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뻔뻔하게 잘도 이곳까지 들어왔구나!”
지면에 창을 박아넣으며 내려서는 붉은 머리의 여자.
그녀를 시작으로 인간형의 요정들이 우리를 포위하며 내려섰다.
‘······요정기사단.’
그들이 요정경을 지키는 기사들임을 알아본 내가 표정을 굳혔다.
요정기사단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짙은 분노였다.
어째 상황이 내 예상과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우리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시끄럽다!”
내 말을 끊은 붉은 머리의 요정이 소리쳤다.
“요정경의 신민을 유괴해놓고도 오해라니!”
“글쎄, 우리는 유괴한 적이 없다니까?”
내가 인상을 써 보이자, 요정도 그제야 의심의 기색을 보였다.
“···요 근래에 요정이 스무 명이나 납치를 당했다. 정말 너희 짓이 아니란 말이냐?”
─셀라피네님, 이분들은 아니에요.
“루시······”
루시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저어 보이자 셀라피네라 불린 여성의 눈이 흔들렸다.
“거봐, 루시도 아니라잖아. 그런데 요정이 납치를 당했다고?”
“그래, 인간들은 이터니티건 요정경이건 가리지 않고 요정들을 납치해가고 있다. 그리고 루시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셀라피네의 말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루시를 돌아보았다.
“너 그렇게 신용이 없었냐?”
─아니, 그럴 리가······
“···루시가 확실히 신용이 높지 않은 아이이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지어낼 아이는 아니다.”
한 템포 늦게 우물쭈물 입을 여는 셀라피네. 믿는다는 말과 달리 어조에서는 그리 강한 확신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없나보네.”
─아니라니까?! 나 신용 높거든?!
루시가 열변을 토했으나, 주변의 무반응으로 보아 신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던 듯싶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지어낼 아이는 아니라며? 그러면 루시의 말을 왜 안 믿는 거지?”
내가 의아해져 묻자 셀라피네가 분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정들은 세뇌를 받고 있다.”
“세뇌?”
“그래. 녀석들은 우리를 세뇌해서 같은 동족을 데려오는 치졸한 방법으로 납치를 자행하고 있다.”
······골치 아파졌네.
루시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기에 내가 내심 혀를 찼다.
“아무튼 우리는 모르는 일이야. 얘가 가출했다기에 데려다주러 온 거고.”
─가, 가출이라니! 외출이라니까?
당황한 루시가 황급히 변명을 했으나 그 말을 믿을 사람과 요정은 아무도 없었다.
6년간 말도 없이 외출하는 것은 요정들에게서도 상식적인 행동은 아닌 듯했으니.
나와 루시를 잠시 번갈아 보던 셀라피네가 의구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럼 인간의 몸으로 요정경에 들어온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거야 불순물이 없으니까······”
후아아악─!
순간 나를 향해 번개처럼 쇄도하는 불의 창.내 앞으로 나선 소피아가 이를 쳐냈다.
카앙─!
창이 튕겨나가자, 셀라피네가 눈을 빛냈다.
“호오, 제법이군. 하지만 인간이 넷씩이나 순수개체라는 것을 믿을 거라 생각하다니. 우리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아는가?”
“맞으면 어쩔 건데?”
“흥!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네게 빚을 진 거로 하지.”
“그래? 나쁘지 않네.”
셀라피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우리를 둘러싼 요정기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
지반이 일어나더니 거대한 흙의 기둥들이 우리를 감옥처럼 에워쌌다.
아멜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이 움직이지 않아요, 이 기둥들이 마력을 억제하고 있어요.”
내가 셀라피네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어쩔 거지?”
“일단 요정궁으로 데려가겠다. 그 다음은 루시가 세뇌를 당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판결이 정해질 거다.”
“들었지?”
─뭐, 뭐를?
“잘 부탁한다.”
당황하는 루시에게 모든 걸 맡긴 나는 그대로 흙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해솔아, 커피 마실래?”
“응, 땡큐.”
태평하게 보온병의 커피를 노나 마시는 나와 한세연을 주변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이야~ 경치 좋네.”
요정경의 몽환적인 풍경을 구경하며 나는 한세연이 따라주는 커피를 홀짝였다.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구경 좀 해. 요정경 구경하러 왔다며.”
“지금 경치가 눈에 들어오게 생겼어요?”
아멜리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째려보았다.
“어쩌려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거예요?”
“그럼 떨어질까?”
“아씨,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엣취! 으으···”
아멜리아가 코를 훌쩍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오오오!
거대한 자라가 울음을 토하며 그녀의 앞을 지나간다. 그 너머에선 고래가 뛰놀고 있었다.
문제는 이곳이 ‘상공’이라는 것이었다.
새하얗게 펼쳐진 운해의 바다. 그 사이사이로 높이 솟구친 나무들이 구름을 뚫고 자라나 있다.
나무들을 따라 흘러내리는 초록색 물줄기. 사람보다 거대한 꽃들.
지금도 그녀의 머리 위에서는 요정 새끼··· 아니, 아이들이 신이 난 듯 노란 꽃가루를 펄펄 뿌려대고 있었다.
그녀가 꽃가루 알레르기란 걸 어찌 알았는지 집중해서 그녀의 머리 위로만 꽃가루를 퍼붓고 있다.
“엣취! 씨이···”
아무튼 이처럼 추위와, 꽃가루만을 제외하자면 절로 감탄이 이는 절경이었으나, 아멜리아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휘오오······
창살처럼 뭉친 모래 알갱이들이 아멜리아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들은 지금 요정들에게 끌려 판결을 받으러 가고 있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것도 이 하늘에 떠오른 모래 감옥에 갇혀서.
초조해하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내가 툭 던지듯 물었다.
“죄지었냐?”
“예? 제가 죄를 언제 지어요?”
“안 지었으면 찔릴 것도 없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그나저나 이거 신기하네.”
내가 우리를 가둔 모래 감옥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 감옥은 요정들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흙이 반응해 즉석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법과는 다르고 기프트와도 차별되는 요정들만의 고유한 기술이었다.
한편, 내가 자신의 말은 들어주지 않고 태평하게 감옥에 대해 평하고만 있자 아멜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있으면 이러고 있겠냐?”
“근데 왜 그렇게 태평해요?”
“어차피 루시만 정상이라는 게 밝혀지면 오해야 풀릴 거잖아. 그럼 구경이라도 해야지.”
“아우··· 엣취!”
일행 중에 걱정인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에 자포자기하던 아멜리아가 휘날리는 꽃가루에 제채기를 했다.
“아 좀 그만 뿌려-!”
─꺄하하! 꺄하하!
아멜리아가 위를 올려다보며 신경질을 내자 요정들이 좋다고 웃어댄다.
그렇게 아멜리아가 요정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한편, 한세연은 무슨 택시라도 탄 것마냥 편안해 보였다.
호기심 어린 요정이 모래감옥 안으로 들어오자 그 머리를 상냥히 매만져주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요정도 그 손길이 기분이 좋은지 아예 한세연의 무릎에 자리를 틀고 앉아버렸다.
뭐, 얘야 원체 걱정이 없는 애니 그렇다 치더라도······
‘의외로 얌전하네.’
나는 소피아를 보며 갸웃거렸다. 그녀는 대검을 품에 안은 채 묵묵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지금쯤 눈을 꼭 감고선 대검을 생명줄마냥 끌어안은 채 도착할 때까지 웅크려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니, 굳었네.’
앞으로 가 소피아의 모습을 확인한 내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어째 조용하다 싶더니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소피아는 지면에 발이 닿을 때까지 계속 이 상태일 것이다.
“에구, 많이도 쌓였네.”
내가 소피아의 머리와 어깨에 눈처럼 쌓인 꽃가루를 털어주었다.
“어, 으···”
“가만히 있어 봐요.”
고개를 들려는 소피아의 눈과, 코, 귓가에 들어간 꽃가루를 말끔히 정리해주고 있을 때였다.
─다 왔어. 저기가 요정궁이야.
말없이 쪼그려 앉아있던 루시가 입을 열었다.
“오.”
루시를 따라 앞을 바라보니 과연, 순백의 나무가 하늘을 덮을 듯이 솟아나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요정들이 순백의 나무를 돌아다니는 것은 일대의 장관이었다. 이를 쳐다보던 아멜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거 설마······”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세계수인가요?”
“인간이 보는 눈이 있군.”
모래감옥을 감시하며 날고 있던 셀라피네가 입꼬리를 올렸다.
“맞다, 세계수다.”
“세상에······”
세계수는 이터니티의 모든 이들이 찾아다니는 환상의 나무였다.
그 나무가 요정경에 실존한다는 사실에 아멜리아는 멍하니 입만 벌렸다.
셀라피네는 우리를 데리고 세계수 중에서도 가장 두텁게 뻗은 가지로 내려섰다.
가지의 위에는 이미 수많은 요정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적대감이 한가득이다.
그 살기에 반응했는지 동상처럼 굳어있던 소피아가 정신을 차린 건 덤이다.
“···무슨 이세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이네요.”
“이세계 맞아.”
아멜리아의 감상을 정정해준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잡혔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세계수의 수많은 가지 위에는 요정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요정수들이 즐비하게 자리해 있었다.
“···저거 지렁이 맞죠?”
“응, 그 뒤에는 두꺼비네.”
사람만한 지렁이에게 나뭇잎을 먹이는 요정, 아늑한 두꺼비의 입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요정 등, 요정수들의 외양은 기상천외했다.
“···지렁이는 4성 마수보다 강해 보입니다. 특히 저 두꺼비는 라우라가 키우는 무소하고도 견줄만 해 보이는군요.”
소피아마저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그만큼 요정수들이 풍기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마치 마경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요정경이라더니, 이거 순 괴물딱지 천국이네.’
요정수라는 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서 백여 마리에 가깝게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게임에서야 요정경은 재료템 먹으러 잠시 들리는 장소지, 이렇듯 세계수까지 올 일은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요정수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셀라피네가 말을 걸어왔다.
“저들이 너를 공격할 수도 있는데 걱정이 되지 않나 보군.”
“내가 왜?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거야 루시를 확인해보면 알겠지.”
셀라피네가 그리 말을 했을 때였다.
──구워어어어!
가지의 위. 집채만한 검은 소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요정과 요정수들이 일제히 세계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린다.
─요정왕님께서 나오시는 거야.
그리 말한 루시도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시끌벅적했던 주위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아멜리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속닥인다.
“···요정왕이라니, 어떻게 생겼을까요.”
“글쎄. 많이 늙지 않았을까?”
“이형의 존재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닐 것 같아요.”
“?”
소피아와 내 의견에 고개를 저은 아멜리아가 확신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머리에 나뭇가지 왕관을 인 백금발의 미남일 거예요. 아니면 의외로 어린아이일지도 몰라요.”
“뭔가 굉장히 구체적이네.”
“대부분 그렇게 생겼거든요.”
“···대부분?”
“네.”
그 대부분이 어디서의 대부분인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으나 묻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가 요정왕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세계수의 거대한 입구 안에서 요정왕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왔다.
“······음, 뭐랄까.”
요정왕을 본 내가 뺨을 긁자, 아멜리아가 말을 받았다.
“깨네요.”
“어, 깨네.”
요정왕은 백금발의 미남도, 늙은 현자도, 이형의 존재도 아니었다.
어디서나 볼법한 배가 두툼하니 나온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모습에 불과했다.
“그대들인가 보군. 루시를 데려왔다는 인간들이.”
가라앉은 눈으로 모래감옥에 갇힌 우리를 주시하는 요정왕에게서 중후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엘리아스님! 이건 오해에요! 이분들은 제가 데려온 손님들이라고요!
“그건 확인해봐야 알겠구나. 루시를 데려오도록.”
요정왕 엘리아스의 말에 기사들이 움직여 모래감옥에서 루시를 데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고래를 탄 요정이 나와 루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루시가 세뇌를 당했는지를 검사하는 듯한 모습에 아멜리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겠죠?”
“괜찮겠지. 우리가 쟤를 세뇌한 것도 아닌데.”
나는 별로 긴장을 안 했다. 루시가 정상이란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대접이나 받으면서 요정경을 구경하며 쉬다가면 되는 것이다.
이윽고, 루시의 검사를 끝낸 술사가 요정왕 엘리아스에게 작게 쑥덕였다.
그리고 뒤이어 엘리아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저 인간 놈들을 당장 사형해라!
······뭐?
분노한 엘리아스의 목소리에 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