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한세연이 내 쪽으로 와서 그럴까. 학생회 임원들의 이목이 내게로 쏠린다.
마치 이건 뭐 하는 녀석인가 하는 궁금증이 어린 시선이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제법 이름을 알렸다지만,
취업활동으로 외부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은 3학년은 나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
특히 한세연에게 관심이 많은 선배의 표정은 그리 호의적이지가 못했다.
‘폭탄을 떠넘겨버리네.’
나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한세연을 보며 남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여기 계속 있다간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교실가는 거지?”
“응.”
“가자.”
벤치에서 일어난 내가 한세연의 손에서 프린트물을 반절 받아들곤 앞장선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프린트물을 대충 훑어본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나도 모르겠네.’
요즘 이래저래 바빠서 한동안 공부를 못했더니 무슨 내용인지 봐도 모르겠다.
역시 공부를 좀 하긴 해야겠다. 적어도 낙제로 퇴학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러고 보니 얘도 쉬었는데.’
나는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한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호자로의 각성 탓에 일주일간 병가를 내고 오늘 막 복귀한 차였다.
당연히 그동안은 수업을 듣지 못했을 텐데도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밀린 학급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왜?”
내가 가만히 쳐다보니 한세연이 갸웃거린다.
“공부는 다 했어?”
“응, 낮에 복습은 끝냈어.”
방긋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하는 한세연. 역시 얘를 공부로 걱정하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나나 걱정해야지.
“그러면 나 노트좀 빌려줘라.”
“응, 정리 마치면 줄게.”
본인도 병가로 쉬었을 텐데도 한세연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다만 생각지 못한 조건이 붙었다.
“대신 문제 하나만 맞추면.”
“문제?”
“응. 못 맞추면 해솔이도 내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
“뭘 부탁하려고? 어려운 거야?”
한세연은 어려운 거냐는 내 말에 갸웃거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아니, 간단한 거.”
“뭐야, 그게. 그런 거면 그냥 말을 하지.”
한세연의 부탁이라면 어지간한 것은 그냥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동안 신세를 진 것도 많았던 데다, 얘가 나한테 직접적으로 부탁을 해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하지만 이런 내 말에도 한세연은 작게 웃어만 보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체 뭐를 원하길래 이러나 궁금해 하는 사이 우리는 교실에 도착했다.
실외 자율로 인해 교실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교탁에 프린트물을 내려놓은 나는 내 자리로 가 앉았다.
이왕 들어와 버린 김에 다시 나가기도 번거로웠고 여기가 더 쉬기 편했으니.
한세연은 이런 내 맞은편에 책상을 마주 보고 앉았다.
“문제 내려고?”
“응. 5초 안에 답하면 해솔이가 이기는 거고 틀리면 내가 원하는 거 들어주기.”
“좋아.”
이쯤되니 얘가 뭐를 원하는 지가 나도 알고 싶어졌다.
[00:05]
스마트폰의 타이머를 맞춰 책상 위에 내려놓은 한세연이 나를 바라보며 바로 문제를 낸다.
“그럼 문제.”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게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웠다.
“내가 좋아하는 음료 맛은?”
한세연이 마시는 음료의 맛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음료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그 맛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런 것쯤이야. 너무 간단한 문제에 피식 웃은 내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그야 수박-”
──바로 그 순간.
“!”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정답을 말하려던 내 입을 부드러운 무언가가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세연의 입술이었다. 향기로운 내음이 입과 코로 스며들어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느닷없는 입맞춤에 놀라 얼어붙어 있는 사이 시간이 지났는지 타이머가 울렸다.
“내가 이겼네?”
입술을 뗀 한세연이 내 눈을 마주 보며 달콤히 승리를 속삭인다.
“······.”
이건 반칙이라고 말할 법도 했지만 내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멍하니 미소짓는 한세연을, 지저귀는 붉은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지만 녹아내린 귓가로는 더 이상 언어가 들려오지 않았다.
유혹하듯 움직이는 붉은 입술이 신경 쓰인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입술을 막아버렸다.
“!”
말을 하다가 덮쳐진 한세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이내 곱게 휘어진다.
울다 지친 스마트폰이 울음을 그치고, 구름에 가리어진 태양이 교실을 다시 비춰올 때까지 우리의 입맞춤은 계속되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달콤한 입맞춤을 끝낸 내가 한세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지금 한 거.”
···뭐? 어이가 없어진 나는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얘는 문제를 풀기도 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간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기고 시작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기야, 한세연은 자신이 이기는 게임밖에 하지를 않는 아이였으니.
말도 안 되는 폭거였으나 신기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발칙한 행동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미친 듯이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에 신기해하면서도 나는 다시 한세연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
자율학습이 끝나가는 오후의 아카데미.
“···아으, 다 젖어버렸네.”
한바탕 축구를 끝낸 은가예는 땀으로 축축해진 체육복을 갈아입으러 교실로 들어섰다.
드르륵─
그리고 교실 문을 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조그맣게 열린 문틈. 그 사이로 비친 교실의 정경에 은가예의 눈이 커졌다.
노을이 비쳐오는 텅 빈 교실. 그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얼이 나간 은가예가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긴 입맞춤을 끝낸 두 사람이 떨어진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가예가 얼른 교실 문 뒤로 숨는다.
놀란 가슴을 달래고 있자니 교실의 뒷문이 열리며 이해솔이 나간다.
그에 맞추어 앞문을 열고 은가예가 교실로 들어서니, 프린트물을 정리하던 한세연이 그녀를 맞이한다.
“가예 왔어?”
“···어, 응.”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은가예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그런데 방금 이해솔 나가던데, 둘이 여기서 뭐 했어?”
은가예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 한세연이 당황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한세연은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다.
“응? 키스.”
“어, 키, 키스, ···뭐?”
오히려 그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은가예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키스했어. 왜?”
“···아니야.”
왜 물어보냐는 듯 갸웃거리는 한세연의 반응에 은가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는 교무실 좀 다녀올게.”
프린트물을 정리한 한세연이 교실을 나서자홀로 남게 된 은가예는 잠시간 그 상태로 서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참았던 숨을 내쉬듯 입을 벌렸다.
“······와.”
너무 대담해서 차마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진짜 뭐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은가예는 몸이 축축해져 옴에 뒤늦게 자신이 할 일을 떠올렸다.
“아! 맞다, 교복.”
***
······가을이 끝나가는 어느 쌀쌀한 오후.
초인협회의 회의장에서는 심각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협회장. 노아가 병석에 들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큰일이군. 노아님이 병상에······
─그래서 지금 상세는 어떠신가?
“많이 호전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거 다행이군.
화상으로 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수뇌들은 노아의 상태에 대해 논하며 일희일비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노아가 세계의 균열을 막는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 노아가 쓰러진다면 그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 사이에서도 온도차는 극명하게 갈렸다.
─이터니티는 강하네. 설령 균열이 열리더라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범위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균열에서 나올 우르크의 잔재가 어떤 놈들일 줄 알고!
─그래봤자 이지를 잃어버린 놈들이네. 그것들이 마수랑 뭐가 다른가?
─그래서 문제라는 걸 모르는 건가, 지금!
균열이 열린 아카데미에서 가까운 국가의 수뇌는 사태를 심각히 바라보았고, 멀리 있는 나라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회의가 이어지던 도중, 한 사람이 차시우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협회장, 그래서 균열을 막을 방도는 있는가?
요점이 담긴 질의에 수뇌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시우를 향했다.
그러나 기대가 담긴 시선과는 다르게 차시우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현재로서는 노아님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방도가 없다는 이야기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했으나, 협회장의 입을 통해 확답을 들어버리니 그 무게가 더욱 무겁게 와닿은 탓이다.
차시우는 이전까지는 이러한 확답을 피해왔으니까.
그러나 노아의 상세가 좋지 못한 지금에서까지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해가 상당하겠군.
─주둔 초인의 수를 늘리는 방안을······
미온적이던 수뇌들도 그제서야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심각한 반응조차 차시우에게는 답답하게만 여겨졌다.
이들은 단순히 자국에 피해가 오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너무 안일한 사고였으니.
그렇기에 차시우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균열이 열리면 피해는 단순히 국지적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근거는?
“우르크의 존재가 정말 구전대로의 괴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과장된 이야기······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균열의 너머로 추방된 것은 우르크만이 아니다.
우르크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권속들 또한 균열의 너머로 추방되었고, 이터니티에서는 그 우르크의 잔재들을 우려했다.
오랜 세월동안 이지를 잃어버린 녀석들이 마수와 같은 골칫덩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르크의 잔재는 우려하면서도 정작 우르크 본인의 힘은 과장된 것이라 판단했다.
본디 신화란 으레 과대해석되기 마련이고, 현대에 와서 거짓으로 판명난 것이 태반이었으니.
우르크의 존재가 아무리 거대한들, 또 하나의 재앙이 탄생하는 수준이리라.
그 재앙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이긴 했으나, 구전대로의 멸망으로 치닫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런데 차시우는 지금 우르크가 재앙 이상의 존재일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음, 그게 사실이라면 균열이 열리면······
그 말에 답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답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난리가 나버린 회의장. 그제서야 열띈 토론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조차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차시우의 표정은 그리 좋지가 못했다.
과거, 차시우가 아직 햇병아리이던 시절. 그는 직접 우르크의 편린과 조우를 한 적이 있었으니. 바로 영멸의 밤과.
그때 그가 느낀 불길함은 재앙급의 마수에게서조차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그것이 차시우에게 우르크의 존재가 있을 것이린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차시우가 회의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위이잉─
주머니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흘낏 이를 꺼내서 바라본 차시우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마경주]
번호만 교환했을 뿐, 여지껏 연락 한 번 해온 적이 없던 이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에 이를 열어본 차시우의 눈은 이내 놀람으로 부릅 떠졌다.
거기에는 차시우로서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균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한 줄의 글귀가 그동안 차시우가 하던 모든 고민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