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푸른 초원이 지평선까지 펼쳐진 어느 평야.
사시사철 평화롭기만 할 그곳에서는 때아닌 대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쿠우우우웅──!
거신상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체구의 남성이 발을 굴리자 평야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린다.
남성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며 갈 길을 잃은 공기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쾅! 콰앙! 꽈아앙!
일대가 폭격을 맞은 듯 뒤집히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얼핏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것 같았으나, 남성의 주먹은 무섭도록 빠르고 치밀했다.
당연했다. 남성의 정체는 바로 칠악(七惡)의 일좌를 차지한 분노의 마인, 야울이었으니까.
순수한 파괴력으로만 치자면 칠악에서도 따라갈 이가 없다는 거마.
그런데 그 야울의 공격이 지금 놀랍게도 단 한 발도 통하지 않고 있었다.
새까맣게 펼쳐진 어둠이 그의 모든 공격을 전부 흡수해버리고 있던 것이다.
이어서 야울의 주먹마저 삼켜버린 어둠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츄아아악─!
야율의 전신이 갈려 나가며 피가 튀어 올랐다. 피투성이가 된 야율이 땅을 울리며 쓰러졌다.
“······.”
이윽고 어둠이 걷히며 한세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쓰러진 야율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스스스스······
심연의 반지에서 어둠이 꾸물거리며 흘러나왔다. 그렇게 어둠이 야울을 향해 뻗어나가려던 때였다.
위이이잉─
돌연 울리는 진동음. 야울을 덮쳐가던 어둠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
“응, 해솔아.”
─지금 바빠?
“아니, 다 끝났어.”
말과 함께 한세연이 손을 휘둘렀다.
츄아학─!
“크학!”
채찍처럼 휘둘러진 어둠에 일어나려던 야울의 상반신이 베이며 다시 쓰러졌다.
─뭔 일 있어? 지금 무슨 소리 들린 것 같은데.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미안한데 바쁘지 않으면 지금 좀 와줄 수 있을까? 지금 놀이공원을 왔는데 ······
“응, 알았어.”
“응.”
“······.”
방긋 웃으며 통화를 하는 한세연의 모습을 야울은 잔뜩 얼이 나간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패배를 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저러한 태도의 전환이 그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해맑게 통화를 하는 한세연을 야율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환영하네.”
“당신은······”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야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노인은 야울도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가스턴?”
검공 가스턴.
검의 끝을 보겠다며 밀림으로 종적을 감춰버린 그는 야울도 나름의 존중을 갖추어 대하던 마인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보면 알잖은가.”
“···그렇군.”
가스턴이 시선을 돌린 곳을 바라본 야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는 방긋 웃으며 통화를 하는 한세연이 있었다.
“당신도 같은 처지라는 건가.”
“같은 처지? 무슨 소리인가.”
“?”
의아해하는 야울에게 가스턴이 씨익 웃어 보였다.
“자네가 아래네.”
“······.”
“여긴 들어온 순서대로거든.”
“들어온 순서?”
“그렇네. 잘 부탁하네. 신입.”
“······.”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는 가스턴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야울이 할 말을 잃었을 때였다.
“쓸데없는 엄살은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야울.”
문득 뒤에서 들려온 매몰찬 말에 고개를 돌렸던 야울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너도 있었나, 웨인.”
“흥.”
거만한 얼굴로 코웃음 쳐 보이는 남자는 바로 교만의 마인 웨인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앞을 바라보는 웨인의 얼굴에서는 그런 거만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신앙심 깊은 신자마냥 경외 어린 표정을 지은 웨인이 한세연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별말씀을.”
한세연이 방긋 웃어주자 웨인이 황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는 듯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겉옷을 건네준다.
세상 제 잘난 맛에 살던 놈이 충성스러운 종복을 자처하는 모습에 야울이 경악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살인귀가 저런 녀석이었나?”
***
······한편, 한세연과의 통화를 끝마친 나는 난관에 봉착해있었다.
“저하고 함께 타주세요, 마경주님.”
“제가 기구 하나는 끝내주게 잘 탑니다.”
“저 한 번만 믿어주세요!”
현재 내 머리 위로는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푸른색 동그라미가 두둥실 떠다녔다.
그 덕분에 내가 100점을 모아 던전 클리어의 도전권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순식간에 내 주위로 몰려든 것이다.
“죄송합니다. 도움이 되질 못해서······”
풀이 죽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소피아. 내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에요, 소피아 잘못이 아닌데요, 뭘.”
참고로 소피아는 기구울렁증으로 인해 도전권을 포기해버린 뒤였다.
꾹 참고 탄다 해도 요정이 인정하지 않으면 실패였으니.
‘빌어먹을 요정 새끼···’
주위에 몰린 인파에 난감함을 느낀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도전권을 가졌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공표해버릴 줄이야.
뭐, 몰려든 사람 중에 아무나 골라서 도전을 한다 해도 안 될 거야 없었지만 문제는 통과를 할 수 있느냐였다.
[100포인트 : 도전 자격은 1회]
‘고작 1회용이니······’
실패하면 기껏 쌓은 점수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으니, 파트너는 신중히 골라야만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아예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한세연만큼 기구를 잘 타는 애를 내 인생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얘는 겁을 내기는커녕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오히려 역으로 좋아하는 애였다.
요정이 준비한 놀이기구를 보면 한세연이 보일 반응이야 안 봐도 뻔했다.
분명 박수를 치며 기뻐하겠지······
‘언제 오려나.’
이 근방에 게이트야 없지만 흑요를 타고 오면 금방일 터였다.
한가장에서도 연락을 하기 무섭게 곧장 흑요를 타고 나타났던 한세연이었으니.
“죄송하지만 이미 같이 탈 사람이 있습니다.”
내 한 마디에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게 누구죠?”
인파가 갈리며 화사한 미모의 여자가 하이힐을 울리며 다가왔다.
여유 있게 머리를 넘겨 보이는 모습이 딱 봐도 있는 집 자식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유나님이다.
─도성 가문의······
주변의 떠받듦에 짐짓 미소를 지어 보인 이유나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검성의 2팀장인 이유나라고 합니다.”
“아, 예.”
인사를 한 이유나가 내 옆을 돌아보았다.
“함께 타실 분이 저분이라 하실 거면 도전권을 포기해버렸다고 나와 있는데요.”
시선을 받은 소피아가 움찔거린다. 하지만 사실이었기에 뭐라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동행으로 온 두 아이도 나이제한 때문에 불가능하고요.”
파라솔에서 구경하는 리디아와 니엘을 가리켜 보인 이유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같이 타실 분은 누구죠?”
“아직 안 왔습니다.”
“오지 않았다면 저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리 말한 이유나가 제 팔뚝을 들어 보였다.
[97]
붉은색으로 칠해진 선명한 포인트. 예상보다 높은 숫자에 내가 이채를 띄자 이유나가 자신있게 웃어 보였다.
“어때요, 이 정도면 함께 탈만 하죠?”
“뭐, 높긴 하네요.”
“좋아요, 그럼···”
“그래도 어렵겠습니다.”
이유나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왜죠? 설마 오신다는 분이 100포인트를 채우신 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몇 포인트이길래······”
“0포인트입니다.”
“···예?”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인 이유나가 이내 인상을 팍 써 보였다.
“지금 절 놀리시는 건가요?”
“놀리긴요, 사실입니다.”
“정말 0포인트 분이랑 같이 타시겠다고요? 저 기구를?”
“예.”
정신 나가 보이는 기구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유가 뭐죠?”
“잘 타니까요.”
“···저보다?”
“예.”
내 당연하다는 대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유나가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저보다 겁이 없다니, 어떤 분이신지 참 궁금하네요.”
“마침 저기 오네요.”
내가 뒤를 가리키자 이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미아랜드의 입구. 한세연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니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저분인가 보죠?”
“예.”
“마경주님도 던전을 클리어하셔야 하니, 제가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어떤 제안이죠?”
“저분보다 제가 더 겁이 없다는 걸 증명하면 저와 타시기로.”
“그러죠.”
예상보다 시원스러운 대답에 이유나가 웃어 보일 때였다.
“이분은 누구셔?”
어느새 다가온 한세연이 나와 함께 있는 이유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대답은 내가 아닌 이유나에게서 나왔다.
“당신 대신 마경주와 던전에 도전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리 말하며 한세연을 위아래로 흘겨보는 이유나. 한세연이 나를 쳐다보자 내가 뒷목을 긁적였다.
“뭐, 그렇다네.”
이런 내 말이 허락이라 판단했는지 이유나가 한세연을 보며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해요.”
“······?”
“오셔서 아시겠지만, 이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기구를 타야 해요. 겁이 없어야 요정의 인정을 받을 수 있죠. 그래서······”
스릉─
말을 하며 허리춤의 도를 빼든 이유나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누가 더 겁이 없는지 시합을 하기로 하죠. 어때요? 이긴 사람이 마경주님과 던전에 도전하기로 하는 건.”
눈을 깜빡이며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세연이 이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
“룰은 간단해요. 3분씩 서로 돌아가며 상대에게 겁을 줘서 먼저 포기를 외치는 쪽이 지는 거예요.”
제 옆에 소지하고 다니는 타이머를 내려놓은 이유나가 방긋 웃어보였다.
사실 이 시합은 그녀가 절대로 질 수 없는 시합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스스로의 심박수를 조절할 수 있는 비전 귀식(鬼息)을 전수받았으니.
상대가 어떠한 위협을 가하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유나는 한세연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그쪽 먼저 하세요.”
말과 함께 이유나는 곧바로 귀식을 발동했다. 그녀의 심박수가 죽은 듯이 내려앉았다.
한편, 이유나의 심박수가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던 한세연이 베레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유나의 이마에 겨냥했다.
위이이잉─
“······.”
모여드는 마력에도 이유나는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있게 웃으며 입을 열기까지 했다.
“언제 쏘실···”
타앙─!
말을 끊으며 쏘아진 마탄이 이유나의 볼가를 스쳐 지나갔다.
종이 한 장보다 더욱 얇은, 어마어마하게 정교한 거리였다.
머리가 아주 살짝만 흔들렸어도 바로 볼에 구멍이 났을만큼 가까운 거리.
천리안을 발동한 한세연은 그 세밀한 거리를 조절했다.
타다다다다당─
한 발도 아니고, 끝도 없이.
연속해서 쏘아지는 마탄의 연쇄에 이유나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뭐, 뭐야?!’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나도 가까웠던 것이다.
머리를 스치고, 심장을 빗기고, 눈가를 지나치고······
이건 심박수를 가라앉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눈알을 굴려 남은 시간을 확인한 이유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2:47]
***
삐비비빅─ 삐비비빅─
타이머가 울리자 한세연이 총을 내려놓았다.
“이제 당신 차례에요.”
“······.”
이유나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지면에 넘어진 그녀의 바지는 축축이 젖어있었고, 눈가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하지만 절대 ‘포기’라는 말을 외칠 수가 없었다. 안면을 스치는 탄환에 입술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탄환에 맞을 거라는 공포에 입도 뻥끗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게 3시간 같은 3분이 흐르는 동안 이유나는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속으로 흐느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공포에 잠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기다려도 이유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을 깜빡이던 한세연이 재차 총을 들어 올렸다.
“안 하시면 다시 제 차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