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균열, 그거 열어줄게.”
가볍게 지나가듯 나온 말. 그러나 절대 가볍게 들을 수 없는 그 말에 유진의 표정이 놀람이 번진다.
그러곤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이해솔을 바라보았다.
균열을 개방한다는 것은 이터니티의 붕괴를 의미했으니까. 이해솔도 그것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뭔가?”
“도와? 내가 그쪽을?”
이해솔이 코웃음을 쳤다.
“도와주는 게 아니야. 끝내려는 거지.”
“······.”
“우르크라는 놈을 내버려 두면 그쪽이 아니라도 나중에 균열을 열려는 놈이 나올 테니까.”
“그래서 균열을 열겠다는 건가?”
“어, 없애려면 일단 끄집어내야지.”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그 말에 유진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우르크를 없애겠다니. 농담으로도 생각지 못한 발상이었으니까.
그러나 말을 꺼낸 이해솔은 농담 같지가 않아 보였다.
“자신이 넘치는군.”
“자신 있으니까.”
결국 유진이 피식 웃었다. 근거 모를 저 당당함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그 대신 그쪽이 좀 도와줘야 할 거야. 균열에 다가가려면 거쳐야 할 것들이 많거든.”
“그야 얼마든지 도와주겠네.”
유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목적은 다르나 한배를 타는 기묘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
······영멸의 밤, 유진에게서 협력을 받아낸 나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쏴아아······
여전히 쏟아지는 장대비. 물에 잠긴 세상이 나를 반긴다.
“쓰시죠.”
“고마워요.”
소피아가 펼쳐 든 우산 아래로 들어간 나는 그녀와 나란히 빗속을 거닐었다.
투둑, 툭─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마음을 아늑하게 적신다.
문득,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그 남자가 약속을 지킬지 의문입니다.”
돌아본 소피아의 표정은 살짝 굳어져 있었다.
‘하긴.’
소피아는 이터니티 필드의 최심부에서 유진과 사투를 벌였었으니······.
만일 그때 한세연이 제때 녀석의 결계를 깨주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노아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모두 유진에게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물며 생도들을 제물로 삼으려던 위험인물이 바로 유진이었기에, 그와 손을 잡은 내 결정이 소피아는 탐탁지가 않은 듯했다.
“해솔님께 무슨 해를 끼칠지 모르는 남자입니다. 균열을 개방하고 나면 공격을 가해 올 가능성도······”
소피아는 유진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미소가 지어졌다.
“저번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위험-”
“소피아가 지켜주면 되잖아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말을 자르고 나온 내 대답에 소피아의 볼이 작게 부푼다.
문득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해솔님, 듣고 계시는 겁니까?”
“미안해요, 잘 듣고 있어요.”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흘리자 소피아의 볼이 더욱 부푼다.
자신의 말을 가볍게 듣는다 여기는지 조금 삐진 기색이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알아요. 소피아가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는 거.”
“그런데 왜······”
소피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물론 나도 소피아가 하는 걱정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유진이 돌발적인 행동을 할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보았으니까.
그리고···
“걱정 마요, 그는 나를 절대 공격하지 못하니까.”
내 단정적인 대답에 의아해하는 소피아에게 나는 유진이 나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균열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요.”
“아···!”
내 말을 이해한 소피아의 눈이 커진다.
나는 균열을 비틀어 오직 나만이 오갈 수 있는 통로를 개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균열의 안에서 우르크의 힘을 가져와야 하는 유진으로서는 나한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혹시 모를 때는 부탁할게요.”
“예, 그때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든든하네요.”
비에 잠긴 거리. 우산의 아래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어 보였다.
***
가을이 끝나가는 어느 주말의 오전.
사각사각······
한세연의 샤프가 문제지 위를 움직인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었다.
내 문제지를 채점하며 틀린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한 풀이를 달아주는 것이었다.
“······음.”
제대로 풀었다고 여겼건만 생각보다 틀린 것이 많아 보였다. 매번 느끼지만 마력이론학은 무진장 까다롭다.
그건 그렇고.
‘콩깍지가 씌었나.’
풀이를 하는 한세연의 모습이 너무도 이뻐 보여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머리 올렸네?”
“응. 걸려서 올려봤어. 이상해?”
“아니, 잘 어울린다고.”
드러난 흰 목선이 매력적이었다. 기다리기가 힘겨워질 만큼.
“채점은 다 끝났어?”
“응, 지금 끝났어.”
“그래?”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펜을 내려놓는 한세연의 입술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느닷없는 입맞춤에 한세연은 내가 왜 이러나 의아해하면서도 마주 입술을 포개왔다.
이윽고 코를 맞댄 한세연이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밥 먹을까?”
“조금만 있다가.”
그리 말한 나는 다시금 보드라운 입술을 덮쳤다.
***
······입맞춤의 뒤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한껏 들이켜니 산뜻한 벚꽃의 향이 폐부를 가득 적셔온다.
그저 기대있기만 해도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해진다.
그 체향에 취해있기도 잠시, 테이블에 놓인 시험지를 보니 현실이 자각된다.
“망했네.”
마력이론 52점.
반타작을 간신히 넘긴 점수이긴 하나, 이터니티로 치면 낙제점이다.
상대평가인 이터니티에서 60점 이하를 맞는 생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시간도 남았으니 잘 될 거야.”
“······.”
한세연이 생긋 웃으며 위로를 해주었으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당장 다음 주부터가 시험기간이었으니까.
머리가 비상한 한세연에게는 충분한 시간일지 모르나 일반인인 나에게는 벼락치기도 빠듯한 시간인 것이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고. 사실 이게 가장 문제였지만.
─으악!
그때 주방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울리더니, 타는 냄새가 거실까지 흘러나온다.
나는 그 탄내만으로도 주범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소피아네.”
소피아는 요리를 못하면서도 꾸준히 도전을 해오고 있었다. 냄새로 보아 오늘도 실패한 것 같았지만.
내가 뺨을 긁적이니 한세연이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와주고 올게.”
“다녀와.”
일단 밥이나 먹어야겠다.
***
······점심은 소피아가 만든 돈까스였다.
일전에 내가 돈까스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두었다가 만든 모양이다.
불을 너무 세게 한 나머지 처음 것은 태워 먹었고, 한세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완성해온 것이었다.
직접 해준 요리라 그런가. 맛은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주방을 난장판으로 해 놓았다는 점이 문제이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소피아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주방 청소로 허둥지둥 바빠졌다.
언제 한 번 저 난장판을 이본느에게 들켰다가 하루종일 설교를 들어야 했으니.
“졸려?”
“···응.”
한편, 거실의 소파. 내 어깨를 베개마냥 기댄 한세연은 잠이 솔솔 쏟아지는지 서서히 눈이 감기고 있다.
성력의 후유증 탓인지, 아니면 모르도 때문인지 최근들어 낮잠이 잦아진 한세연이었다.
그렇게 내 어깨에 파고든 한세연이 잠에 들고 얼마 후. 문득 밖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의 요동이 느껴져 왔다.
아멜리아와의 정신동조를 자주 한 탓인지 나는 비정상적인 마력의 흐름이 발생하면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읽어 들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의아해진 나는 한세연을 조심스레 소파에 눕혀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어찌 된 일인지를 확인니, 어이가 없어졌다.
“···쟤 뭐하는 거야?”
“으아아······”
마경의 호숫가. 아멜리아가 양손에 마력을 응집한 채 어쩔 바를 몰라하고 있다.
정신을 반쯤 놓아버렸는지 눈이 팽팽 돈다.
─고오오······
불안정한 마력의 흐름에 대류가 요동치고 수면이 들끓는다.
이를 지켜보는 리디아와 니엘, 은가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손을 놓고만 있는 상황.
“저것 좀 어떻게 해봐!”
나를 발견한 은가예가 소리친다.
“어떻게 된 건데?”
“나도 몰라, 나오니까 갑자기 저 상태야.”
“······음.”
나는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복부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척 봐도 복부의 술식을 개방한 채로 제어가 되지 않고 있는 상태.
“야단났네.”
손아귀의 마력이 장난이 아니다. 저게 발출됐다간 호수고 뭐고 그대로 날아가겠다. 머리를 긁적인 나는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아멜리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우웅우웅.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위태로이 흔들리는 마력. 아멜리아는 당황한 듯했으나, 다행히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면 쉽지.”
저번에 써먹었던 방식을 쓰는 수밖에.
“아멜리아!”
“예? 뭐, 뭐에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착실히 대답을 해주는 아멜리아.
역시 천성이 예의바라서 그런지 남의 말을 무시할 줄을 모른다.
“위에 빵.”
“위, 위요?!”
내가 위를 가리키니 아멜리아가 하늘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뻐억──!
치켜 든 아멜리아의 고개가 뒤로 홱 꺾인다.
의식을 잃은 아멜리아가 뒤로 넘어가 버렸다. 손에 어렸던 마력은 씻은 듯이 날아간 뒤였다.
번개처럼 날아간 그람의 단검이 고개를 든 아멜리아의 턱을 후려쳐버린 것이다.
“······뭐야?”
설마 기절을 시켜버릴 줄은 몰랐는지, 은가예를 비롯한 이들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쓰러진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으이구, 많이도 망가졌네.”
아멜리아의 복부에 새겨진 술식의 회로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본 내가 혀를 찼다.
“그러게 제대로 좀 쓰라니까.”
술식을 무리하게 제어하려다 이 사단이 나 버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내저은 나는 아멜리아의 술식에 의념으로 룬어를 새기며 정비를 했다.
“아으으···”
달아올랐던 술식이 가라앉으며 기절했던 아멜리아가 눈을 뜬다.
“급할 거 없으니까 똑바로 좀 다뤄라.”
턱을 매만지는 아멜리아의 복부를 툭 치며 말했다.
“······우,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려다 턱이 아픈지 눈을 찌푸리는 아멜리아.
얘가 왜 이리 무리를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나겔링을 얻은 은가예며, 깨달음을 얻은 천우진 등, 다들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데 본인만 제자리걸음이니 조바심이 났겠지. 그래서 무리하게 방어기제를 건드린 것이리라.
“넌 천천히 가도 돼.”
“······.”
내 말이 의외였는지 아멜리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는 이를 본채만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주방의 정리가 끝났는지 소피아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딘가 외출이라도 하듯, 겉옷에 무장까지 갖춰 입은 채였다.
“가죠.”
소피아에게 다가간 내가 말하자 소피아가 조심스레 물어온다.
“이야기하지 않고 가도 되겠습니까?”
“금방 끝날 건데요, 뭐.”
소피아의 시선이 거실로 향해 있는 것을 본 내가 말했다.
“소피아만으로 충분하고요.”
나는 균열을 열러 갈 작정이었다. 유진과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으니.
그리고 거기에 한세연이나 다른 이들은 대동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오로지 나 혼자 끝낼 계획이었으니까.
그렇게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하게도 소피아가 따라오는 기색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린 나는 그대로 어색하게 굳어졌다.
“어디를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