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이야기가 끝난 직후, 차시우와 고르고프는 머물다 가라는 사제들의 권유도 고사하고 곧장 사원을 떠났다.
마력의 극에 달한 그들에게는 성력이 거북스레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볼 일이 남아있었기에 사원에 남았다.
마력의 사원에는 독립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이용 가능한 보상이 존재했으니.
나야, 퀘스트를 깨기보단 오히려 역으로 사원을 협박해 이용하고 있었지만······
‘결과만 같으면 그게 그거지.’
마력의 사원에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방대한 보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내게 그 보구가 잠들어 있는 사원의 비고를 개방했다.
사원의 각종 퀘스트를 깨야지만 진입할 수 있는 비고였으나, 균열에 다가서야 할 내 신변의 안전은 그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휘이이잉······
열려진 비고에서 농밀한 마력의 기류가 흘러나온다.
비고의 선반이며 벽에는 역사에 이름을 올린 최상의 보구들이 잠이 든 채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신의 검】 【잔느의 기】 【언약궤】 【솔로몬의 지팡이】 【브륀힐드의 창】······
수많은 보구의 명칭이 상태창을 가득히 채워온다.
무엇 하나 거를 것이 없는, 그 기원을 아는 이라면 눈이 돌아가 넋을 놓아버릴 진귀의 향연.
아이리스가 혹할 수밖에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원하는 보구를 한 가지 대여해드리겠습니다.”
대여 기한은 보구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될 때까지입니다.
말인즉, 내가 죽거나 다치지만 않는다면 평생토록 사용할 수 있는, 영구적인 사용권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쩝.”
나는 선반의 보구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당장이라도 고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아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선택을 받지 못할 걸 염려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온전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보구의 간택은 불필요합니다.”
“아니, 그것 때문은 아니고 다른 걸 좀 부탁하려고.”
보구를 거르면서까지 하려는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했는지 아이리스가 갸웃거린다.
“사원에서 지원이 가능한 거라면 보구를 고르고 나서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보구와 더불어 추가로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아이리스. 그만큼 마력의 사원은 우르크의 소멸에 사활을 걸고 있었고, 그 작전의 핵심인 내 안위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극진한 대우가 고마웠으나 나는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실은 고르고 싶어도 못 골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검이 싫어하거든.”
내가 허리춤을 차마 건들진 못하고,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지이이잉──
그곳에는 불편한 심기를 한껏 드러낸 그람이 스산한 마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어찌나 날이 섰는지 공기가 다 찌릿하다.
선반의 보구들도 그람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는 게 느껴진다.
한편,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아이리스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이내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 검은······”
“아나 보네.”
“‘대보구’군요.”
“맞아.”
내가 왜 보구를 고르지 않는지 이유를 알겠다는 듯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보구가 있다면 다른 보구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으니까.
하물며 그 대보구가 자존심이 드높기까지 하다면 말할 것도 없다.
보구 하나 얻으려다 자칫 대보구를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보구를 택하지 않은 이유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보구 그람이 지닌 힘은, 그 진정한 개방은 고작 대여 따위로 얻은 반쪽짜리 보구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이곳의 보구 전부를 대여한들 그 가치가 그람에 미치지는 못하리라.
그러니, 그람과의 동화율을 높이는 것이야 말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다른 보구에 눈독을 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줄은 몰랐군.>
의외라는 그람의 반응에 내가 당치도 않다는 듯 픽 웃어 보였다.
‘이런 대여품들이랑 그람을 비교할 수는 없죠. 한 수레, 아니. 한 트럭을 가져와도 못 바꿉니다.’
<띄어주려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기분은 좋군.>
‘사실인데요, 뭐. 기분이 좋았다니 다행이네요.’
약간이나마 띄어주려는 의도가 없지 않아 있었기에 찔끔한 내가 둘러대듯 말하자 그람의 음성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대는 참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재주가 있군.>
‘그거라도 재주가 있어야죠.’
후후. 내 대답이 썩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흘리는 그람.
스산했던 마력이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사르르 풀어진다.
‘휴우.’
이쪽은 어찌 잘 넘긴 것 같고······
급한 불을 해결한 내가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신의 가호란 걸 좀 받고 싶은데.”
“가호를 말인가요?”
“어. 그거.”
잘못 들었나 눈을 깜빡이는 아이리스에게 내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아이리스의 표정이 놀람으로 물든다.
“그동안 제가 봐온 당신은 여신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정확히 봤네.”
내 긍정에 아이리스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내게도 다 이유란 게 있었다.
내가 강해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도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람과의 동화율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애초에 그람과의 동화율을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아멜리아의 힘을 빌릴 때 사용했던 영혼의 동조.
내 영혼을 무방비로 개방해 그람을 받아들인다면, 동화율을 극단적으로 올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말 그대로 그람을 내게 빙의시키는 행위였으니.
다만 여기에는 커다란 제약이 따랐다. 아무런 대가 없이 멋대로 빙의를 자행했다간 세계의 억지력이 작용해버리는 것이다.
그람과 나의 관계는 내가 일방적으로 힘을 받아가는 식이었으니.
일전에 지룡 키아브리스의 피처럼, 그람에게 대가를 바친다면 억지력을 피해 갈 수 있기야 하겠으나 용의 피가 어디 흔한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여기에도 꼼수란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여신의 가호’였다.
뭣도 아니던 수호자들이 단순히 수호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조리한 힘을 휘둘렀던 것처럼, 가호를 받은 이 또한 억지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만큼 대가가 따르기야 하겠지만······
‘아예 못하는 것보다야 낫지.’
내가 지닌 정신력이라면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으리라.
“가호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아이리스, 아니. 그 너머에서 이쪽을 내다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솔직히 물으면서도 내심 쫄렸다.
내가 마력의 돌에 저질러놓은 짓을 생각하자면 가호를 달라는 내 요구는 내가 봐도 뻔뻔함의 도를 넘어서 있었으니.
그래도 여신은 여신이라는 걸까.
“비고의 보구 대신에 받는 대가라면 차고 넘칩니다.”
“시원해서 좋네.”
돌아오는 즉답에 내가 씨익 웃어 보였다.
***
······포장이 되지 않은 거친 흙바닥. 전봇대가 길게 늘어선 한옥의 거리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 사이로 간간이 사람을 실은 인력거가 내달린다.
빙수상점의 플랜카드, 방앗간의 구수한 냄새. 현대와는 동떨어졌으나 유진에게는 익숙한 거리. 그리우나 그립지 않은 시절.
일제, 경성의 모습이었다.
─나니 봇토 시텐노, 하야쿠 하시레!
유진은 그곳에서 가난한 인력거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인력거꾼으로 자라났다.
착취와 떼임은 일상이었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던 나날.
그렇게 의미 없는 일상을 보내오던 어느 날 자신에게 들이닥친 마수.
─크르르······
값을 치르지 않은 손님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부숴진 인력거와 함께 나뒹군 몸이 떨려온다.
담담할 줄 알았건만, 죽음을 앞에 둔 그는 겁에 질려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으로 부질없는 인생이구나.】
머릿속에 울려 퍼진 그 목소리를 기점으로 유진의 생은 크게 바뀌었다.
살아간다는 의미를 깨우쳤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세상에 숨겨진 수많은 진실들을 알게 되었다.
한낮 인력거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짐. 그렇기에 유진은 인력거꾼으로도, 초인으로도 남지 못했다.
쏴아아아······
귓가를 시끄러이 울리는 소리에 유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창밖으로 비가 사납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우르크와 조우했던 그날의 꿈을 꾸게 된 유진이 중얼거렸다.
과거에는 매일같이 꿨으나, 긴 잠에서 깨어난 뒤로는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던 꿈.
그 꿈이 오늘따라 유독 선연했다···.
이제는 흐릿한 기억의 편린으로만 남아버린 우르크와의 대화마저도.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엔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님. 깨어나셨나요?
“깨어났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짐작가는 바가 없던 유진이 갸웃거렸다.
─마경의 주인입니다.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된 유진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떠오르는 신성인 마경의 주인.
그는 유진을 따르는 단체인 흑해와 사이가 좋지 못한 관계였다.
한가장에 뿌리내렸던 흑해를 몰아내고 세간에 그 존재를 알린 것 또한 그였으니.
하물며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왔다는 것도 신기했다.
행적을 숨긴 적은 없으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자 또한 극소수였으니까. 접점이 없는 마경주는 당연히 이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엔마가 ‘손님’이라 칭한다는 것은······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구나.”
달칵─
찰나, 방문이 열리며 서늘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그리 말하는 남자, 마경주를 유진은 이채가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우린 구면이군.”
“어떻게 알았지? 이 얼굴로는 처음일 텐데.”
“영혼마저 바꿀 수는 없다네.”
“역시, 영혼이 보이나 보네.”
혀를 찬 마경주의 얼굴이 찰흙처럼 뭉개지더니, 낯익은 외양으로 바뀐다.
이터니티의 필드, 그 최심부에서 보았던, 자신을 방해했던 생도의 모습으로.
“그래서 나를 찾아온 용건은 무엇인가?”
유진은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마경주, 이해솔을 바라보았다.
이 당돌한 생도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에 질린 모습이 없었으니.
하지만 이어진 말에, 유진의 호기심은 놀람으로 바뀌었다.
“이거 찾고 있지 않아?”
이해솔의 손끝의 공간이 꿀렁이더니, 휘어지며 어두운 암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유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균열을 개방할 수 있는 기프트였다.
“그걸 알면서도 나를 찾아왔다는 건가?”
“어. 내가 죽으면 이 기프트도 사라질 텐데 설마 공격이라도 하게?”
“······.”
배짱을 부리며 의자에 앉아버리는 이해솔을, 유진은 드물게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유진을 바라보며 이해솔이 가벼이 입을 열었다.
“균열, 그거 열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