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이터니티에 들어온 사흘간이 이리나에게 ‘희망편’이었다면, 그 다음부터 이어진 건 ‘절망편’이었다.
“탐구 교본 아직 못 받았지? 같이 보자.”
“그······”
입을 꾸물거리며 답을 늦추는 이리나를 보며, 한세연이 갸웃거렸다.
“싫어?”
“아, 아니야. 싫기는. 당연히 좋지.”
“다행이다. 싫다는 줄 알았어.”
활짝 웃으며 책상을 바짝 붙이는 한세연. 이리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한세연은 이리나가 수업의 진도를 따라갈 수 있게끔 친절하게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리나는 수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세연은 생글생글 웃고 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녀에게 마기를 강제로 먹일 때도 한세연은 줄곧 저 얼굴 저 표정이었으니까.
그녀가 딴생각에 빠지자, 친절히 설명해 주던 한세연이 잠시 말을 멈추곤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미, 미안.”
화들짝 놀란 이리나가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했다. 얼른 인상을 피고, 펜을 들었다. 움츠렸던 어깨도 최대한 정상인 것처럼 굴었다.
그러자 한세연이 다시 상냥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흐윽.’
이리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조금도 싫은 내색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또 그 끔찍한 식고문을 당할 것만 같아 너무 두려웠다.
***
한세연은 그날 이후로 평소처럼 이리나를 대했다.
마치 그녀에게 마기를 강제로 먹인 일은 없다는 양, 그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까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달라진 게 하나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리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날의 식고문이 트라우마로까지 새겨져 버린 이리나는 한세연의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흠칫흠칫 반응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그녀는 저녁마다 몰래 필드에 들어가 「우르크의 요괴」를 깨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주눅이 들어 있는데 캥기는 짓까지 하다보니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우르크의 요괴를 얻을 때까지만이었다.
우르크의 요괴만 얻으면 그녀는 더 이상 한세연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행히 한세연은 그녀가 뒤에서 이러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리나가 들인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의심을 걷어내기 위해 점심이고, 방과 후고 한세연의 곁에 시녀처럼 붙어 다니며 학급일을 도운 것이다.
“화분은 창가에다 놔줄래?”
“시험지는 번호순대로 정리하면 돼.”
“수고했어, 책상 한 번 닦자.”
······어쩐지 점점 잡일꾼처럼 부려져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리나는 현실을 외면했다.
칠악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리나로서는 저보다 한참 어린 여자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으므로.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었다.
그녀의 노력 끝에 우르크의 요괴는 깨어날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넌 죽었어.’
행주로 책상을 닦으며 한세연을 본 이리나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순간, 눈이 마주친 한세연이 갸웃거리더니 마주 빙긋 웃어주었다. 이리나는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
······시간이 지나 다가온 종례. 그러니까, 우르크의 요괴를 깨울 결전의 시간.
이리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한세연을 흘낏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책상을 정리하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는 것에서 눈치를 챈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모르는 듯했다. 그렇게 이리나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한세연의 손이 슬쩍 올라가자, 이리나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위이이잉─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던 그녀는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보곤, 어색하게 말았던 몸을 풀었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분홍색 손풍기가 귀엽게 돌아가고 있었다.
“땀 흘리는 것 같아서.”
“으, 응. 고마워.”
긴장한 탓에 땀이 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턱선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이리나가 한세연을 쳐다보았다.
싱긋 웃어 보이는 게 암만 봐도 눈치를 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자신을 이리 가만히 놔둘 리 없었으니까.
‘이제 넌 죽었어.’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이리나가 재빨리 내려 보였다.
***
······방과 후, 이리나는 누가 쫓아오나 거듭 주변을 확인하면서 필드로 몰래 들어섰다.
그렇게 숲을 지나, 우르크의 요괴를 봉인해놓은 검 앞까지 온 이리나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여기까지 온 이상 일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되었으나, 그녀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도화의 마기를 풀어버렸다. 그 무서운 년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불안했으니까.
갑자기 불쑥 웃는 얼굴로 나타나서 마기를 입에다 쑤셔 넣을 것만 같았다.
“···우욱. 씨.”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선 하던 일을 마저했다.
이윽고, 녹이 슨 검으로 스며 들어가는 자색의 연기.
지면에 박혀 있던 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뽑혀 나갔다.
그리고.
스아아아아······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불길한 어둠이 피어올랐다.
키이이──
그곳에서 울려오는 작은 짐승의 울음소리에 이리나가 웃음을 흘렸다.
우르크의 요괴.
그것은 대마인, ‘영멸의 밤’이 기르던 한 쌍의 고위마수를 가리킨다.
오거스트가 데리고 있던 흑요, 그리고 이터니티에 봉인 당한 여우마수, 요호(妖狐)가 바로 그 둘이었다.
이리나는 지금 그 둘 중 하나인 요호를 깨운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 환희가 맺혔다.
오랜 봉인에서 풀려난 것이 무색할 만큼, 요호는 방대한 마기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요호를 봉인에서 풀어주었으니, 이제 그녀가 녀석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뻐라.”
화려한 갈색 털. 또랑또랑한 붉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이 벌써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왜 안 오니?”
움질일 생각을 안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요호를 보며 이리나가 갸웃거렸다.
그때, 그녀를 올려다보던 요호가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이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요호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았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숲의 어둠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청순한 외모. 그에 어울리는 옅은 미소를 띈 생도.
한세연이었다.
그녀는 요호를 보더니, 이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 이게 뭐냐는 듯.
시선이 닿은 이리나가 움찔 떨었다. 주눅든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리나는 기가 팍 꺾여버렸다.
그도 그럴 게, 트라우마가 새겨진 장소에서, 그 트라우마를 새긴 장본인을 마주하게 되니 PTSD가 올라오는 것이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침을 꿀꺽 삼키며 그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으니까.
그녀 혼자라면 모를까, 요호라는 대마수까지 얻은 마당에 질 리가 없었다.
‘그래, 괜찮아. 저년한테 질 리가 없어.’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자존심을 회복한 이리나아가 어깨를 펴며 앙칼지게 외쳤다.
“그때처럼 내가 당할 것 같아?”
“······흐음. 그래?”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움찔 떨은 이리나가 그것을 감추듯 소리쳤다.
“감히 내게 마기를 먹여!? 너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어.”
한세연은 그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 재수없는 아가리에 마기를 처먹여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게 만들어 줄게.”
“······.”
“돼지 년으로 만들어서 눈도 못 마주치게끔 예절교육을 시키겠어.”
그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오른 이리나가 토해내듯 소리쳤다. 조용히 듣고 있던 한세연이 물었다.
“더 없어?”
“······하, 너 미쳤니? 그래. 목줄을 채우고 개만도 못한 노예로 부려서, 내게 덤빈 걸 평생 후회하게 해줄게.”
“조금 부족하지만, 나쁘지 않네.”
“뭐?”
이리나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뭐, 뭐야?!”
요호가 한세연에게 달려가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부빈 것이다.
마치 어미에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요호의 모습에 이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왜! 왜! 내가 깨웠는데!”
“글쎄, 내가 더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
품에 안겨, 새끼처럼 끼이끼이 울어 재끼는 요호의 머리를 한세연이 쓰다듬었다. 그러다 이리나를 쳐다보았다.
움찔. 이리나가 활어처럼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뒤늦게 자신이 한 말들이 떠오른 것이다.
“처음에 뭐랬더라?”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 갸웃거리던 한세연이 떠올랐다는 듯 방긋 웃었다.
“우선 마기부터 먹자.”
“아, 아니, 그게······”
한세연의 반지에서 마기가 스멀거리며 다가오자 이리나가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내, 내가 잘못 말했어. 미안. 그, 그냥 농담으로 해본 소리야. 으응, 농담! 농담으로······우욱!”
벌어진 입으로 마기가 강물처럼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밀려드는 마기를 양손으로 잡아 뽑아내려 했으나, 마기의 물결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리나의 늘씬한 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빵빵한 게 바람을 꽉 채운 풍선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세연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궁금하다는 듯, 이리나에게 꾸역꾸역 마기를 먹였다.
“어, 욱!”
숨이 막힌 이리나가 바닥을 치며 바동거리자, 그제야 마기가 잠시 끊겼다.
“흑, 흐윽!”
땅을 짚고 미친 듯이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어깨를 떨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런 이리나를 달래주듯 한세연이 등을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다 쉬었어?”
“내,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흑, 흐윽.”
저녁의 노을이 져오는 공터. 이리나의 울먹거림이 필드에 울려 퍼졌다.
***
······어느 날부터인가 이리나는 하루하루 살이 쪄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던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가버렸는지, 그녀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말수는 부쩍 줄고 무척이나 소심해졌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후덕해져 가는 그녀에게서는 처음의 농염함이나 색기는 온데 간데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그녀에게 향하던 반 아이들의 관심도 수그러들었다.
조금 짓궂은 아이들은 그녀가 병이 걸린 게 아니냐며 뒤에서 수군댔다.
그런 이리나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오직 한세연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단짝처럼 앉아 상냥하게 대해주는데 천사가 따로 없었다.
체한 이리나를 양호실에 데려다주는 모습은 돼지와 미녀다.
아무튼,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더 흘렀을 때였다.
“이리나가 건강이 좋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지병이 악화되었다고 하더구나.”
역시, 병이 걸렸었구나.
하진우의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을 해보였다.
처음만 해도 교내를 평정하다시피 했던 이리나의 변화는 병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갑작스러웠으니까.
그리고 이리나가 사라진 내 옆자리에는 언제나처럼 한세연이 앉아있었다.
교재를 안 가져왔다며 나한테 책상을 붙이고 앉아 책을 함께 보는 그녀의 입가로 싱그러운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