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수많은 마인들이 새까맣게 몰린 공터. 나는 그 마인들의 중심을 태연하게 거닐었다.
“끄어어···”
“크으.”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마인들은 내게서 풍겨오는 기운을 견디지 못했다.
[용의 격(SSS)].
용의 존재감이란 한낱 하급 마인 따위가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털썩, 털썩, 털썩······
내가 걷는 길을 따라 마인들이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일대의 장관이 연출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광경.
‘용의 격’을 최대출력으로 발현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어느새 공터의 중앙에는 나와 내 한걸음 뒤의 소피아만이 서 있었다.
그 괴멸적인 풍경에 최아린과 이든마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내 걸음의 끝에 선 마인은 경악어린 표정으로 쓰러져 내리는 마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선이 얇상하고, 유난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동양계 남자.
이곳을 총괄하는 마인이자, 십혈의 일인인 ‘액터(Ator)’였다.
도플갱어의 능력을 지녀 누구로든 변이가 가능한 까다로운 마인.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어진 둥그런 볼.
“아서라.”
“······.”
“그거 던지면 너, 죽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액터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뚜벅뚜벅─
“······.”
액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러나 녀석은 끝내 내가 다가갈 때까지 볼을 던지지 못했다.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던지려는 시늉이라도 보인 순간, 액터의 머리는 날아갔을 테니까.
내 기력은 어느새 그의 머리 부근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근접거리에서 그것도 용의 격에 정신마저 짓눌린 상황이라면 아무리 액터라도 기력에 반응하기란 어려웠다.
바로 이렇게.
콰앙─!
녀석의 영핵이 부서져 나갔다. 이내, 눈을 까집으며 뒤로 넘어가는 액터. 나는 굳이 녀석을 죽이지 않았다.
‘도플갱어’의 능력자는 여간해서는 찾기 어려운 귀한 능력자였으니. 약간의 ‘교육’은 필요해 보였지만.
“소피아씨. 이 녀석, 맡겨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소피아가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핥아 보였다.
“확실하게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먹잇감을 얻은 것처럼 씨익 웃어 보이는 소피아. 그 모습을 보자니 액터가 조금 불쌍해졌다.
이런 ‘사상교육’ 하나는 소피아가 똑 부러지게 잘하니까······. 물론 경우에 따라 가끔 다른 것이 부러지기도 한다. 소피아의 교육에는 약간의 ‘무력’이 동반되기도 하니.
액터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십혈을 맨주먹으로 때려잡은 전적이 있는 소피아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최근에는 영멸의 마인과의 접전으로 인해 실력에 향상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기다리고 있어.”
“크르르······”
내 말에 공터에 몸을 만 흑요가 대답하듯 으르렁거렸다.
처음에는 나를 경계만 하던 녀석이 ‘용의 격’을 얻은 뒤로는 기이할 정도로 온순해졌다.
‘그림자용’이 용족의 계보를 잇는 존재이기에 이와 연관이 있는 것이리라.
“구경이나 좀 해볼까.”
나는 절벽에 난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블랙마켓 4층, 어퍼에 마련된 색욕의 마녀, 이리나의 거처.
우울한 적막만이 가득하던 그곳에서는 모처럼 만의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하하하!”
대리석 테이블에는 마치 생일파티라도 하듯 붉은 레드벨벳 케이크와 촛불이 켜진 초들이 꽂혀 있었다.
빠앙──!
이리나가 생일 폭죽을 터트리며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멍청한 년, 진짜 갈 줄이야.”
오늘은 그녀의 ‘해방’을 자축하기 위한 기념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마녀’가 아카데미의 최심부 탐사에 동행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리나는 결과는 듣지 않았으나, 한세연이 죽었으리라 확신했다.
이번 탐사에 함정을 판 이가 바로 그 ‘영멸의 밤’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셀로스에 십혈까지 가담했으니, 한세연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으음~ 맛있어.”
포크로 케이크를 슬쩍 떠먹은 이리나가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만에 먹는 케이크의 맛은 너무나도 달았다.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로 요 몇 주 간 물만 마시느라 홀쭉 말랐던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생기가 어렸다.
“여기 물도 마셔.”
“응, 고마어버버법-!”
눈앞에 내밀어진 물잔을 받아들던 이리나가 돌연 입안의 케이크를 모조리 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이리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응?”
이리나의 옆자리.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는 여자는 바로 한세연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조용하다 싶더니, 그녀의 수하 마인들은 모두 부동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너, 넌 분명 죽었어야웁······”
말을 잇던 이리나가 양손으로 제 입가를 틀어막았다.
“아, 아니. 그게 이건-”
“초, 안 불어?”
“으,응. 부, 불게.”
케이크 위의 초들을 불어 끄는 이리나.
“추, 축하드립니다. 이리나님.”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수하들의 경직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이리나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런 이리나를 유심히 쳐다보던 한세연이 돌연 손바닥을 짝! 쳤다. 움찔한 이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왜?”
“왜 이상한가 했는데, 살이 많이 빠졌네.”
그 가벼운 한마디에 이리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미, 미안, 관리할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크로 허겁지겁 케이크를 떠먹는 이리나.
사례가 들렸는지 우웁- 입가를 꿀렁였으나 억지로 케이크를 마구 욱여넣었다.
“허억, 헉. 훅.”
폰 케이크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숨을 헐떡이는 이리나에게 한세연이 물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물을 마시는 이리나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던 한세연이 그제야 저택을 찾은 용건을 꺼냈다.
“다른 칠악과 십혈들의 거처를 알아?”
“응. 아는데 왜?”
“여기서 가장 가까운 건?”
“검공이야.”
“그럼 그쪽으로 가자.”
“응. ···어, 어?”
무심코 대답하던 이리나는 뒤늦게 대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곤 설마 하는 눈으로 한세연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잡으려고?”
“안 돼?”
순진하게 갸웃거리는 한세연. 이리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검공은······”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세연을 본 이리나가 재빨리 앞장섰다.
이젠 뭐가 어떻게 되든 놀랍지 않았다. 이리나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
마경의 집거지란 크루트의 소재가 되는 마수를 포획하는 장소다.
하지만 마경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그뿐이 아니다.
이곳에는 마경에서 죽은 이들의 유품, 혹은 보구들이 산재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
“쓸만한 것도 있네요.”
잡동사니들이 굴러 디니는 먼지 먹은 창고. ‘보구’로 보이는 이가 빠진 검을 발견한 내가 눈을 빛냈다.
[흥, 낡아빠진 검이구나.]
“그래요? 다시 가공해서 쓰면 괜찮을 것 같은데.”
문득 그람이 훨씬 더 오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말했다간 왠지 삐질 것 같아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이게 한 번 삐져버리면 동화율이 떨어져서 안 된단 말이지.
그나저나.
[빛의 정령, 아나스타샤가 경험치를 20을 획득했습니다.]
[불사조가 경험치를 20을 획득했습니다.]
[빛의 정령, 아나스타샤가 경험치를 20을 획득했습니다.]
[빛의 정령, 아나스타샤가 경험치를 20을 획득했습니다.]
[불사조가 경험치를 20을 획득했습니다.]
.
.
.
.
내가 창고를 둘러보는 사이 아나스타샤와 파랑이는 지하에 포획된 마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갇힌 채로 죽어가던 녀석들을 잡는 거야, 별 거 아니었으니 사냥의 속도는 어마무시했다. 반면 경험치는 그대로 들어오니······.
그렇게 경험치 메시지가 어느 순간, 뚝 끊기더니 떠오르는 메시지.
띠링!
[마인들의 집거지를 소탕했습니다! 보상으로 3000SP가 지급됩니다.]
‘노다지네.’
이런데 어디 더 없나?
나가면서 물어봐야겠다.
***
······나는 기절한 마인들을 최아린에게 일임했다.
마침 오거스트에게서 그녀에게로 편입된 ‘화국’은 부숴진 시설들을 재건하느라 매일 일손 부족에 시달리는 모양이었으니까.
100명이나 되는 마인들이 일손으로 투입되면 환영받지 않을까 싶다.
한편, 십혈이었던 액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은가예의 수련 상대가 되어버렸다.
서리의 안개 속. 은가예를 상대로 막거나 피하며, 적당한 반격을 하는 액터를 보며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저거, 저렇게 내버려 둬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제가 잘 교육시켜 놓았습니다.”
호언장담하듯 대답하는 소피아. 액터를 흘낏 바라본 내가 뺨을 긁적였다.
“···그런 것 같네요.”
아닌 게 아니라, 액터의 영혼에는 악감정이란 게 일절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의욕을 상실한 듯해 보이는 게 은가예에게 해를 가할 리는 없어 보였다.
참고로 액터가 저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사흘’이었다.
대체 사람을 어떻게 굴리면 사흘 만에 마인이 저리 온순해질 수 있는지 미스테리였다.
“그런데 세연이는 어디 갔는지 못 봤어요?”
“산책을 가신다며 나가셨습니다.”
“산책이요?”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방과 후만 되면 볼 일이 있다며 사라지는 한세연이었다. 그런데 산책이라니······.
‘어디 간 거지?’
짐작 가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
“여기야.”
대자연이 살아 숨 쉬는 듯한 거대한 밀림.
숲속에 지어진 한 채의 오두막을 가리키며 이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그런 이리나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저 오두막의 주인은 평범한 야인이 아니었다.
검공(劍公) 가스턴.
초인으로서 최상격의 기량을 발휘하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마인이 된 이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세간에서는 ‘십혈’로 분류가 되어 있으나, 그것은 가스턴이 대외적인 활동을 보인 적이 없어서였다.
이리나가 파악하기로 가스턴의 무력은 칠악에 견주어도 밀리는 바가 없던 것이다.
무력으로만 따지면, 칠악 중에서도 최약체에 속하는 이리나보다 윗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이리나가 불안에 떠는 이유였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불똥이 튈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리나는 가스턴의 위치를 찾아 본다며 시간을 질질 끌다가 오늘에서야 한세연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이런 이리나의 불안과 달리 한세연은 오두막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휴우.”
이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가스턴은 자리를 비웠는지 오두막에는 불이 꺼진 화로만이 존재했다.
한세연이 몸을 돌리자, 이리나가 설득하듯 입을 열었다.
“···없는 것 같으니까, 다음에 다시 오-”
“누구신가.”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목소리.
돌처럼 굳어진 이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그곳에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백발의 검사가 홀연히 서 있었다.
한세연이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가스턴?”
“맞네. 내가 가스턴이네.”
백발의 검사.
검공 가스턴이 서슬퍼런 기광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