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이른 아침, 룬어 특강실. 나는 노트를 필사하느라 바쁜 아멜리아를 보며 졸린 눈을 비볐다.
‘음, 역시 무리려나.’
전날 나는 마경의 마수들을 상대로 영혼을 주물러보았다.
아멜리아의 영혼을 손보기 전의 선행연습이었다.
아멜리아가 기프트를 사용한 이후로 가동되기 시작한 그녀의 자율방어기제는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발동한다.
하지만 이는 아멜리아가 다루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힘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강연장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가 있었으니까.
소피아가 날뛰어준 덕에 사람들이 대피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끔찍한 대소동이 벌어졌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아멜리아의 영혼에 새겨진 방어기제를 조금 손보기로 마음먹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아멜리아도 위험했으니까.
기실, 아멜리아의 방어기제는 좋은 의도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저것은 로마노가가 아멜리아의 몸에 장난질을 치기 위해 심어놓은 ‘해킹 코드’였다.
물론 마법에 문외한인 내가 봐서 알 리가 없고, 게임으로 얻은 지식이다.
아무튼, 나는 그 방어기제를 억제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완벽한 봉인은 무리더라도 발동이 남발되는 것 정도는 어찌 막을 수 있을 듯싶었다.
방법이야 연구를 좀 해봐야겠지만.
‘졸려 죽겠네.’
마수들을 가지고 실험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더니 눈이 감겨왔다.
“흐암-”
작게 하품을 하자니 한세연이 내 어깨를 툭툭 찔러왔다.
‘왜?’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그녀가 내 등을 슬쩍 들어 보였다. 나는 못 이긴 척 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등허리로 부드러운 감각이 파고들었다.
“오.”
쿠션이었다. 그것도 기가 막히게 편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작게 웃어 보인 한세연이 다시 수업에 집중한다.
나 또한 본격적으로 쿠션에 기대어 부드러운 감각에 몸을 맡길 때였다.
“이해솔 생도.”
“예.”
칠판에 룬어를 적던 김주혁이 나를 지목한다. 그런 김주혁의 얼굴은 10년은 늙은 듯, 굉장히 수척해져 있었다.
그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었기에 생도들 사이에서는 김주혁이 마약을 한 거 아니냐며 수군거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야, 왜 저런지 알기에 조금 미안해지긴 했지만······
‘변수야 없을수록 좋지.’
김주혁이 금갑어의 내단을 꿀꺽했다면 그걸 가지고 고위 마인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게임에서의 김주혁이 그랬듯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흥, 얼마나 잘나서 딴짓을 하는지 알고 싶군요. 들어가서 풀고 나와보세요.”
김주혁이 특강실에 딸린 실습장을 가리킨다.
“예.”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실습장으로 들어갔다.
─세 개 이상 틀리면 딴짓한 것에 대해 벌점을 부여할 테니, 각오하세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김주혁의 경고가 끝나자 새하얀 천장에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테트리스처럼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룬어’였다.
아래서부터 불, 번개, 정지, 바람······
내 눈에는 룬어의 발음부터 속뜻까지 전부 자동으로 해석이 되었다. 플레이어의 특권이란 거다.
“불.”
화락.
“번개.”
파지직!
룬어를 말할 때마다 그것들이 제 뜻과 같은 현상을 발하며 사라진다.
룬어란 단순한 언어가 아닌 ‘의지’가 깃든 언령이었으니.
그런데.
“어? ···이거, 되겠는데?”
룬어에서 아멜리아의 술식을 보완할 방도를 떠올린 내가 눈을 빛냈다.
“빠르게.”
내가 그리 말하자, 하품하듯 느릿하게 떨어지던 낱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풀라니까, 왜 벌써 나오는 겁니까?”
“풀었는데요?”
“하, 이젠 장난까지······”
내가 들어간 지 20초도 안 되어 나오자 김주혁이 그럼 그렇지 입매를 비틀어 보였다.
제 딴에는 비웃는 것으로 보이는데 볼살이 움푹 들어가서 안쓰러워 보이기만 했다.
“뭐, 포기도 푼 것은 맞지요.”
“······.”
나는 더 이상 입 아프게 대꾸하지 않았다. 가서 보면 알 테니.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인 김주혁이 실습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으어억-!
안에서 경악어린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뒤에야 김주혁이 실습장을 나왔다.
“자, 잘했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예.”
나는 머릿속으로 룬어를 어떻게 응용할 지를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혼이 달아난 표정으로 수업을 하던 김주혁은 빠르게 수업을 끝마쳤다.
‘그런데 기력으로 룬어를 새길 수 있나?’
문득 떠오른 의문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점심시간임에도 홀로 남아 턱을 괴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때마침 잘되었기에 나는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야.”
“네?”
“배 좀 까봐.”
“······.”
***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아멜리아.
‘왜 저래?’
갸웃거리던 나는 뒤늦게 내 말실수를 깨닫고는 정정했다.
“아니, 문신 좀 보자고.”
“문신은 왜요?”
술식을 말하는 것임을 안 아멜리아가 반문한다.
“아니다, 됐어.”
고개를 저은 나는 대뜸 아멜리아의 옷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내 기력이 아멜리아의 술식으로 스며든다. 나는 그 상태로 이미지를 떠올렸다.
언어로 표현하자면 ‘잠잠히’.
지금 아멜리아의 술식은 며칠 전의 충격으로 꽤나 민감해져 있는 상태였으니.
‘오, 되네.’
다행히 기력을 이용한 룬어의 응용은 가능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의지로 술식을 잠재우기는 무리였기에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룬어를 새겨 넣어야 했다.
어마어마한 정신력이 빠져나가는 일이었기에 부동의 각인을 지닌 나조차도 살짝 피곤해질 정도의 작업이었다.
‘쩝, 그래도 역시 완벽하게는 무리네.’
아멜리아의 술식을 어느정도 가라앉히는데는 성공했으나, 완전히 억제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이 정도가 딱 적당하긴 했다.
여차할 때를 대비해 아멜리아에게도 술식은 필요했으니.
“······뭐예요 이게?”
아멜리아가 놀란 눈으로 제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어떤데?”
“속이 좋아졌어요.”
“···속이?”
“네, 항상 좀 뭔가 불편했는데,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요.”
눈을 별처럼 초롱초롱 뜬 아멜리아가 제 하얀 배를 까곤 이리저리 돌려 보인다.
아무리 신기해도 그렇지, 갑자기 왜 배는 까고 그래? 민망하게.
아무튼, 이걸로 아멜리아는 대충 해결됐고······
‘이제 정리만 하면 되나?’
강연장 사건의 뒷수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꼬리자르기만 하고 빠진 놈들이 버젓이 남아있었으니까.
‘원로원.’
받았으니 이제 돌려줄 차례였다.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내 눈이 파랗게 빛났다.
***
한국에는 여러 초인의 명문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대전쟁 이후에 생겨난 영웅들에 의해 세워진 가문이다. 이른 바, 벼락부자 같은 것이다.
대전쟁 이전부터 존재하던 가문들이야 말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지탱해온 진짜 명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명문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명가로 유명한 한가장.
“실패했습니다.”
콰앙─!
한윤의 보고에 삐쩍 마른 노인이 탁상을 내려쳤다.
“실패라니!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도중에 방해가-”
“꼴도 보기 싫다. 꺼져라!”
“예.”
노인의 언성에 고개를 숙인 한윤이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문밖에는 당찬 인상의 여자가 서 있었다.
사촌동생인 한주아였다. 한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한주아가 열려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오오···! 왔느냐, 내 손녀.
─예, 할아버님.
그를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인 살가운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윤이 표정을 굳혔다.
‘···안 좋구나.’
노인은 그의 아버지이자 한가장의 가주인 한주상이었다. 그리고 초인협회의 원로원주이기도 했다.
한주상은 원로원주라는 직함에 걸맞게 누구나가 인정하는 위대한 초인이었다.
한때는 마스터의 문턱까지 도달했던 전적이 있는 푸른 날개의 멤버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주상은 눈과 귀를 닫아버린 지 오래였다.
모든 기대를 걸었던 장자가 마인에게 죽음을 당한 뒤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
문제는 한주상에게 최근 정체불명의 불순한 무리가 접촉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한주상의 행보는 극단적이었다.
마인들을 압박하기 위함이라곤 하나, 이터니티의 생도들과 의원마저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어찌저찌 증거를 인멸했다곤 하나, 이미 냄새를 맡은 이들이 한가장을 몰아세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한윤은 최근 큰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대로 한주상에게 가주 자리를 계속 맡기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으니까.
하지만 이를 알고 있음에도 한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문의 모든 힘은 한주상과 그의 조카인 한주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
“결단을 내려야겠군.”
가문을 빠져나온 한윤이 그리 중얼거릴 때였다.
“도와드릴까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길게 뻗은 가로수길. 한 남자가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그늘에서 빠져나온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
“마경주?”
“정답.”
씨익 웃은 내가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일어나 한윤을 바라보았다.
“뭐를 도와준다는 이야기입니까?”
“뻔한 걸 묻는군요.”
“······.”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시치미를 떼는 한윤을 보며 내가 픽 웃어 보였다.
“갈아엎으려는 거 아닙니까? 가문.”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버럭 소리친 한윤이 재빨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내가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소리는 다 차단했으니까.”
나는 기력을 넓게 방사해 일대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뒤였다.
물론 이곳에 우리 둘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바깥에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빛을 굴절시켜 우리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렸으니까.
과연,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나와 한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치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한윤이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잘 조절하면 못 느끼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무튼.”
한윤의 말을 끊은 내가 본론을 꺼냈다.
“할 겁니까, 말 겁니까.”
“······.”
“반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한윤이 나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허, 솔직하지 못한 양반일세.”
멀어지는 한윤을 보며 내가 혀를 차 보였다.
“저대로 내버려둬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소피아의 말에 그리 답한 내가 한윤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어차피 다시 오게 되있으니까.”
고민이야 하겠지만, 결국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한윤은 부정할지 모르겠으나, 그는 제 아버지를 무섭도록 빼닮은 인간이었으니까.
***
······이튿날, 방과 후 마경의 저택.
“이거요.”
“이게 뭔데?”
나는 아멜리아가 준 티켓을 보며 갸웃거렸다.
“블랙마켓 검술교류회 티켓이에요. 저는 필요가 없어서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아멜리아. 마치 서랍 뒤졌더니 나와서 선심 쓴다는 뉘앙스다.
말은 저래도 복부의 이질감을 없애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나도 필요 없는데?”
내가 볼을 긁적였다. 주는 거야 고마웠으나 내 검술은 그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교류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무슨 검술을 발전시킬 것도 아니고.
“아싸, 그럼 내꺼네. 나 이거 가고 싶었는데!”
순간, 아멜리아의 손에서 은가예가 티켓을 휙 낚아채갔다.
환호하는 은가예를 보며 얼이 나갔던 아멜리아가 이윽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일어났다.
“줘요, 그거.”
“왜? 필요 없다며.”
“당신한테 준다 한 적 없거든요?”
“치. 치사하게 구네.”
혀를 찬 은가예가 티켓을 주는 척 하다가, 메롱을 하곤 도망치자 그 뒤를 아멜리아가 쫓는다.
─이리 줘요. 야! 안 내놔?!
─싫어!
두 사람의 추격전을 구경하던 내가 거실의 쇼파를 바라보았다.
쿠션을 가슴에 꼬옥 끌어안은 소피아가 불만스레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TV에서는 곰 인형 알바생의 정체라며 한 남성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하하,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피식 웃은 내가 소피아의 옆으로 가 앉아 손가락으로 볼을 쿡 찔렀다.
피이이······
풍선 빠지는 소리가 나며 작게 부풀어 있던 뺨이 줄어들자, 소피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런 사람이 나올 만큼 소피아가 잘했다는 거니까요.”
소피아를 위로한 나는 TV를 보다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진짜 강하긴 하네요.”
‘곰곰’의 인형탈을 쓴 남성은 사칭범이긴 했으나, 과연 소피아를 사칭할 만큼 실력이 제법이었다.
내가 가짜를 칭찬하자 소피아가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봤자 가짜입니다.”
“그렇죠. 소피아가 진짜죠.”
피식 웃은 내가 소피아를 달래주고 있을 때였다.
문득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내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마수 사냥을 나갔던 아나스타샤가 돌아와 있었다.
“벌써 끝났어?”
고개를 도리질 친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손님 왔어. ·········어제 그 사람.”
“한윤?”
끄덕끄덕.
“빨리도 왔네.”
어제는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
피식 웃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