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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꿀빱니다-182화 (183/226)

§ 182화

······달빛이 내려앉은 한가장의 정원.

날이 저물어 어둑해진 산책로를 거닐며 내가 뺨을 긁적였다.

“미안.”

“뭐가?”

“나 때문에 괜히 일만 커졌잖아.”

한세연이 연루된 실종사건에 대해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다.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그 이야기는 이제부터 한세연의 뒤에 꼬리표처럼 평생을 따라붙게 될 터였다.

“미안해할 것 없어. 해솔이가 한 게 아니잖아.”

한세연이 고개를 저으며 밝게 웃어 보였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내가 한세연을 연회장에 데려오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었으니.

그나저나.

“왜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어?”

한주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것을 묻자 한세연이 갸웃거렸다.

“그치만 사실인걸?”

“넌 화도 안 나냐.”

“조금?”

“근데 왜···”

말을 하는 대신 방긋 웃어 보이는 한세연을 보며 내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를 내지는 않는데, 참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으니······.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해를 포기한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가을의 서늘한 밤바람이 피부를 어루만져왔다. 문득 한세연을 보니 블라우스만 입은 것이 보여왔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걸쳐주니, 한세연이 나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춥다. 걸치고 있어.”

그리 말하곤 앞을 보는데, 문득 등에 무언가 결쳐졌다.

팔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옆을 돌아본 나는 순간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같이 걸치면 되잖아.”

“······.”

내 옆구리에 밀착하듯 쏙 들어온 한세연이 넓게 펼친 코트로 자신과 나를 감싼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밀착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지만 얘는 너무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훅 들어와 버리니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뭐가 문제냐는 듯 올려다보는 시선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내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예고 좀 하고 들어와라.”

“예고하면 괜찮다는 거네?”

또 제멋대로 해석을 해버리곤 팔짱을 낀 채 웃어 보이는 한세연.

내가 그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위이이잉──

때마침 올려오는 스마트폰의 전동음에 내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액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해가 움직였습니다. 한가주와 회동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래?”

기다리던 소식에 내 눈이 번뜩였다.

***

······한편 그 시각, 한가의 초인들은 회동의 장소로 쓰일 본관의 회의실을 샅샅이 점검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도청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나갔다간, 대난리가 벌어질 터였으니까.

그때, 회의실의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섰다. 상대를 확인한 이들이 모두 긴장을 풀었다.

“한윤님.”

“잘들 하고 있는가.”

“예, 이제 곧 끝납니다.”

“행여라도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점검하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는 남자의 어깨를 한윤이 툭툭, 가볍게 두들겼다.

순간 남자의 어깨 옷단으로 무언가가 파고들었으나 남자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수고들 하게.”

볼일을 마친 한윤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뒤이어 그가 향한 곳은 한가장의 외부로 이어지는 후문이었다.

그 후미진 곳에 서 있자니, 잠시 뒤 누군가 풀밭을 밟으며 다가왔다.

“왔느냐.”

“예, 갑자기 급히 할 말이라니, 무슨 일이시길래 이런 곳까지 부르신 겁니까?”

건물의 그늘 아래서 나타난 것은 한윤의 동생인 한문수였다.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았겠지?”

“그야 물론입니다. 형님이 데려오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긴히 할 말이 있다는데 누구를 데려오겠습니까.”

“그거 다행이구나.”

“예?”

왠지 말이 이상한 것 같은 느낌에 한문수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푸우욱─!

복부를 꿰뚫는 고통에 한문수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 떠졌다.

고개를 숙이니, 한윤의 검이 그의 복부 깊숙이 박혀있었다.

“혀, 형님······? 이게 무슨······!”

“넌 너무 겁이 많다.”

한문수의 능력은 특출나다.

한윤과 비교해도 그리 뒤떨이지지 않는 무력에, 머리 또한 명석하다.

하지만 겁이 많았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외면하는 것에 익숙했다. 지금의 한가장을 망치고 있는 썩은 살에는 한문수 또한 포함이 되어 있었다.

가주인 한주상에게 있어서 한문수는 유용한 ‘개’였으니.

“크아아악-!”

한문수가 최후의 발악으로 마력을 폭발시켰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윤은 이미 그에 대한 대비도 끝내놓은 상태였으니까.

휘리리리······

한문수가 폭발시킨 마력은 그의 복부에 꽂힌 검으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

“보, 복마검을······”

한문수의 복부를 꿰뚫은 건 마력을 빨아들이는 한가의 보구, 복마검이었다.

털썩.

한문수가 쓰러지자 그늘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문수가 죽은 흔적을 말끔히 처리하곤 한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하시기로 한 일은 잘 정리되셨습니까?”

“예.”

한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두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소피아와 아멜리아였다.

“근무자들은 모두 제 사람이니 경보마법만 없애시면 됩니다.”

세 사람은 한가장에 설치된 경보마법을 제거하고 마경의 사람들을 안으로 들일 생각이었다.

아멜리아가 한가장의 담벼락에 어지럽게 쳐진 마력의 선들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거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요. 다만, 들키지 않고 없애는 건 제 힘으로 무리에요.”

“제게 맡겨주시죠.”

소피아가 대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마법을 부수는데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분쇄자는 이형을 부수는데 특화된 힘이었으니까.

다만 그녀의 눈에는 담벼락에 처진 경보마법의 마력이 보이지 않았으나, 아멜리아가 눈의 역할을 대신 해주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거기서 왼쪽 위에요.”

휘아악─!

“앞에 하나 더요!”

휘악─!

어두운 밤. 달빛에 반사되는 소피아의 대검이 한가장의 결계를 잘라갔다.

***

······구름에 파먹힌 달빛이 드리운 한가장의 어둑한 정원.

사람이 없는 적막한 산책로를 한세연이 홀로 걷고 있었다.

소로를 거닐던 그녀의 걸음이 공터에 이르러 멈추었다.

“나와도 돼.”

“뭐야, 알고 있었어?”

사박사박······

풀숲을 헤치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연회장에서 쫓겨난 한주아였다.

“그런데도 이런 곳으로 왔단 말이지.”

한주아가 독기어린 눈으로 한세연을 노려보았다.

연회장에서 한세연에게 갖은 수모를 겪은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문의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고 다시는 오늘같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며 단단히 주의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되려 주의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한주아에게는 엄청난 자존심의 상처가 되었다.

그랬기에 근신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에 못이겨 한세연을 쫓아온 것이다.

“그냥은 못 갈 줄 알아.”

한주아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표독스러운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한세연이 쳐다보고 있는 것은 한주아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이 자신이 아닌 그 뒤를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한주아가 놀란 눈을 했을 때였다.

“설마 눈치챌 줄이야. 놀랍군.”

한주아의 뒤편에서 중년의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흑해의 상격마인 최민호였다. 그리고 한주아의 호위를 맡고 있기도 했다.

한주상을 움직일 수 있는 카드로 흑해는 한주아를 받아들인 것이다.

‘기회구나.’

최민호는 영멸의 밤으로부터 한세연의 위험성에 대해서 주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한세연을 잡을 기회가 생기자 공을 세울 욕심이 들었다.

“제가 처리할 거니까 나서지 마요.”

최민호의 등장에 한주아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런 한주아를 보며 최민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당신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뭐예요!?”

“······.”

옥신각신 다투는 두 사람을 한세연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공터의 사방에서 10여 명의 마인이 더 나타났다.

하지만 한세연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했다.

저들이 숨어있다는 것쯤이야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였으니까.

그들이 공터를 둘러싸자, 한세연을 감싸며 검은 결계가 발현되었다.

파직!

한세연이 손을 가져다 대자, 검붉은 스파크가 일며 그녀의 손이 튕겨져 나갔다.

“흥, 그게 그렇게 쉽게 부숴지는 건 줄 알아? 상격초인도 무릴 걸?”

기세가 산 한주아가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한주아의 말처럼 그녀를 둘러싼 결계는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이를 바라보던 한세연이 갸웃거렸다.

“이걸로 끝?”

“하, 짜증나게 하네.”

한주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한세연의 저 담담한 표정이 그녀는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표정을 일그러트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주아는 이내 입매를 비틀어 보였다.

“이걸 보고 어디 그 재수 없는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한주아가 손을 들어 올리자 결계를 둘러싼 10인의 마인이 스스로 제 팔목을 그었다.

츄아악─!

뿌려진 피가 공터를 적신다. 마인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세연은 그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공터를 적신 피에 마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 마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더니, 이내 불길한 색채가 되어 공터를 뒤덮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세연이 흥미롭다는 듯 작게 입을 벌렸다.

“헤에.”

“닥치고 보고 있기나 해.”

한세연이 결계에 갇혔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준비가 성공했다 판단했기 때문일까. 한주아의 만면에는 여유가 깃들었다.

“영광으로 알아. 악마가 무엇인지 구경시켜줄 테니까.”

악마라······. 한세연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을 때였다.

한주아가 손을 휙 휘저었다.

그러자 검붉은 색채가 꿈틀거리더니, 기묘한 형태를 잡아갔다.

공터를 점령한 검붉은 색채는 단순한 마기덩어리가 아니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

‘어떠한 심연’과 닿아있는 틈이 열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받쳐질 ‘제물’로 선정된 것이 바로, 결계의 중심에 서 있는 한세연이었다.

꿈틀거리던 덩어리는 이제 완연한 실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생명체의 본능을 자극하는 낮고 음울한 포효가 공간을 울렸다.

사람의 네 배는 될법한 거대한 체구, 사자의 몸에 당나귀의 머리를 지닌 기묘한 외양.

6성급 차원의 마수, ‘발라파르’였다.

“표정이 굳었네?”

한세연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진 걸 확인한 한주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한주아를 바라보며 한세연이 물었다.

“이게 전부야?”

“뭐?”

“준비한 건 이게 전부냐고.”

“그, 그런데?”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한 한주아가 의아해하며 답할 때였다.

그런데.

“실망이네.”

“미, 미친년이!”

한세연의 눈에 어린 짙은 실망에 한주아의 표정이 휴지조각처럼 일그러졌다.

─크아아아!

발라파르가 포효했다. 놈의 몸집이 거대하게 부풀며 공터에 그늘이 졌다. 존재감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발라파르를 바라보는 한세연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기껏 준비 시간까지 주었건만 그 결과물이란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시간을 낭비했어.”

한세연이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검은 결계가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저, 저럴 수가!”

한주아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고위마수조차 가두어놓을 수 있는 결계가 고작 걸음에 부수어져 내린다고?

하지만 그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결계가 깨지는 순간, 발라파르의 집채만한 손이 한세연을 움켜쥐었다.

한세연은 곧 발라파르의 거대한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막대한 압력에 한세연은 금방이라도 벌레처럼 으스러질 듯했다.

하지만.

부들부들─

눈을 크게 치켜뜬 발라파르의 움켜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어어어어엉─!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발라파르의 손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한주아는 보았다.

발라파르의 손아귀가 터져나간 자리.

먼지 한 올 묻지 않은 모습의 한세연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허공을 움켜쥔 순간, 발라파르의 머리에 어둠이 일렁이더니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쿨럭!”

“쿠에에엑!”

최민호를 비롯해, 발라파르의 소환을 유지하던 마인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홀로 남은 한주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때, 한세연의 고개가 한주아에게로 돌아갔다. 시선을 마주한 한주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도망가고자 했으나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여 지지가 않았다.

마치, 못에 박힌 듯 고정되어버린 것이다.

“이 뭔······!”

문득 지면을 내려다 본 한주아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땅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사박사박─

한세연이 풀을 밟으며 느긋하게 걸어왔다.

“으으······”

가까이서 한세연과 눈을 마주한 한주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끝 모를 심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득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한세연이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푸시시······.

흑해에서 한주아의 머리에 심어놓은 ‘금제’가 타들어 가는 것이었다.

“어, 어떻게······”

금제가 날아간 것을 알아차린 한주아가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넌 아는 게 많았으면 좋겠네.”

한세연이 하얗게 웃었다. 뒤이어 한주아의 비명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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