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마경의 밤.
마력의 기류에 나뭇잎이 몸을 떨고, 풀벌레가 숲의 고요를 깬다.
전장의 불길이 지나간 그 마경 한복판의 저택.
부서져 내리는 달빛이 어둠을 밝히는 방 안에서 나는 잠에 든 한세연을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
새근새근···.
고른 숨결을 내쉬며 잠이 든 한세연의 모습은 새삼 편해 보였다. 고열에 시달리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더 이상 성력이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녀를 각성시키려던 성력의 흐름은 아공의 비틀림에 갈 길을 잃어버렸으니.
휘오오······
그때, 때아닌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귓가를 적셔왔다.
방과는 어울리지 않은 소음이었으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무데나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며 의자를 끌어다 앉는 누군가.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앉아 잠에 든 한세연을 흘낏 쳐다보는 푸른 여인은 몇 시간 전 사제들을 데리고 마경을 떠났던 아이리스였다.
“저 여성분이 각성자인가 보군요.”
“신경 꺼.”
“그러겠습니다.”
건드리지 말라는 내 반응에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호기심에서 꺼내 본 말일 뿐, 그녀 또한 한세연에게 큰 관심은 없었으니.
오히려 그녀는 나를 더 기이하게 여겼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을 위협하던 상대가 바로 뒤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하는 내 태도는 너무도 편해 보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공격을 가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내 태도가 신기한가 보지?”
“그렇습니다.”
속마음을 꿰뚫린 아이리스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나를 공격하지 못해.”
“······.”
내 호언장담에 아이리스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마력의 돌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아공의 비틀림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면 꽤나 있을 것이다.
당장 내게 ‘아공의 조율자’를 넘겨준 세계수의 정령은 물론이요, 공간마법에 뛰어난 이본느만 해도 조금의 연구를 한다면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아이리스는 마력의 돌이 고장난 원인이 공간의 비틀림에 의해서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공은 여타의 공간마법과 달리 그 작용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으니.
겁박을 하려다 쓴맛을 맛보았던 아이리스로서는 나를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아이리스를 저택으로 불러들인 것은 바로 나였다.
사원의 방식은 엿 같으나 결과적으로는 세계 자체에 이로운 일을 하는 놈들임은 분명했으니. 그렇기에 아이리스의 힘을 필요로 할 일이 존재했다. 물론 그 전에······.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지?”
“마경의 주인이며 이터니티 아카데미의 생도시라 들었습니다.”
과연 마력의 사원이다. 공들여 감춘 것은 아니라지만, 대외비인 내 신분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정보력 하나는 대단했다.
만약 마경에 대해서도 명확히 조사하고 왔다면 오늘과 같은 일방적인 싸움 또한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이본느의 기습이 통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저런 표면적인 신분들이 아니었다.
“그런 거 말고, 내 진짜 정체.”
“······.”
단도직입적인 내 물음에 아이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내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터니티의 피조물이라면 접근이 불가능한 마력의 돌에 다가가 있는 나를 아이리스는 직접 목격했었으니까.
“‘이방인’이라 보고 있습니다.”
“맞아. 이방인이지.”
나는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내가 플레이어라는 것은 비밀이었으나, 이래야지만 대화를 하기가 편해질 테니.
“내가 당신을 따로 부른 이유는 한 가지야.”
아이리스의 푸른 눈을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알고 있지? 우르크를 없애는 방법.”
“······.”
‘우르크’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이리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것은 차원의 저편으로 추방된 옛 신의 이름이었으니.
“우르크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한 가지 있잖아.”
“······.”
“영혼을 넘기는 법.”
“!”
아이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은 불가능하다고 판명이 났습니다.”
추방을 당한 우르크의 영혼은 ‘이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이곳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셀 수 없이 기나긴 세월을 보내왔으니.
신조차 이성을 잃고 미쳐버릴 그 영겁의 세월 속에 우르크의 이지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필시, 무너져 내려, 사라져버렸을 것이리라.
하지만 우르크의 사념만은 남아, 세계와의 접촉을 꾸준히 취하고 있었다.
그 우르크와 접촉한 자를 사원에선 ‘멸망의 사도’라 규정했으며, 그들은 우르크의 힘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대의 사도가 바로 영멸의 밤, 유진이었다.
만일 유진이 균열을 열어 우르크의 힘을 전부 지니게 되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하리라.
그렇기에 사원에서는 우르크를 없애고자 했고, 그 방안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무너져내린 우르크의 영혼을 그 힘을 취하고자 하는 사도에게 함께 넘기는 방법이었다.
우르크의 힘만을 취하고자 하는 사도에게 그 영혼마저 넘겨버리면 어떻게 될까.
‘무너져내리지.’
영겁의 세월을 한낯 피조물인 인간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렇기에 사원은 우르크의 영혼을 감추어 그 힘과 함께 사도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있었다.
“우르크의 영혼을 어떻게 넘기느냐입니다.”
우르크의 영혼을 넘기기 위해서는 그 ‘전달자’도 우르크의 영혼에 닿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사도에게 전달을 하기도 전에 전달자가 먼저 무너져내리리라.
사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에는 해결하지 못하고 폐지된 계획이었다.
나 또한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아이리스는 추후에 저 방법을 본인이 직접 하려다가 실패를 하게 되니까.
“걱정 마, 당신보고 하라곤 안 할 테니까.”
“그러면······”
의아해하는 아이리스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할 거야.”
“!”
아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가능하겠습니까?”
“나라면.”
부동의 각인을 지닌 내 정신력은 지룡조차 범접치 못한다는 것은 이미 판명이 난 사실이었다.
‘더 강해지기도 했고.’
지룡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내 정신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나라면 옛신의 영혼을 잠시간 소유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까 균열에서 손 떼.”
***
······한편, 요정경의 어딘가. 오색의 숲을 거닐던 유진이 제 곁의 엔마를 돌아보았다.
“네 억지력이 사라졌구나.”
“그렇네요.”
갸웃거린 엔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처음부터 억지력에 의존한 적이 없었으니.
“이쪽이에요.”
마력의 내음을 맡던 엔마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들이 찾는 곳은 세계수의 정령, 샤린이 기거하는 장소였다.
샤린의 거처는 요정왕 엘리아드조차 모르는 곳이었으나, 엔마는 마력을 더듬어 샤린의 거처를 찾아가고 있었다.
요정은 개체마다 특유의 ‘마력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엔마는 희미한 마력의 잔향마저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자였으니.
요정왕 엘리아드의 마력향을 아는 그녀에게 그와 같은 향을 지닌 샤린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숲길을 벗어나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낭떠러지의 아래로는 다채로운 화원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 오두막이 존재했다.
그런데······
“나와 있네요.”
오두막의 앞에 선 초록의 여인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하듯이.
“세계수의 정령에게는 미래를 읽는 능력이 있다더니 사실인가 보구나.”
─모든 걸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머릿속으로 선연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샤린의 대답이었다.
“그렇군.”
엔마를 내버려 둔 유진이 오두막의 앞으로 천천히 내려선다.
“어서오세요, 영멸의 밤.”
샤린의 정중한 인사에 유진이 유감이라는 듯 말한다.
“좋은 의도로 방문한 게 아니라 환영받을 처지는 못 되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온 지 아나보군.”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줄 수 있겠나?”
샤린이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렵겠네요. 이미 그것은 제게 없답니다.”
“······.”
뜻밖의 대답에 유진은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누구에게 넘겼나?”
“그것도 말할 수 없겠네요.”
계속되는 거절에 유진은 잠자코 샤린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내다보았다.
“인형인가.”
“눈치가 빠르시네요.”
이번에는 샤린도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의 모습이 본신이 아닌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유진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마력향을 쫓은 엔마조차도 지금의 샤린을 본체라 인식했을 정도였으니······
“헛걸음했군.”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샤린의 태도로 보아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가 찾는 것을 누가 가져갔는지 알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왕 오셨으니 요정경이라도 둘러보시다 가시지요.”
“그럴 기분은 아니라네.”
푸스스스······
유진의 몸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오며 화원의 꽃들이 메말라 부스러졌다.
샤린조차도 일순 흠칫할 정도로 스산한 기운이었다.
그렇게 몸을 돌리던 유진이 문득 궁금해졌다는 듯 샤린을 바라보았다.
“미래를 읽을 수 있다고 했나?”
“그저 앞날을 조금 내보다는 것뿐이랍니다.”
“내게서는 어떤 앞날이 보이는가?”
“‘죽음’입니다.”
샤린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목이 잘리고 썩어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저주와도 같이 퍼부어지는 악담이었다.
──바로 그 순간.
【입 조심해.】
후아아아악──!
섬뜩한 경고와 함께, 소름끼치는 마력의 태풍이 샤린에게 밀어닥쳤다.
흙더미째 들린 꽃들이 날아다니고, 화원을 뛰놀던 요정들이 비명을 지르며 휘말린다.
그 재앙의 발원지는 유진이 아닌 절벽 위의 엔마였다.
무표정함은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분노한 얼굴, 붉어진 눈가였다.
그러나 세상을 찢어발길 듯 사납게 몰아치던 마력풍은, 유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씻은 듯이 잦아들었다.
유진이 멈춘 것이 아닌 엔마 스스로가 마력을 거두어버린 것이었다.
“그런가.”
유진이 샤린을 보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결말이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동요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결말이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요정도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모양이군.”
“······.”
“저 아이는 어떤가?”
유진이 가리킨 절벽 위의 엔마를 힐끗 올려다본 샤린이 빙긋 웃는다.
“오래 살겠군요.”
유진과는 다른 이야기에 엔마가 미간을 좁혔으나, 유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답례네.”
마치 재미난 사주를 듣고, 값을 치르는 것 마냥, 유진이 어른의 머리통만한 정령석을 난장판이 된 화원의 위로 던진다.
휘아아아······
오색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뿌리째 뜯겨나갔던 화원이 제모습을 되찾아갔다.
이를 뒤로한 채 유진은 요정경을 떠났다.
균열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찾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