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휘오오오······
일행을 가둔 물결이 회오리친다.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회오리의 안으로는 어떠한 소음도, 마력의 흐름도 파고들지 못했다.
퍼어엉─!
은가예의 나겔링에 베인 물결이 폭음을 내며 터져 나간다.
하지만 물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뭐야, 이거?”
은가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일격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물질을 넘어 현상과 흐름조차 내리눌러버리는 중력의 마력이다.
그 중력의 마력에도 소용돌이는 잠시 흐트러지기만 했을 뿐, 아무런 영향조차 받지 않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몇차례고 나겔링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해, 소용없으니까.”
다시 소용돌이를 향해 나겔링을 휘두르려는 은가예를 내가 만류했다.
“물의 가호가 쳐져서 기프트가 통하지 않는 거야.”
아공의 비틀림은 수호자들의 억지력을 거두어갔으나, 아이리스는 아니었다.
마력의 돌에 이어진 계약의 선에 의존할 뿐인 수호자들과 달리 집행자인 그녀는 스스로가 가호를 타고난 존재였으니.
고작 선을 비튼 것만으로는 약간의 영향만 줄 수 있을 뿐, 아이리스의 가호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어쩌게? 계속 여기 갇혀있을 수는 없잖아.”
그들을 가둔 물의 감옥은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물에 빠져 익사를 하든, 소용돌이에 갈리든, 좋지 못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심각해져 있는 은가예와 달리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노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이 든 아멜리아를 무릎에 눕혀놓곤 그녀의 복부에 새겨진 문신을 어루만져가며 방어기제를 달래었다.
좀 전의 마력 전달로 인해 방어기제가 필요이상으로 자극을 받아버린 것이다.
내버려 뒀다간 방어기제의 의식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이렇게 달래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척이던 아멜리아는 이내 새근새근- 고른 숨결을 내쉬며 편안한 안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이야.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죽거든.”
영문을 모를 소리에 은가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멜리아가 지닌 방어기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나는 아이리스보다 아멜리아의 방어기제가 훨씬 더 무서웠다.
아이리스는 말이라도 통하지, 아멜리아는 아예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재앙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급한 불을 꺼놓은 나는 그제야 소용돌이로 시선을 돌렸다.
휘오오······
물결만이 보일 뿐, 외부의 어떠한 풍경도 비치지 않는 그곳에는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선연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가호를 이런 식으로 쓰는 건 권리남용인데요, 집행자님.”
“사원을 위협하는 존재에게 사용하는 가호는 권한 내의 일입니다.”
집행자, 아이리스가 담담히 대꾸한다. 그런 그녀의 눈에 어린 호기심에 내가 피식 웃었다.
“왜, 당신이 집행자인 걸 내가 어찌 알았는지 궁금해?”
“······.”
아이리스는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내가 대답했다.
“알려주기 싫은데.”
아이리스의 미간이 좁혀진다.
혼자 궁금하냐 묻고 알려주기 싫다니,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을 거다.
그보다 내 여유로운 모습이 아이리스의 심기를 자극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임이 분명함에도 나는 필요이상으로 태연해 보였으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리스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
“마력의 돌을 가지고 조건을 걸려고 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건 당연히 안 고쳐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쳐다보자 아이리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말이 없어진 그녀에게 내가 제안을 말했다.
“우리를 여기서 풀어줘. 그러고 너는 이대로 애들 데리고 돌아가는 거야.”
“······.”
“어때, 나름 많이 봐준 조건이라 생각하는데.”
“장난을 하시려는 거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장난 아닌데.”
아이리스는 장난이라 생각했을지 모르나, 나는 정말로 많이 봐준 거였다.
마력의 사원이 존재해야만 하는 필요악만 아니었다면 이런 제안조차 꺼내지 않았을 테니.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리스에게 내가 씨익 웃어 보였다.
“안 그러면 너는 모든 가호를 잃게 될걸?”
“가호를 잃는다니 그게-”
“오색 성전에 사람을 보내놨거든.”
“···어떻게 거길 알았죠?”
얼마나 놀랐는지 무표정했던 아이리스의 눈이 커다래진다.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회오리치는 물결이 거칠게 꿀렁였다.
그도 그럴 게 성지(聖地)는 마력의 사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곳이 바로 ‘오색 성전’이었다.
그곳에 자리한 5대 성령이 모두 사라지면 아이리스의 가호는 끝이 난다.
아니, 이 땅에 더 이상 성력이라는 힘은 존재치 않게 될 것이다.
이터니티는 신에게 버림을 받게 될 테니까.
내가 극비로 치부되는 오색 성전의 존재를 안다는 사실에 아이리스는 살짝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으나, 금새 평정을 되찾았다.
그도 그럴 게 성전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 성령을 없앨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5대성령은 없애고 싶다고 해서 없앨 수 있을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심하는 듯한 아이리스의 모습에 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누구를 보냈을 거라 생각해?”
“설마······!”
짐작가는 바가 있는지 아이리스의 눈이 동그레지자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 그 설마야.”
그때 마침, 내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이 부르르- 울렸다.
전화를 건 상대를 확인한 나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받았다.
─해솔아, 첫 번째 성령은 없앴어. 나머진 어떻게 할까?
스피커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천우진의 목소리에 아이리스의 눈이 거칠게 흔들린다.
내가 오색성전에 보낸 사람.
그건 바로 천우진이었다.
이형을 베어내는 검성의 자질을 지닌 천우진이야말로 성령의 천적(天敵)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이미 한 놈 처리한 모양이었고.
“마저 없애.”
─알았어.
“잠깐-”
다급히 손을 뻗는 아이리스를 뒤로하고 통화를 끊은 내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쩔래. 다 잃고 돌아갈래, 아니면 그나마 남은 힘이라도 건져서 돌아갈래?”
***
이해솔과의 통화를 끝마친 천우진이 앞을 바라보았다.
수정이 비치는 광활한 지하세계.
그곳에는 하얀 동체에 검은 줄무늬를 가진 거대한 짐승이 몸을 눕히고 있었다.
산의 제왕이라 불리는 짐승이자 오색 성전의 수호성령.
─뇌령(雷靈) 대호였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위명과 달리 상태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길게 베인 옆구리는 속을 드러냈고, 구멍이 뚫린 심장에서는 피가 흘러넘쳤다.
“······.”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천우진은 대호의 사체를 내버려 둔 채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츠즈즈즈즛─!
천우진이 몸을 옆으로 날렸다.
콰아아앙─!
그가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꽂히며 지면이 터져나갔다.
“어쩐지 너무 쉬운 것 같았어.”
뒤를 돌아본 천우진의 눈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대호의 사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있었다.
녀석의 전신에서 번개가 튀기며 상처가 수복된다.
─크허어엉!
녀석의 거대한 포효에 지하신전이 우르르 흔들리며 천장에서 후두둑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도와줄까요?”
“괜찮습니다. 세 분은 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최아린의 물음에 천우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뒤에는 최아린을 비롯해 리디아와 니엘, 두 아이가 자리해 있었다.
천우진이 이 지하의 성전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닷새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수많은 난관을 거쳤고 그럴 때마다 최아린과 두 아이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 성령만큼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내고 싶었다.
아니,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검성.
이형을 베어내는 이 힘이야 말로 성령에게 대항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이었으니.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큼은 스스로 해내고 싶었다.
“도움만 받고 싶지는 않거든요.”
천우진이 실력을 갈고 닦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스승인 노아였다.
하지만 검성의 능력을 제대로 깨우치게 해준 것은 바로 이해솔이었다.
녀석은 정말 신기하게도 노아조차도 잘 모르는 검성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잘 다룰 수 있고, 어찌해야 자신에게 맞는지조차도 확실하게 꿰뚫고 있던 것이다.
마치 자신에 대해 연구라도 해 본 사람처럼 말이다.
이해솔은 지나가는 식으로 툭툭 던져주는 식으로 말했기에 조언이라고조차도 인식하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그때마다 막혔던 것이 시원하게 뚫렸던 천우진으로서는 이해솔에게 갚지 못할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마경에서 마수를 사냥하는 경험조차도 누리지 못했을 테니.
그러니, 이를 갚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그 스스로가 해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이해솔이 자신을 믿는다며 직접 부탁한 일이었으니까.
거기다 대호라는 존재가 그의 호승심에 불을 붙여 놓았다.
─크허어엉!
번개처럼 달려드는 대호를 향해 천우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
내 제안에 아이리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느긋했다.
오색의 성전이 인질로 잡힌 이상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휘오오······
소용돌이치던 물의 급류가 잦아들며 씻은 듯이 사라진다. 불길의 뜨거운 열풍이 피부로 들이친다.
그와 동시에 아이리스를 향해 강기의 다발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물의 방벽을 일으킨 아이리스가 이를 막는 사이, 누군가 내게 뛰어왔다.
“해솔님! 괜찮으십니까?!”
놀란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묻는 상대는 바로 소피아였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예, 멀쩡합니다.”
그녀는 내 멀쩡하다는 말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는지 직접 내 몸 상태를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제야 밝게 웃어 보이는 소피아. 멋쩍어진 내가 볼을 긁적였다.
어째 나는 소피아에게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한편, 그녀의 뒤로는 이본느를 비롯해 마경의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물의 회오리탓에 접근을 하지 못하고,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내가 무사히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린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나올 걸 그랬네.’
괜히 마음을 졸이게 만든 것을 조금 후회한 내가 아이리스를 돌아보았다.
소피아가 작정하고 날린 검강의 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처음처럼 멀쩡한 모습이었다.
과연, 사원의 집행자다운 무위였다.
“저 여자가 그 집행자인 모양이군요.”
소피아가 경계하듯 표정을 굳히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야기가 다 끝났거든요.”
“예?”
그때, 아이리스의 태도를 보게 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실례했습니다.”
그곳에는 기도를 하듯 양손을 모은 아이리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