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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꿀빱니다-176화 (177/226)

§ 176화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든 이른 저녁.

연설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손정호는 침대에 시체처럼 늘어졌다.

[9/28 (토) 마법협회 토레스관 연설]

스마트폰을 내일 일정을 확인한 손정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죽겠네.”

그는 최근 여기저기 연설을 하러 다니느라 죽을 맛이었다.

협회의 원로원에서 이미지가 좋던 그를 간판으로 내세워 ‘대마인 연설’을 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손정호도 원로원의 의견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바였다.

마인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적은 없으나, 그들에게 입는 피해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으니까.

“흐아, 밥이나 먹어야겠군.”

하품을 쩌억- 하곤 어플을 뒤적여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한동안 누워있다가 느릿하게 일어나 샤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띵동띵동─

“음? 벌써 왔다고?”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손정호가 갸웃거렸다. 주문한 지 10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따로 올 사람이 없었기에 샤워기를 끄곤 소리쳤다.

“예, 문 앞에 놓고 가주세요!”

띵동띵동─

“앞에 놔주시라고요!”

띵동띵동─

“아, 뭐야.”

말이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혀를 찬 손정호가 대충 옷을 챙겨입곤 현관으로 나갔다.

그렇게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문을 열어줄 때였다.

“문 앞에 놔주-”

손정호의 말이 끊겼다.

“···어?”

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문 앞에 있는 이들은 배달원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여자 둘이었다.

그것도 양쪽 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엄청난 미모였다.

청초하지만 표정이 없어 보이는 검은 머리의 여인과, 보랏빛 머리의 화려한 여자.

한세연과 이리나였다.

“···누구십니까?”

괜스레 삐져나온 옷과 머리를 정돈하며 손정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그를 본 한세연이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렸다.

방을 잘못 찾았나? 어리둥절해진 손정호가 갸웃거릴 때였다.

“따라와요.”

“어엇-?”

돌연 홱 잡아끌리는 팔에 손정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뭐, 뭐야?!”

이리나에게 잡혀 강제로 끌려나온 손정호가 당황하며 팔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어찌나 힘이 강한지 잡힌 팔을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손정호가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이, 이게 뭐 하는-”

콰아앙─!

돌연, 건물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깜짝 놀란 손정호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과 코와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허, 허억···!”

그가 조금 전까지 머물던 협회의 숙소가 폭발해버린 것이다.

복도로 난 창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현관문은 폭발해 시꺼먼 연기가 흘러나왔다.

만약 자신이 여자의 팔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저 방과 함께 폭사해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손정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였다.

“살아 있다!”

맞은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검을 찬 초인들이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훼에에엑─!

검을 세운 선두의 초인이 푸른 마력에 휩싸인 채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흐억!”

땅거미가 지듯 순식간에 다가드는 검을 본 손정호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낼 때였다.

타앙─!

총성이 울리더니 이마에 구멍이 뚫린 초인이 뒤로 넘어갔다.

“허억, 헉.”

위기를 넘긴 손정호가 가파른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방금 그 검은 분명 자신을 노리고 휘둘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도 얼굴을 익히 아는 이였다.

협회의 원로원을 오가며 종종 인사를 나누던 초인이었던 것이다.

“왜 협회의 초인이······”

손정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리자, 이리나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당신이 타겟이라고.”

“······내가?”

“어, 그러니까 알아서 좀 뛰어!”

“아, 알았다!”

이리나에게 끌려가던 손정호가 표정을 굳히곤 제 발로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맞은편 복도에서 초인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한세연이 뿜어낸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마, 마인?!”

이를 본 손정호가 경악해 소리칠 때였다. 옆길에서 총탄이 빗발쳤다.

티잉, 티잉, 콰앙─!

총탄의 세례에 벽이 패이고 형광등이 박살나며 불이 나간다.

“···여, 역시 이딴 연설 하는 게 아니었어.”

벽 뒤에 움크린 손정호가 패닉에 빠져 머리를 싸맸다.

그때 왔던 길을 흘낏 돌아본 한세연이 복도에 세워진 소화기를 향해 총을 쏘았다.

치이이이──

뿌연 연기가 새어나와 총탄이 빗발치는 복도를 메우자 한세연이 나직이 말했다.

“뛰어.”

“마, 마인 따위의 말을 들을까 보냐!”

“그럼 죽던지.”

그리 말한 한세연은 손정호를 내버려둔 채 총탄이 빗발치는 복도를 건넜다.

“···어?”

이렇게 쉽게 자신을 놓고 갈 줄은 몰랐기에, 손정호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저기다!

그때, 그들이 왔던 길에서 일단의 초인들이 손정호를 가리키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멍청히 움츠려 있기만 하는 손정호를 본 이리나의 인상이 구겨졌다.

손정호가 죽으면 자신이 한세연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뭐하고 있어요, 빨리 뛰지 않고?!”

“어, 아, 알았다!”

이리나가 버럭 짜증을 내자, 정신을 차린 손정호가 허둥지둥 복도를 뛰었다.

피잉, 핑, 핑─!

총탄이 날아드는 연기 속을 정신 없이 건넌 손정호는 앞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전투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복도. 협회의 정예 초인들이 검을 든 채 달려든다.

그런 그들을 향해 검은 머리의 여인이 마주 달려들었다.

카앙─!

내리쳐오는 검을 총등으로 막은 여인의 반대 손에 들린 총이 상대의 턱 아래서 불을 뿜는다.

콰앙─!

턱에서 정수리까지 관통을 당한 초인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 고꾸라지는 초인을 여인이 집어 던진다.

“엇!”

느닷없이 날아드는 시체에 뒤에서 달려들던 초인이 주춤거리자, 여인이 시체를 향해 총을 연달아 쏘았다.

타앙, 타앙─!

마탄은 시체와 함께 주춤거리는 초인의 가슴을 관통해버렸다.

그리고 시체가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인이 시체를 밟고 위로 도약한다.

시체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던 뒤의 초인은 돌연 위에서 나타난 여인의 총을 막지 못하고 이마를 관통당했다.

······다대 일의 전투.

타다다다당─!

밀려드는 초인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나갔다. 그 환상적인 전투를 손정호가 넋을 놓고 지켜볼 때였다.

복도의 너머에서 한 남자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상대가 제법 이름있는 초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손정호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위험···!”

후아악─!

지면에서 솟구친 어둠에 달려들던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이쪽이야!”

그때, 오른편에 난 길로 들어섰던 이리나가 돌아 나오며 소리쳤다.

한세연과 손정호가 이리나를 따라 방향을 틀어 달려갔다.

그렇게 복도를 따라 쭉 달리니, 꺾어지는 길 너머에 비상구가 보였다.

하지만, 세 사람은 비상구로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호텔을 점거한 초인들이 비상구의 입구를 철저히 틀어막고 있던 것이다.

“치, 어쩔 수 없네, 다른 길로 가자.”

작게 혀를 찬 이리나가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호텔의 통유리벽이 와장창 부서져 나갔다. 한세연이 발로 차 유리를 깨트린 것이다.

휘이이이잉······

이른 저녁의 찬 바람이 호텔 내부로 밀려들었다.

“이쪽으로 가자.”

“여기는 11층입니다만······”

한세연의 말에 손정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이리나도 살짝 기가 질리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연아, 다른 곳으로 가는 건-”

휘익!

한세연은 이리나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아 씨, 지만 멀쩡하면 단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린 이리나가 손정호를 돌아보며 짜증을 부렸다.

“아, 뭐하고 있어요, 빨리 안 뛰어내리고.”

“이, 이걸 어떻게······”

“괜찮아요, 아래서 받아 줄 거니까.”

한세연이 뛰어내리라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손정호는 그 말을 듣고도 깨진 유리벽 끄트머리에 서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였다.

타다다다닥─!

그때,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은 비상구의 초인들이 복도 너머에서 달려왔다.

그들의 손에 마력이 어리는 걸 본 손정호가 지상을 보며 슬며시 발을 내밀자니, 이리나가 뒤에서 퍽 밀어버렸다.

“어, 어, 으아아아아아아!”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손정호가 11층 아래로 추락했다.

***

“······놓쳤군.”

깨진 유리 벽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남자, 한윤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좀 전에 수하들을 학살하던 여자가 떠올랐다.

시체가 날아다닌 데다, 느닷없이 솟구친 어둠 탓에 한윤이 여자의 얼굴을 본 것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한윤은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몇 번 본 적은 없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이였으니.

“왜 네가······”

“팀장님?”

“이번 작전은 포기한다.”

한윤이 등을 돌렸다.

***

한편, 지상으로 추락한 손정호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었다.

“···허억, 헉.”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는데, 지상에서 솟구친 어둠이 그를 낚아채 무사히 안착시켜 주었던 것이다.

“절 따라와요.”

손정호를 뒤따라 지면에 내려선 이리나가 두 사람을 이끌었다.

손정호는 이리나를 따르며 말 없이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추적을 따돌릴 수 있는 곳까지 오자, 그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구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나중에 그만큼 보답하세요.”

“물론입니다. 사례는 당연히 하겠습니다.”

이리나의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한 손정호가 의문인 점을 물었다.

“아직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만, 원로원이 왜 저를 노렸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희생양이에요.”

“······제가 말입니까?”

“응.”

이리나는 짤막하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었다.

손정호를 죽이고, 이를 마인들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움으로써 마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키려는 원로원의 수작이라는 것을.

“···그랬군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손정호가 한세연과 이리나를 번갈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은 마인으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맞아요.”

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세연도 당연히 마인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마인이 아니라면 그보다 모자란 자신은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어도 싼 년이었으니······

“죄송합니다.”

“뭐가요?”

“원로원에서 설마 이러한 짓까지 꾸미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결코 그들을 돕지 않았을 겁니다.”

손정호가 한세연과 이리나를 보며 다짐을 하듯 말했다.

“마인 중에서도 이렇게 좋은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는 다시는 원로원을 돕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분들’이라는 말에 이리나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심코 한세연을 흘낏 쳐다본 이리나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알았으니까, 가보세요.”

“예, 그럼.”

이리나는 연락처를 주며 손정호를 쫓듯이 보내버렸다.

“목마르지? 어디 카페라도 갈까?”

“응.”

한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도 어플을 킨 이리나가 근처의 카페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카페를 찾아 노을 진 골목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리나야.”

“응?”

이리나가 갸웃거리며 한세연을 돌아보았다.

“다 들었어.”

“뭐, 뭘?”

찔끔한 이리나가 말을 더듬자, 한세연이 방긋 웃어 보였다.

“욕하는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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