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연회가 한창인 이른 밤, 한가장 4층의 회의실.
혈족이 아니라면 드나들 수 없는 그 심처에서는 흑해와 한가장의 은밀한 회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해주라는 자는 얼굴도 안 비출 생각인가 보군.”
“해주께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시지 못하십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목을 뻣뻣이 세운 채 말하는 여우가면인을 보며 한주상이 불쾌하단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실패를 해놓고 잘도 떠드는군.”
“실패를 한 것은 한가장도 마찬가지라 알고 있습니다만.”
“뭐?”
“손정호의원을 놓쳐버렸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손정호의원은 마인 강경론자에서 옹호론자로 탈바꿈을 해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마인규제법을 통과시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면인이 이 점을 꼬집어 지적하자 한주상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본가에는 아무런 득도 되지 않는 일을 네놈들의 요청 때문에 도왔다는 것을 잊은 건가?”
“지나간 일을 다투는 것은 서로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한주상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흑해가 한주상을 필요로 하듯이, 한주상 또한 필요에 의해 흑해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약속드렸던 정령석입니다.”
가면인, 통칭 ‘스완’이라 불리는 인물이 테이블 위의 검은상자를 밀어 보였다.
한주상이 이를 열자 다채로운 빛의 돌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연의 기운이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돌, 정령석이었다.
한주상이 정령석 하나를 꺼내 들어 대뜸 깨물었다.
까득─!
정령석을 잘근잘근 씹어먹던 한주상이 돌연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돌가루를 뱉어냈다.
“퉷-! ···중급이라더니 싸구려를 가져왔군.”
“알다시피 정령석은 구하기가 어렵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추후 구해지는대로 가져다 드리도록 하지요.”
“다음에도 이런 싸구려를 가져오면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한주상은 받은 정령석의 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돌려주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정령석은 한주상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한주상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다 정령석에 퇴적된 자연의 기운을 섭취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를 정기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곳이라곤 흑해가 유일했다.
한주상은 정령석의 공급과, 협회주의 자리를 약속받는 대신에 흑해의 일을 도와주고 있던 것이다.
한주상이 마인을 제재하자는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붓는 이유도, 그의 사적인 감정보다는 흑해의 요청으로 인한 부분이 컸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마인인 흑해에서 왜 이러한 짓을 벌이는지는 한주상도 알지 못했지만.
뭐, 그야 약속한 것만 얻을 수 있다면 흑해가 무슨 짓을 벌이건 관심이 없었다.
한주상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정령석을 챙기자 스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바깥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 말인가?”
“오면서 보니 연회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더군요.”
“사람들을?”
처음 듣는 이야기에 한주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회의실의 밀담이 시작되기 전의 연회장.
─해솔님, 외부의 결계를 제거했습니다. 언제라도 진입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소피아의 보고를 받은 내가 만족스레 웃었다. 이윽고 내 얼굴이 점토처럼 뭉개지더니 마경주의 외양으로 바뀌었다.
내 의지로 외모의 변형이 가능한 형상변이 마법. 이본느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연회장의 앞으로 걸어간 내가 마이크를 들었다.
─아아, 주목해주세요.
마이크를 탕탕 두드리며 말하자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마경주다!”
“어엇, 정말!”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놀라 웅성이기 시작하자, 좌중을 스윽- 둘러본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특별행사가 있을 테니, 나가신 분들을 모두 불러 모아주십시오.
···특별행사?
그런 게 있다고 했던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갸웃거리는 이들을 향해 나는 쐐기를 박았다.
─곧 한가주님이 등장하실 겁니다.
“가주님이?”
연회장을 나갔던 가주가 등장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연회가 무르익기도 전에 한주상이 퇴장을 하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그게 다 지금의 행사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마경주까지 깜짝 등장할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행사일 게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이야기를 들은 바 없는 한가장의 무사들조차 내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설마 마경주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잠시 후.
회장은 마경주의 등장이라는 빅뉴스에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기, 안경끼신 남자 분. 불 좀 꺼주시죠.
“···아, 예!”
지목을 받은 남자가 스위치를 내리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뭐를 하려는 거지?”
“와, 기대된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벌어질 행사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것을 보며 뜸을 들이고 있자니,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액터의 목소리가 이어폰에 들려왔다.
─그럼 시작합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영상마도구를 조작하자 대형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네모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원주님이다!”
“어? 진짜네.”
“뭐야, 공연인가?”
그중 한 사람이 한가장의 가주인 원로원주 한주상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였다.
「해주라는 자는 얼굴도 안 비출 생각인가 보군.」
「해주께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시지 못하십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한주상과 마주앉은 가면인의 대화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처음 듣는 이라면 맥락을 파악하기 난해했으니.
하지만 이어지는 가면인의 말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손정호의원을 놓쳐버렸다고 하더군요.」
손정호의원을 놓쳤다는 말을 통해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은 단 하나밖에 없던 것이다.
목격자도, 증거도 말끔히 지워진 채, 오롯이 손정호 의원 홀로 원로원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미지의 피습사건.
가면인은 그 피습사건의 배후가 한주상임을 말하고 있던 것이다.
하물며 이어지는 한주상의 말조차 이를 부정하기는커녕 긍정하는 이야기였다.
“뭐야, 영상 꺼!”
“저 새끼 막아!”
회동에 대해 알지 못하다, 뒤늦게 영상의 심각성을 알게 된 한가장의 초인들이 난입했으나, 이미 주요 내용은 모두 흘러나간 뒤였다.
콰르르······
“뭐, 뭐야?!”
“으어엇-!”
나를 향해 달려들던 초인들은 느닷없이 솟구쳐오른 벽에 당황하며 멈춰 섰다가, 위에서 쏟아져 내린 고압의 물세례에 바닥에 납작 붙어버렸다.
“라이트닝 체인!”
연회장을 울리는 낭랑한 영창.
파지지직─!
흠뻑 젖은 채 일어나려던 초인들이 전류에 감염되어 바들바들 떨다가 쓰러져버린다.
“왔네.”
연회장의 입구를 바라본 내 입가가 올라갔다.
하얀 완드를 내민 아멜리아. 총총 나를 향해 걸어오는 리디아와 니엘. 그 뒤로 소피아, 이본느 등, 낯익은 얼굴들이 연회장을 가로질러 왔다.
“리디아 왔어요!”
“니엘도요!”
”타이밍이 좋았네요.“
차례로 인사를 건네는 이들은 마경의 주민들이었다.
***
······한편 그 시각, 4층의 회의실에서는 자신들의 대화내용과 영상이 라이브로 송신되고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모른 채 회의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내 손녀에게 사람을 붙여놨더군.“
”호위를 위해서입니다. 한주아양은 저희 흑해에게도 중요한 분이니까요.“
”인질로서 말인가?“
”비약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날 선 어조로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어서 회의실의 문이 발칵 열렸다.
“가주님! 큰일났습니다!”
“큰일?”
한주상이 눈썹을 구부리자, 말을 한 무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예, 회의실의 내용이 연회장에 송출되고 있습니다!”
“뭐?!”
크게 놀란 한주상이 의자를 넘어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회장에 송출되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누, 누군가 영상장치를 회의실에 반입한 것 같습니다!”
콰앙─!
한주상이 내리친 테이블이 반파되었다. 스완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한주상은 스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회의실을 쓸어보았다.
안에는 한주상과 스완을 제외하곤 한윤과 한가장의 초인 둘, 흑해측 인물 둘이 호위로 서 있었다.
“너, 어깨에 그건 무엇이냐.”
“···예?”
시선을 받은 한가장의 무사가 제 어깨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크악!”
초인이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이 초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거머쥐었다.
한윤이었다.
그의 손에 무사의 어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붉은 칩이 살점과 함께 들려있었다.
“그, 그건······!”
당황한 초인의 눈이 흔들릴 때였다. 문득 한윤과 시선이 마주친 초인의 동공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설마······!’
그의 머릿속으로 회동이 시작되기 전,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던 한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말하지 못하겠느냐!”
“이, 이건 제가 아니라······!”
푸아악─!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하려던 초인의 말이 끊겼다.
털썩─
머리를 잃은 육신이 쓰러지며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
한주상의 구겨진 시선이 한윤을 향했다.
그의 검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윤이 초인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쯧, 너무 성급하게 죽였다.”
“죄송합니다.”
한주상의 질책에 한윤이 가만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쓸모없는 녀석.”
숙여진 한윤의 뒤통수를 보며 혀를 차보인 한주상이 한윤을 지나쳐 회의실을 나갔다.
지금은 한윤을 질책하기 보단, 한시라도 빠리 사건을 수습해야 했으니까.
“······.”
스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 한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한주상을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연회장이라면 이미 퍼질 대로 퍼졌는데 어쩌실 겁니까.”
“뻔한 걸 묻는군.”
스완의 물음에 한주상이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다 죽여야지.”
그 뒤야, 마인의 습격으로 위장을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
······연회장으로 내려온 한주상과 가면인이 맞이한 것은 정리가 된 실내였다.
정체를 숨기고 있던 마인들과, 한주상의 수족들은 모두 붙잡히거나, 기절해 창가의 벽에 나란히 묶여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주상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돌아갔다.
퍼억─!
그곳에서는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마인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한주상과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마인의 면상을 후려쳤다.
퍼억─!
피묻은 주먹을 들어올리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처음뵙겠습니다, 가주님.”
“네놈은······”
“마경주라고 합니다.”
그리 말한 마경주가 뒤를 향해 소리쳤다.
“문 닫아.”
“예!”
쿠웅─!
연회장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한주상의 귓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