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맞네, 내가 가스턴이네.”
그리 대답한 가스턴의 눈매가 좁혀졌다.
“······보아하니 좋은 목적으로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
“우,엇!”
이리나가 기겁하며 한세연에게서 떨어졌다.
가스턴이 맞음을 확인한 직후, 한세연의 반지에서 어둠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 세연아. 일단 대화부터 해보는 게 어떨까?”
이리나는 당황을 했음에도 최대한 한세연을 말리려 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에게 있어 가스턴은 어떤 의미로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갓 마인이 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던 이리나에게 마기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던 은인이 바로 가스턴이었으니······.
자신의 말이 먹히는 것 같지를 않자 이리나는 가스턴에게 눈을 부라렸다.
당신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는데, 뭐하냐고 빨리 말려달라는 눈빛.
“허허헛.”
이리나의 눈짓을 받은 가스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못 본 사이에 살이 많이 쪘구나.”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고!”
“미안하지만, 나는 상대를 쉽게 용서하는 이가 아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리나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가스턴은 무언가 대단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짓을 한세연을 봐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딱, 그 정반대의 신호이건만.
“아니, 지금 당신이 위험-”
“걱정 말거라. 죽이지는 않을 테니.”
“야이-”
가스턴은 손을 들어 기막을 펼쳤다.
얼굴을 구긴 이리나가 뭐라뭐라 소리치고 있었으나, 입만 움직임뿐, 소리는 차단되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주위가 조용해진 뒤에야, 가스턴이 한세연을 바라 보았다.
“호오,”
반지의 적마석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가스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마기의 질이 제법 좋구나. 그 반지는 보구인가 보군.”
대개 마인들의 마기는 그 질이 좋지 못하다.
질을 높이는 건 뒷전으로 두고, 마기의 양을 늘리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스턴은 양보다 질을 높이는 것에 중점을 두는 마인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한세연의 마기는 놀랄 정도로 질이 좋았다.
필시, 그녀가 찬 ‘반지’가 마기를 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리라.
겉보기와 달리 대단한 보구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도구에 의존해 얻은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가스턴이 피식,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도구를 사용하면 능력을 높일 수는 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스스로가 갈고 닦아 쌓아 올린 능력과 도구의 힘을 빌린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도구를 이용한 공격은 그 활용성의 폭이 좁을뿐더러, 기술마저 한정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물며 도구를 이용해 마기의 질을 높이는 것은 그 한계점이 명확했다.
수십 년을 갈고닦아온 자신의 마기보다 강한 위력을 지닐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가스턴은 한세연이 어떠한 공격을 해오든 간에 가볍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이리나의 소리마저 기막으로 차단할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가 있는 것이다.
반지에서 어둠을 뿜어내는 한세연의 모습이 가스턴에게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좋은 보구를 얻었다고 자랑하는 손녀의 재롱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직도 기막의 바깥에서 뭐라 뭐라 소리를 질러대는 이리나에게 가스턴이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가볍게 타이르기만 하마.”
“···뭐라는 거야?”
가스턴의 말을 들은 이리나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전력을 다해 도망가도 모자를 판에 가볍게 타이른다니?
‘저 인간이 노망이 났나.’
기가 차고,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이리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을 해줄 의리도 없거니와, 말을 한다 해도 들어 처먹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솔직히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리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을 구경했다.
한편 이런 이리나의 생각을 모르는 가스턴은 그녀가 예상보다 거리를 훨씬 많이 벌려 보이자 헛웃음을 흘렸다.
“명색이 색욕의 마녀가 겁이 많아졌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한세연을 향해 호기롭게 손을 까딱였다.
“언제든지 공격을 해보시게.”
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원하게 쇄도하는 어둠.
“제법···!”
사뭇 거세 보이는 기세에 눈을 빛낸 가스턴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마기가 어둠을 잘라내려는 듯, 가로로 그어진다. 하지만 기세 좋게 날아가던 마기는 어둠과 충돌하자 녹아들 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밀어닥치는 마기.
“헛!”
깜짝 놀란 가스턴이 그제야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꽈아앙─!
초승달처럼 뻗어나간 마기가 어둠과 충돌하며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그 소음을 뚫으며 밀어닥치는 어둠에 가스턴이 황급히 몸을 피했다.
콰드드드득──!
그가 있던 자리의 풍경이 갈려 나갔다.
나무, 돌, 지면······ 어둠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간 듯한 흔적만이 존재할 뿐.
“······.”
아슬아슬하게 상황을 모면한 가스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자신도 저기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걸 깨닫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여인이 다루는 어둠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월등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기는 했으되, 지레 겁을 집어먹지는 않았다.
지금의 열세는 자신이 상대를 얕잡아보았기에 벌어진 실수였다.
방심하지 않는다면 분명 지금과 같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으리라.
가스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제대로 가겠네.”
눈을 반개한 가스턴의 검으로 초승달의 마기가 맺혀 들었다.
후아악─!
반월형의 마기는 쏘아지기 무섭게 공간을 뛰어넘어 한세연의 면전에 나타났다.
그리고, 사라졌다.
“···뭐야?”
지켜보던 이리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가스턴의 검에서 쏘아진 마기가 한세연의 앞에 나타나나 싶더니 돌연 사라져버린 것이다.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가스턴의 굳어진 표정을 보니 틀림없었다.
한편, 멀찍이 떨어진 옆에서 보았기에 결과만을 알 수 있던 이리나와 달리, 정면에서 한세연을 마주한 가스턴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눈은 경악으로 벌어졌다.
“내 마기를······”
······잡아먹었어? 멍하니 중얼거리면서도 가스턴은 자신이 한 말이 믿기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잡아먹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세연에게서 일어난 어둠이 그의 마기를 덮쳐버린 것이다. 마치 어둠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스스─
그때, 한세연의 발치가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화선지를 물들이는 먹물처럼 번져나가는 어둠.
마치 늪처럼 어둠은 지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자갈, 나뭇가지, 풀잎, 벌레······ 그 전부가 번지는 어둠에 수몰되어 버린다.
“흐아합!”
가스턴에게서 커다란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검이 찰나 지간 17차례의 검로를 그렸다.
17차례의 검격은 17개의 마기를 파생시켰고, 각기 다른 각도로 휘어지며 한세연의 사방을 노렸다.
전후좌우, 하늘까지 점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마기의 감옥.
그것들은 평범한 마기가 아니었다.
17개의 마기는 하나하나가 모두 마기의 결정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순도를 자랑했다.
재능을 타고난 천재가 수십 년의 세월을 받쳐 이루어낸 마기의 정화인 것이다.
─천라마우(天羅魔雨).
순수한 어둠의 칼날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세연을 옥죄어왔다.
그녀가 이 칼날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빠져나올 필요가 없었다. 한세연이 칼날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지면을 물들였던 어둠이 활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한 마리의 대어처럼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솟구쳐오른 어둠은 그대로 공간을 집어삼켰다.
이윽고 그것이 가라앉았을 때, 17개의 마기는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
그 압도적인 광경에 가스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지닌 마기보다 더욱 순수한 어둠. 하물며 그가 날린 칼날은 어린 아이 장난감으로 보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어둠이 칼날들을 모조리 집어 삼켜버린 것이다.
이건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한세연이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스턴이 검을 떨궜다.
그런데.
“따라와요.”
“······?”
따라오라는 말만을 남긴 채 떠나가는 한세연의 뒷모습을 가스턴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죽이려 온 게 아니었나?
“뭐해요, 따라오세요.”
“아, 알겠네.”
멍하니 서 있던 가스턴은 이리나의 타박에 얼른 검을 주워들곤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앞서 걸어가던 한세연이 입을 열었다.
“이리나, 다음으로 가자.”
“······더, 더하게?”
“응.”
“그, 그, 그러면 번견 부대가 여기서 가장······”
가스턴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번견 부대?
‘설마······’
뒤늦게 무언가를 짐작한 가스턴의 눈이 커졌다.
번견 부대라면, 지옥의 번견이라는 ‘십혈’에 속한 마인부대였다.
거기다 여인을 따르는 이리나는 칠악이며, 가스턴 자신 또한 십혈이다.
‘마인을 사냥하는 건가?’
아니, 자신을 죽이지 않았으니 사냥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영입이라 해야 했다. 그러니, 이건······
‘세력을 만드는 거구나!’
결론에 도달한 가스턴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세연이 하는 일이 얼마나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찾아다니는 마인들은 하나같이 마인사회의 정점에 선 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인들은 단합이 되지 않는 족속이었다.
그런 자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한다면 초인협회에 버금가는 사상 초유의 집단이 탄생할 게 분명했다.
‘마인의 통합이라니.’
하지만, 이런 가스턴의 예상과 달리 한세연에게 마인의 통합 같은 거창한 계획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는 아주 간단한 발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번 영멸의 밤을 통해 마인이 이해솔에게 위협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녀는 한발 앞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협이 되는 마인들을 쓸어 담겠다는, 단순하지만, 절대로 단순하지 않은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해솔이한테 마인은 위협이 되니까.’
그 뒤에 마인들이 치고박고 싸우든, 힘을 합치든, 한세연의 알 바가 아니었다.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가스턴의 착각은 갈수록 심해졌다.
‘······세상이라도 정복하려는 건가?’
칠악에 십혈을 모아서 할 만한 일이라곤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으니······
한편, 홀로 뒤떨어져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가스턴을 보며 이리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