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이, 이건 반칙이야!
침묵을 지키던 요정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기가 찬 내가 말했다.
“반칙이고, 자시고 룰도 없었잖아.”
─그치만 도전자가 찾아야 하는 건데······
“여기 진짜.”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한세연을 가리켜 보이자 요정이 우우-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룰은 룰이었다.
요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결치던 거울의 세상에 쩌적- 금이 가더니, 잘게 부서져 내렸다.
파아아아아아아아─!
햇살에 반짝이며 흩날리는 파편이 신기루처럼 녹아내린다.
우리는 어느새 처음에 들어섰던 롤러코스터의 입구로 돌아와 있었다.
띠링!
[‘요정의 장난’을 클리어했습니다.]
[‘요정 루시의 소원권’을 획득합니다.]
······지반이 흔들리며 배배 꼬여있던 롤러코스터가 원래의 색이 바란 기구로 돌아온다.
운행을 하던 기구들은 모두 작동을 멈추어 있었다.
─흥, 좋아. 원하는 것을 말해봐.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루시. 내가 녀석의 몸을 홱- 낚아챘다.
─어, 엇! 뭐, 뭐 하는 짓이야!
“일단 좀 맞자.”
내가 주먹을 치켜들자, 루시가 히이익- 몸을 움츠린다.
머리를 소리 나게 콩! 쥐어박자 루시의 눈이 함지막하게 커지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려버린다.
─인간이 내 머리 쥐어박았어. 인간이 내 머리 쥐어박았어. 인간이 내 머리 쥐어박았어.
“시끄러워.”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루시.
“안 멈추면 다시 쥐어박는다.”
주먹을 슬쩍 들어 올리자 루시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만 흐느껴.”
─히끅!
“너 지금 나와 있는 수호자가 누군지 알지?”
─너가 그걸 어떻게······헙!
눈을 동그랗게 뜨던 루시가 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도리질 친다.
─나, 난 몰라! 우웁-
“모른다면서 입은 왜 막아?”
“우웁-”
루시가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으나, ‘룰’로 인해서 녀석의 입이 벌려졌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수호자는 ‘이준명’이야.
“···둘도 아니고 혼자 움직인다고?”
─응, 그런가 본데? ···헙!
말을 한 루시가 허겁지겁 제 입을 틀어막는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망했네.’
수호자란 여신을 대리해 이터니티를 관리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하는 업무는 다양했다.
차원의 붕괴로 생겨난 ‘균열’을 닫거나, 차원의 바깥에서 오는 이단의 존재들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여간해서는 현세에 관여하지 않는 놈들이었지만, 지금 영멸의 밤이 하고 있는 짓은 그 ‘여간’한 일을 넘어서 있었다.
아카데미에 균열을 뚫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진영논리를 과열시켜 이터니티를 혼란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었으니······
그게 단순한 혼란이라면 모를까, 또 다른 ‘균열’을 만들어내기 위한 행위였으니, 수호자의 업무 범주에 속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수호자 한 명 가지고는 영멸의 밤을 이기지 못한다.
이터니티를 관리하는 존재이니만큼 수호자의 무력은 강대했으나, 영멸의 밤 역시 녹록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수호자들은 이러한 영멸의 밤의 위험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감이 없는 거지.’
수호자란, 인간 중에서 ‘적합자’가 나오면 신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아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현시대의 수호자들은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된 이들이었다.
쉽게 말해 제 능력에 취해 휘둘리는 ‘초짜’들이라는 이야기다.
평시 업무를 할 때는 그러한 결함이 부각되지 않겠으나 상대가 날고 긴다는 초인들 중에서도 정점을 찍었던 영멸의 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역량에서나 경험의 차이, 모든 면에서 게임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영멸의 밤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수호자가 전부 나서줘야지.’
생각을 마친 내가 아직도 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요정이란 수호자와 협력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니 루시 또한 수호자와의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수호자를 만나고 싶은데.”
─그건 왜?
“알려야 하는 게 있거든.”
나는 의심스로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루시에게 ‘영멸의 밤’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정들 또한 영멸의 밤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는 편이 좋았으니.
그런데······
─흥! 그런 녀석, 나한테 걸리면 한 방이야!
코웃음을 친 루시가 힘을 과시하듯 잽과 훅을 번갈아 날렸다.
상상 속의 영멸의 밤을 때려눕히듯, 원투원투 주먹을 붕붕- 휘둘러대는 루시를 고사리같은 손이 잡아들었다.
─앗, 이거 놔! 놓으라고!
“·········잠자리.”
─잠자리 아니야! 뭐야, 이 무례한 꼬마는!
“·········흥미로워.”
제 손에서 버둥거리는 루시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샛노란 눈을 반짝였다. 새로운 생물(?)에 흥미를 가진 과학자 같은 시선이다.
─으으······
그 눈빛에 기가 질려버린 루시가 아나스타샤를 피해 날아올랐다. 그런 루시를 잡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나스타샤.
두 요정과 정령의 추격전은 아나스타샤가 내게 저지당하고서야 끝이 났다.
“아나스타샤, 이야기중이잖아.”
끄덕끄덕.
─허억, 헉.
도망치다 지친 루시는 하얀 손등 위에 앉아 숨을 골랐다.
“······.”
제 손등 위에 내려앉은 루시를 보며 한세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곤 지친 루시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으음······
눈을 감은 루시가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기분 좋은 비음을 흘렸다. 그러다 자신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는지 퍼뜩 눈을 뜨곤 툴툴거린다.
─멋대로 만지지 마! 머리 헝클어지잖아.
그런 루시가 귀엽다는 듯 한세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불만인지 볼을 뾰루퉁이 부풀리는 루시. 둘을 가만히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수호자는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지?”
─요정령에 가면 볼 수 있어. 거기 가끔 머물거든.
“고마워. 루시.”
한세연의 감사에 루시가 팔짱을 끼곤, 턱을 치켜든다.
“그럼 그 요정령에 나를 데려다 줘라.”
─그건 무리야.
“왜?”
─수호자 외의 인간은 요정경에 들어설 수 없어. 그건 룰로······
말을 하던 루시가 문득 입을 멈추었다. 그러곤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인다.
─잠깐. 뭐야, 너?
갸웃거린 루시가 내게 날아올랐다. 내 주변을 날아다니며 이모저모 훑어보던 루시가 급기야 내 얼굴에 고개를 들이밀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흐음.
“······.”
─흐으으음 ···아얏!
내게 이마를 얻어맞은 루시가 머리를 감싸쥔다.
“그만 쳐다보고 말해.”
─너 인간 맞아?
···이게 이제는 사람을 비인간 취급해버리네.
내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본 루시가 황급히 말했다.
─아무튼, 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가면 되겠네.”
─하지만 나는 못 데려다줘.
“왜?”
─알 것 없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루시.
“아, 그래? 그러면 가자.”
─응? 어디를?
“일 다 끝났으니까 팔아야지.”
─뭐, 뭐를?
나는 말없이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얼굴이 사색이 된 루시가 소리쳤다.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뭔데, 말해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루시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출했어.
“뭐라고?”
─가출했다고.
······어휴.
***
루시의 말에 의하면 요정령은 좁디좁은 동네라고 한다.
호기심이 왕성한 요정이 살기에는 적합한 동네가 아니라며 한탄을 하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 요정령은 블랙마켓의 모든 층을 다 합한 것만큼이나 방대한 공간이었으니까.
─요정들은 얼마나 고약한 줄 알아? 아침에 지나가는 요정 머리 위에 물을 붓고 장난이라고 웃는다니까? 이게 말이나 돼?
당한 게 많았는지 루시가 서러움을 분출했다. 말하는 걸 봐서는 좁아서 적합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동족을 싫어하는 듯했다.
내버려 두면 하루종일 요정에 대한 욕으로 떠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루시는 그 끔찍한 요정령에서 자유를 찾아 떠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다 정착을 한 곳이 바로 이 미아랜드였다고······
─운영도 안 하고, 놀래킬 것도 많고, 사람도 잘 찾아오고 얼마나 좋아?
당하는 건 지독히 싫어하는데, 남 놀리는 건 좋아하는 게 전형적인 ‘요정’이었다.
미아랜드에 대해 칭찬이란 칭찬을 끊임없이 늘어놓던 루시가 돌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데 너희들이 클리어를 해버려서 이제 떠나야 해.
기껏 찾은 집이었는데······
다시 떠돌이가 된 것이 생각났는지 루시가 울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루시를 달래주듯 한세연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눈을 감고 손의 감촉을 즐기던 루시가 방심했다는 듯 손을 탁! 쳐낸다.
─애 취급하지 마!
그러곤 경계하듯 한세연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그래서, 가기 싫다?”
─당연하지! 그런 동네에서는 죽어도 살 수 없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루시가 몸을 부르르 떨어 보인다. 아무래도 내게 말못 할 사연이 더 있어보였다.
‘가출했댔지.’
내가 아닌 척 되물었다.
“루시.”
─왜?
“요정들은 잃어버린 아이를 데려다주면 어떻게 하지?”
─그야 당연히 보상을 주지. 요정도 인간과 똑같아. 오히려 그런 쪽에는 더 철저해.
“그래?”
내가 씨익 웃자 그제야 루시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뒷걸음질쳤다.
─뭐, 뭐, 뭐야. 너 설마······!
“가자.”
나는 그대로 상태창에 떠오른 ‘루시의 소원권’을 사용했다.
***
─다시 말하지만, 너만 들어갈 수 있어. 다른 이들은 무리야.
루시는 내 주변에 모인 일행을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루시의 말투로 보아 마냥 ‘인간’이라서 들어갈 수 없는 것과는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엄연히 인간이었으니까.
“요정경에 들어가는 조건이 뭔데?”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야 해. 불순물을 지닌 인간이 들어오면 요정경이 더럽혀지니까.
“아아.”
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요정경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인 듯했다. 마력이 없는 나는 순수고 뭐고 따질 필요가 없었으니.
하물며 파랑이와 아나스타샤조차 순수한 자연의 정령이기에 불순물은 지니고 있지 않았고.
“그러면 데리고 갈 수 있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말 못 들었어?
내가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하자 루시가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그런 루시를 무시한 채,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마력지배자와 천리안을 합쳐 발동한 ‘전시안(全視眼)’이었다.
내 전시안에 비친 일행에게는 불순물이 보였다. 그런데······
‘이거 뺄 수 있겠는데?’
***
불순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모를까, 눈에 보이는 이상 그것을 빼내는 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력으로 모아서 긁어내면 그만이었으니.
‘빼낸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쌓이기야 하겠지만······’
“······여기 앉아있으면 되겠습니까?”
마경의 저택. 나는 실험을 위해 소피아를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내 방에 처음 들어와 보는 소피아는 의외로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 모습에 내가 장난스레 말했다.
“불편하면 아예 침대에 눕던지요.”
“······.”
소피아가 잽싸게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던 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소피아.”
“······예?”
“몸이 굳었어요.”
“······예.”
“풀어요.”
“······예!”
소피아는 고장난 태엽처럼 대답할 뿐, 좀처럼 경직된 몸을 풀지 못했다.
아니, 갈수록 더 굳었다.
내 손에 닿은 소피아의 등은 목석처럼 딱딱했다. 나는 혀를 찼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손을 쭉 뻗었고.
“······해솔님? 가능하면 빨리-”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 소피아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짜아아악─!
맑고 찰진 소리가 울렸다. 내가 소피아의 등을 강하게 후려친 것이다.
“흐앗!”
그 충격으로 소피아의 입이 벌어진 찰나, 불순물이 쭈우욱- 빨려 나갔다.
“아으······”
고통과 이상야릇함이 혼재된 정체 모를 감각에 소피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