럼 보일 순 있겠으나, 나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1000원 짜리 빵 하나로 부리기에 아멜리아는 굉장한 ‘고급인력’이었으니까.
가성비가 그냥 미쳤다.
가끔 빈손으로 가면 왜 빵이 없냐며 순진하게 물어봐서 얘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어이가 없긴 했지만······ 뭐, 그만큼 길들였다는 소리이니, 참을만했다.
“흐음······”
우선적으로 매대의 메론빵부터 챙긴 나는 냉장 코너에서 알프스 물로 유명한 브랜드 생수를 꺼내 테이블에 앉아, 뚜껑을 땄다.
지금 급실실에 가면 줄을 서야 하니, 느긋하게 시간을 죽이다 생도들이 빠져나간 뒤에야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모금 혀를 적시는데, 진한 복숭아향이 훅 끼쳐왔다.
“여기 있었네?”
뺨을 간질이는 화려한 보랏빛 머리. 불쑥 고개를 내민 건 이리나였다.
뭐라 하기 전에 고개를 치운 이리나는 시선이 마주치자 장난스레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그런데 ‘여기있었네?’라니?
“나 찾았냐?”
“응.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맹랑하게 내 옆자리에 앉은 이리나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알프스 물을 입가에 가져간다.
붉은 입술 사이로 넘어가는 맑은 액체.
뱀처럼 뻗어 나온 혀가 젖은 입술을 요염하게 핥는다.
아침이슬이 맺힌 잎사귀처럼 촉촉이 젖은 입가가 은근히 색정적이었다.
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리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물 왜 마셔?”
“······.”
“입 댔으니까, 그건 너가 다 마셔라.”
이리나의 얼굴이 멍하니 풀어졌다. 내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뭐 물어본다며. 빨리 얘기해. 밥 먹으러 가야되니까.”
“···어, 응.”
이내, 표정을 수습한 이리나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연이하고는 무슨 관계야?”
“그건 너가 알아서 뭐하게.”
“너한테 관심이 있거든.”
말과 함께 이리나가 은근슬쩍 몸을 밀착해왔다. 부드러운 감촉이 팔뚝을 지그시 압박했다.
“뭐 하는 짓이야?”
인상을 구긴 내가 이리나를 밀어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이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대의 코너 사이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 한세연이었다.
이리나를 쳐다보니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
진부한 삼류 멜로물에서나 나올 법한 전개에 입가로 헛웃음이 새었다.
얘가 갑자기 들러붙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만, 한세연이 들어오는 걸 보곤 이 짓거리를 한 모양이었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데, 내 어깨를 두드린 이리나가 나중에 보자며 일어났다.
한세연을 지나치며 반갑게 인사를 해 보이곤 매점을 나가는데, 그 걸음이 굉장히 가벼워 보였다.
고소하다는 느낌이다.
“진짜 미친년이네······”
순식간에 지나간 상황에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는데, 한세연이 다가왔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내 앞으로 내밀어지는 붉은색 종이.
[식권 00001]
“아직 밥 안 먹었지?”
스마트폰을 보니 점심시간이 반이 넘게 지나가 있었다. 식권의 발급이 끝난 시간.
“···어, 고마워.”
얼떨결에 식권을 받아든 나는 한세연을 보며 갸웃거렸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태도였던 것이다.
······방금 그걸 못 봤나?
물어보기 껄끄러웠으나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방금, 못 봤어?”
“뭐를?”
갸웃거리며 되려 물어보는 한세연.
뭐야, 진짜 못 봤나?
아니, 못 봤을 수가 없을 텐데.
여긴 누가 봐도 매대 사이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으니까.
그런데.
“해솔이는 별 마음 없었잖아.”
역시 못 본 게 아니었다.
“아니야?”
“···어, 맞지?”
“그럼 된 거지.”
“그렇네.”
“응, 밥 먹으러 가자.”
식사를 하러 가자며 나를 이끄는 한세연. 그에 뒤따라가며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내가 왜 이런 변명 같은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나, 한세연의 태도를 보자니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보통 이게 맞나?’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생각을 비워버렸다.
***
“흥흥~”
이리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짐을 진 채 필드의 숲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시원함이었다.
이런 기분은 오거스트에게 힘을 봉인당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처음의 목적은 이해솔을 꾀어내는 것이었으나, 그건 뒷전이고, 한세연에게 물을 먹였다는 것이 오히려 더 통쾌했던 것이다.
그래봤자 달리 취할 이득도 없건만, 이상할 정도로 고소했다.
진절머리 나게 방해하던 여자에게 시원하게 한 방을 먹여주었으니.
설마 그런 장면을 연출했는데 또 웃으면서 나타나지는 않겠지.
상상만으로도 머리에 현기증이 올라왔다. 그랬다가는 정말 호러였다.
고개를 저어 끔찍한 상념을 털어낸 이리나가 앞을 바라보았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은 공터. 녹이 슨 검이 꼽혀 있었다.
그 검은 대마수, 「우르크의 요괴」를 봉인한 매개물이었다.
그녀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를 이용해 이렇듯 우르크가 봉인되어 있는 검에 마기를 주입하고 있었다.
이리나의 몸에서 일어난 자색의 기류가 검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반쯤 뽑혀 있던 검이 조금이지만 위로 올라갔다.
“일주일은 걸리겠네.”
이리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오늘 있던 일도 그렇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일주일 후면, 그녀는 우르크의 요괴를 얻게 되는 것이다.
화사한 미소를 지은 이리나는 이내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뚝 굳어졌다.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눈앞에서 방긋 웃고 있는 것은 바로 한세연이었다.
“···어, 조, 좋은 일?”
“응.”
당혹해하던 이리나의 표정이 문득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얘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은 이터니티의 필드였다. 그것도 제법 깊숙하면서도 은밀하게 숨겨진 곳이었다.
바로 대마수, 「우르크의 요괴」가 봉인된 장소. 한세연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흐음, 저 검을 뽑으려는 거구나.”
이리나의 등 뒤. 지면에서 반쯤 뽑혀 나온 검을 바라보며 한세연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리나는 한세연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 현혹이······”
“현혹?”
“······.”
갸웃거리는 한세연을 보며 이리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한세연은 처음부터 현혹에 빠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짜증 났는데 차라리 잘됐어.”
금세 당황을 지운 이리나의 몸에서 자색의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짙은 복숭아 향기가 숲에서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세연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약지에 끼워진 「심연의 반지」에 어둠이 찰랑였다.
“······마기?”
반지를 감싼 어둠을 본 이리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놀람은 잠시였고,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순간, 자색의 기류에 휩싸인 어둠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지워졌다.
이리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농염해졌다.
어둠은 지워진 게 아니었다.
자색의 기류에 먹혀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처럼 타인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게 가능했다.
하물며 그게 마기라면 이리나로서는 오히려 기운을 회복시켜주는 맛 좋은 포션에 불과했다.
오거스트가 만들었던 마기를 흡수하는 괴인의 오리지널이 바로 이리나였던 것이다.
그녀는 원본인 만큼, 그보다 더욱 많은 마기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그녀와 동급인 칠악이나 혹은 그보다 강한 오마가 상대라면 마기의 흡수는 되려 독이었다.
자신보다 그릇이 큰 존재의 마기를 탐냈다간, 그녀가 먼저 탈이 나버릴 테니.
하지만 그 외의 존재라면 마기를 취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한세연은 오마도, 칠악도 아니었다. 그러니 거리낄 것이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이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한세연의 입가도 올라갔다.
***
······이리나의 웃음이 지워지기까지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맑았던 숲은 자색의 기류로 자욱하다 못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이리나의 기운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강해졌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어, 언제까지··· 우욱···!”
말을 하다 말고 이리나가 입가를 가렸다. 그런 그녀의 완숙한 몸은 평상시보다 풍만해져 있었다.
“그, 그만···욱!”
입가를 가린 손 사이를 비집고 밀려 들어가는 어둠.
이리나는 입을 다물려 했으나, 입가로 밀려드는 어둠은 미역줄기마냥 끊임이 없었다.
토해내고 토해내도 억지로 다시 쑤셔 넣어지는 마기에 그녀는 눈물이며 콧물을 질질 쏟아냈다.
“미, 미아··· 내가 잘못······”
견디다 못한 이리나가 한세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미친 듯이 빌었다.
그제야 입가로 밀어 넣어지던 어둠이 뚝 그쳤다.
“우우욱······”
이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속을 계속해서 비워냈다.
“허억, 허억.”
한참을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어렵사리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부르르 떨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세연이 방긋 웃고 있었다.
“늦겠다. 수업 가자.”
***
“어디 갔던 거야?”
나는 교실로 들어서는 한세연을 보며 의아해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라지더니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에야 이리나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잠깐 산책.”
“산책?”
“으, 응. 산책 다녀왔어.”
이리나가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이리나를 보며 갸웃거렸다.
‘살이 좀 찐 거 같은데?’
보기 좋아 보였던 그녀의 늘씬한 몸에 제법 살이 올라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색도 좀 파리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리나가 돌연 입가를 가리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런 이리나의 등을 한세연이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괜찮아?”
한세연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흠칫거린 이리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표정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한세연은 입가에 검지를 올린 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으, 응. 괘, 괜찮아.”
“?”
느닷없이 한세연을 보며 부르르 떨어 보이는 이리나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세연을 돌아보니 그냥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쓰지 마.”
이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도망치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눈만 깜빡였다.
어차피 옆자리인데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