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224화
휘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황량한 밤의 사막.
“······.”
유진은 사막 너머의 공동에서 펼쳐지는 격전을 지켜보았다.
마력포에 터지고 검과 마법에 찢겨나가는 아귀들을.
그의 마력이 깃든 공간이 무너지고, 아귀들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투둑, 툭.
문득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져 유진의 머리를 적셔왔다.
쏴아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거센 빗발이 되어 사막에 쏟아져 내린다.
엔마는 말없이 마력을 일으켜 유진에게 닿는 비를 차단했다.
“왜 지켜만 보는지 묻지 않는구나.”
“유진님의 뜻에 전 그저 따를 뿐입니다.”
엔마의 맹목적인 대답에 쓰게 웃은 유진이 아귀에 맞서는 초인들을 지켜본다.
유진의 눈에 비친 그들은 눈이 부셨다. 일상을 지키고, 또 이어가려는 모습이. 그 또한 시작은 저들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러기에는 이 세상이, 이터니티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유진은 알고 있었다.
아니, 어긋낫던 적은 없다. 이터니티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렇기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마수가 없고, 재앙이 존재하지 않으며, 마기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럴 수 있는 힘이 지금의 유진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으나······”
유진의 시선이 공동의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곳에는 초인들을 지휘하며 무수한 단검으로 아귀들을 척살하는 이해솔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의문이었다. 이해솔이 어찌 자신의 계획을 그리 잘 알고 있는지. 어째서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가.
하지만 그 정체를 알고 나면 당연한 태도일 지도 몰랐다.
“설마 이방인일 줄이야.”
그는 여신이 데려온 세상 밖의 인간이었으니.
이해솔에게 남은 여신의 흔적이, 그 잔향이 지금의 유진에게는 보여왔다.
그런데 왜일까. 이 속에서 들끓듯 솟아오르는 원인 모를 분노는. 이해솔을 향한 적개심은.
─조심해, 잡아먹힐지도 모르니까.
문득 우르크의 마력을 넘겨주기 전에 이해솔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건가.”
녀석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이 우르크에게 삼켜져 스스로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훗.”
“유진님?”
느닷없는 유진의 실소에 엔마가 의아해할 때였다.
“아무래도 내가 당한 모양이구나.”
“예? 그러면 빨리 조치를······”
“아니.”
손을 들어 엔마를 막은 유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늦었구나.”
우르크의 망령이 자신의 정신을 침식해옴을. 의식이 갉아 먹히고 있음을 유진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괴욕만이 남은 망령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이터니티가 파괴되는 것을 유진은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자멸을 택할 테지.
“이게 당신의 수인가?”
빗발이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암운 너머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유진이 물었다.
“여신.”
쏴아아······
마치 물음에 화답하듯 더욱 거세게 쏟아져내리는 빗발. 이를 바라보는 유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그것은 자조도, 달관도 아닌, 이상에 다가선 이의 웃음이었다.
당했다는 것이 꼭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콰르릉──────!
순간, 거대한 굉음이 사막을 떨어 울렸다.
거짓말처럼 그치는 비. 먹구름이 갈라지며 신비로운 오로라가 커튼처럼 사막에 드리운다.
그 오로라를 따라 푸른 마력의 조각들이 별무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마력의 조각이란 바로, 이터니티의 ‘단면’이었다.
파아아아아······
흩날리는 마력의 조각이 갈수록 많아지고, 사막에 드리운 오로라의 광휘는 커져만 간다.
그것은 파괴이며 또한, 새로운 개벽이었다.
유진은 자멸을 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마력을 바쳐 이터니티를 재구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터니티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에도여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나지 못했다. 그토록 거대한 존재가 내려온다면 이터니티는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어버릴 테니.
“거기서 지켜보게.”
암운이 사라진 몽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유진이 미소 지었다.
***
─그어어어······
지하공동을 가득 메운 아귀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든다.
그러나 밀려드는 것만큼이나 허물어져 내리는 속도 또한 빨랐다.
콰아아아앙──
마력포가 공간을 가르고 이본느의 불길이 아귀들을 불태운다.
“하앗!”
은가예의 검이 휘둘러지자 중력의 마력이 일어나며 아귀의 일각이 와르르 무너진다.
“`!”
짓눌려 꿈틀거리는 아귀들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은가예.
달려나간 은가장의 무사들이 쓰러진 아귀들을 정리한다.
그밖에 여명의 수호자, 별의 성좌, 백야······
각 길드의 초인들은 각자의 방면에서 밀려드는 아귀들을 처리했다.
“빨리빨리 잡으세요! 아카데미가 길드에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조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쉴 틈 없이 마법을 쏘아대는 김주혁 교수와 아카데미의 교수진.
춤을 추듯 휘둘리는 서하린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백염, 은호성의 해일을 담은 검강 등······
이터니티의 내로라하는 초인들이 선보이는 절기에 아귀들이 속절없이 쓸려나간다.
“역시 일손이 많으니까 편하네.”
이를 구경하며 감탄을 하고 있자니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예요?”
“다 끝날 때까지.”
“아우, 내가 괜히 말했지······”
아멜리아는 현재 아귀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바삐 시선을 옮겨가며 고개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의 이동에 따라 그람의 단검이 날아다니며 아귀들을 도륙한다.
마력이 뭉쳐진 아귀의 급소를 아멜리아가 보면 이를 시야를 공유받은 단검이 꿰뚫고 있던 것이다.
내가 아멜리아와 시야를 공유하면 그람에게도 그것이 전달되었으니.
우르크의 마력으로 변화한 아귀의 급소를 아멜리아가 볼 수 있다기에 취한 조치였다.
그러한 아멜리아의 노고 덕에 그람은 엄청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람의 서포트를 받으며 아귀들을 베어나가는 생도 한 명이 눈에 띈다.
생도의 검에 베인 아귀는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져나갔다.
“천우진이군요.”
내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소피아가 생도의 이름을 말한다.
“쓸만해졌죠?”
“예, 확실히······”
거침없이 아귀들을 베어나가는 천우진을 바라보며 소피아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무서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어느 정도죠?”
“누가 상대더라도 쉽게 꺾기는 어려울 겁니다.”
“소피아는요?”
“물론 저한테는 안 됩니다.”
자신감에 찬 소피아의 단언에 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역시 든든하단 말이지.
하기야, 천우진이 아무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곤 해도 소피아와의 실력차는 확연하다.
하물며 소피아 역시 놀고만 있던 게 아니다.
소피아의 수련량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었으니까.
아무튼, 천우진에 대한 소피아의 평가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진과 검을 맞대본 적이 있는 그녀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데려가도 되겠네요.”
“예? 데려가다니, 어딜······”
소피아가 의아해할 때였다.
키이이잉──
날카로운 기음과 함께 내 앞의 풍경이 갈라지며 아공이 입을 벌린다.
“뭐예요? 단검들이······!”
돌연 단검들이 내게로 회수되자 나를 돌아봤던 아멜리아가 내 앞에 열린 아공을 보곤 놀란 표정을 짓는다.
“너도 따라와.”
“예?”
눈을 깜빡이는 아멜리아와 저 멀리서 나를 돌아보는 천우진. 내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한세연과 소피아.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끝을 보러 가야지.”
그렇게 내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돌연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이 지하공동이 뒤흔들었다.
거기에 내포된 가공할 마력의 파동에 초인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유독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멜리아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우욱······”
허리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하는 아멜리아의 등에 내가 기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괜찮냐?”
“이, 이게 무슨······”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멜리아가 균열의 문을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눈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작했네.”
“뭐가 시작했다는 거죠?”
“이터니티의 붕괴.”
“!”
그 말에는 아멜리아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막으러 가야지.”
열려진 아공을 가리키며 당당히 하는 내 말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이나 내 발언의 스케일은 방대해도 너무 방대했으니.
그때, 어느새 다가온 천우진이 나를 응시하며 물어왔다.
“해솔아.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을 위해 물어볼게.”
“뭔데?”
“막을 수 있어?”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같은 의문을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막을 수 없으면 시작도 안 했어.”
내 대답에 천우진은 마주 웃어 보였다.
“좋아, 그럼 가자.”
그러곤 아공을 향해 몸을 돌린다.
“······에?”
천우진의 행동력에 아멜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협회장님은 아귀를 맡아주십시오.”
“알겠네, 빨리 처리하고 합류하지.”
“은가주님, 가예좀 빌려가겠습니다.”
“허허, 도움이 되면 얼마든지 빌려가게.”
자신을 제외하고 진행되는 이야기에 아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모두가 별다른 의문도 표하지 않은 채 이해솔의 말을 따르고 있던 것이다.
“잠깐만요, 이렇게 간단히 받아들여도 되는 이야기인가요?”
“아가씨가 이해하게. 지금이 찬밥 더운밥 가
리고 있을 상황은 아니잖나?”
“그렇기는 한데······”
“지금도 늦었을지 모르지.”
균열의 문을 바라보는 차시우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도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여유가 넘쳐 보이던 이 협회장조차긴장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이해솔의 말에 군말없이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가공할 마력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질 테니.
대체 무슨 근거로 이해솔이 저리 당당한지는 의문이었지만.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를 제외한 일행이 하나, 둘 아공의 너머로 사라졌다.
“아, 몰라.”
귀를 삐죽이며 망설이던 아멜리아는 아공이 줄어들자, 고개를 홱 젖곤 뛰어갔다.
“같이 가요!”
***
신비로운 오로라가 커튼처럼 드리운 밤의 사막.
마력의 조각들이 별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 공간은 실로 몽환적이었다.
하지만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초인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이터니티가···”
사막에 드리운 오로라는 세상의 번짐이요,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조각은 세계의 파편이었으니. 즉,
“···붕괴되고 있어.”
세상의 종말이었다.
콰과과과과광──
찰나, 떨어져 내리던 마력의 조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갔다.
“어?!”
놀란 은가예가 눈을 크게 뜨고, 아멜리아가 나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친다.
“무슨 짓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의 조각들을 부순 것은 바로 나였다.
무수히 늘어난 그람의 단검이 마력의 조각들을 부숴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부수어진 마력의 조각이 복구되기 위해서는 기나긴 세월이 필요하다.
그동안 조각이 빠져나간 부위는 세계의 구멍, 즉 결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떨어지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아.”
“네?”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문을 표하던 일행이 내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부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어요.”
세계에서 떨어져나온 마력의 조각들이 사막의 언덕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언덕의 위에는 홀로 붕괴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기른 남성.
영멸의 밤, 유진이었다.
세계에서 떨어져나온 마력의 조각들은 그에게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무 빨라.’
마력의 조각들이 떨어져나오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족히 3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만큼 이터니티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벼랑을 향해 질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걸렸군.
‘그런 것 같네요.’
그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의 정신이 우르크에게 침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세계를 붕괴시키는 것은 유진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속도라면 더더욱.
모르긴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유진에게는 어마어마한 부담이 가해지고 있으리라.
‘문제는 역시 너무 빠르다는 거지.’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조각들을 바라보는 내 미간이 좁아진다.
유진이 부담을 진만큼 그것은 나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마력의 조각들이 유진에게 가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 내 발이 묶여버렸으니······.
‘하는 수 없나.’
상정 외의 상황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결국 손을 앞으로 뻗었다.
유진이 저렇게 나온 이상 나 또한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힘을 빼는 건 내키지 않지만.’
키이이잉──
오로라가 펼쳐진 사막의 밤하늘에 누군가가 그어놓은 듯한 기다란 빗금이 생겨난다.
이윽고 하늘을 갈라놓은 그것이 눈을 뜨듯 벌어지며 시꺼먼 동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콰과과과과광──!
돌연, 떨어져 내리던 마력의 조각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람이 한 일이 아니었다. 내 시선이 요란한 총성이 울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타다다다당─!
한세연의 양손에 쥐여진 베레타가 불을 뿜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다.
“저기에요!”
아멜리아가 이어질 붕괴의 지점을 가리키자 은가예의 중력이 떨어져 내리는 마력의 조각들을 정체시킨다. 이어서 소피아의 강기가 정체된 조각들을 박살낸다.
마기를 내뿜는 흑요, 공간을 이지러트리는 요호, 빛을 쏘아내는 아나스타샤까지.
어느새 나온 파랑이마저 합류하며 사막의 밤하늘이 푸른 마력의 가루에 휩싸인다.
“음.”
나는 이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일행에게는 이것 외에 따로 해줘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상황은 내가 예상하지 않은 전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다녀와.”
마치 내 고민을 다 안다는 듯이 다녀오라 말하는 한세연.
“괜찮겠어?”
그녀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작게 웃어 보였다.
“알았다. 기다리고 있어.”
“응.”
“조심하고.”
나는 몸을 돌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 빨리 끝내버리는 게 모두에게 좋았으니까.
“길을 열어줄게.”
“부탁한다.”
내 대답에 싱긋 웃은 천우진이 허공을 향해 검을 긋는다.
순간,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나는 유진과 나 사이에 있던 벽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간다. 아까 말한 거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세연이는 내가 반드시 지킬게.”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농담조로 대답하는 천우진.
“어, 부탁한다.”
피식 웃어 보인 내가 손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풍경이 갈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아공. 그 안으로 내가 걸음을 옮겼다.
***
······아공을 넘어서자 멀리서 올려다보았던 몽환의 오로라가 눈앞에 물결쳤다.
광활한 밤의 사막이 발아래로 아스라이 펼쳐진다.
“아름답지 않은가?”
순간, 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부서져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흘낏, 구멍 난 하늘을 올려다본 내가 입을 열었다.
“복구하려면 100년은 걸리겠네.”
“하핫.”
내 대답이 웃기기라도 했는지 유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뭐가 웃긴데?”
인상을 찌푸리자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감상이라기엔 너무 삭막한 대답이라 웃었네.”
“사실인데 뭘.”
실제로 저러한 거대한 결함이 메꿔지기 위해서는 못해도 100년은 걸릴 터였다.
“110년.”
“?”
“110년 걸리네.”
유진이 나를 돌아보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주변의 풍경이 변화했다.
오로라가 드리웠던 어두운 하늘은 맑은 구름이 떠다니는 따스한 햇살로.
모래뿐이 없던 황량한 사막은 푸르른 산과 들로 바뀌었다.
“이건?”
“내 과거의 기억이네.”
유진이 어딘가를 바라본다. 산야의 언덕을 따라 지어진 마을로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런 근심도 없는 평화로운 광경. 하지만 그 평화는 돌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무언가로 인해 깨져나갔다.
“······붕괴.”
“이 세상은 불완전하지. 붕괴가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네.”
마치 눈발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에 무심코 세계의 조각을 만진 사람들이 노면으로 쓰러진다.
과도한 마력을 내포한 세계의 조각은 생명체에게 극독이나 다름없었으니.
─꺄아아악!
평화로웠던 산야의 마을은 한순간에 죽음의 비가 내리는 지옥이 되어버렸다.
이는 유진이 비추는 과거.
그가 겪은 붕괴의 기록이다.
“붕괴가 일어난 지역은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지.”
유진의 말대로 산야의 대기에는 한 줌의 마력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지면이 쩍쩍 갈라지고, 나무와 들판이 누렇게 바랜다.
“하지만 붕괴가 위험한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네.”
“세계의 조각.”
유진이 정답이라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네. 떨어져 나온 세계의 조각은 추산하기 어려운 마력을 지녔지. 만약 그것이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퍼어어어어엉─!
돌연, 산야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며 푸른 마력의 덩어리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떨어져나온 세계의 조각이 일으킨 마력재해. 즉,
“재앙이네.”
─끄아아아아!
산야에 기거하던 사람들이 터지고, 부서져 나간다.
인간의 마력을 흡수해 덩치를 키우는 기괴한 덩어리들.
녀석들은 내가 이터니티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것하고도 달랐다.
불길하고 꺼림칙했으며 살아있는 것이라고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녀석들은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억지력. 그것이 떨어져나와 개별화를 이룬 것이 바로 녀석들의 정체였으니까.
세계의 오류.
이른바 ‘디아’였다.
스스스스스──
지옥으로 변한 마을의 풍경이 녹아내리며 밤의 사막이 들어찬다.
거기에는 조금 전 보았던 괴물들이 모래 무더기를 뚫고 일어나고 있었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마력의 덩어리.
‘디아’였다.
녀석들은 세계의 조각을 부수고 있는 일행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벌어지는 일행과 디아의 교전.
“안 도와줘도 되겠나?”
“뭐 하러?”
내 반문에 질문을 했던 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가 보기에 일행은 당장 밀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도 그럴 게 일행의 공격은 디아에게 전혀 먹히지가 않고 있던 것이다.
실체가 있는 듯하나, 실체가 없기에 상대할 수 없는 존재.
‘재앙’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가 바로 디아였다.
유진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의 괴멸을 지켜본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일행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도와주지도 못하잖아?”
“눈치가 빠르군.”
“대놓고 가둬놓고 눈치는 무슨.”
내가 코웃음을 치자 유진이 예의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균열을 조율할 수 있는 그대가 위험에 처하게 둘 수는 없네.”
현재 나와 사막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결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은 나를 가두어두고 있는 그 결계가 지금 나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즉.
“내가 나가면 죽을 거라는 이야기 같네?”
“맞네.”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결계의 바깥을 가리켰다.
오로라가 펼쳐진 하늘에선 여전히 세계의 조각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며 사막에는 디아들이 배회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것들 왜 저래?’
꾸물거리며 결계의 주변을 맴도는 디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내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저 디아들의 표적은 그대네.”
“나라고?”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는 섭리에서 파생된 녀석들이네. 당연히 섭리의 습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그런 녀석들에게 이방인이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나?”
“···죽이겠지.”
내 인상이 구겨졌다.
섭리에서 파생된 녀석들에게 이터니티의 존재가 아닌 나는 배척해야 될 불순물로 여겨질 게 뻔했던 것이다.
여신의 통제를 벗어난 녀석들이 나를 특별취급해 줄 리도 없었고.
“쯧.”
어느새 결계의 주위로 몰려든 디아들을 본 내가 혀를 찼다.
“떨어져나온 것들이 어설프게 섭리흉내네.”
이렇게 되면 일행에게 디아를 맡기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고 봐야했다.
붕괴의 중심인 이 주변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사지(死地)였으니······.
콰츠즈즈즛──!
떨어져 내리는 세계의 조각들이 붉은 스파크를 튀기며 갈려 나간다.
휘몰아치는 마력풍에 디아들의 형체가 소멸되고 수복되기를 반복했다.
이곳에 펼쳐진 오로라가 주변의 모든 마력이 깃든 것들을 파괴해버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디아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저것들을 이곳에서 끌고 나가야만 했다.
‘떨어져나온 것들이 하나만 할 것이지.’
귀찮게 꼬여버린 상황에 투덜거린 내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경고 하나만 하자.”
몸을 푸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유진이 갸웃거렸다.
“경고?”
“내가 뭘 하던 건드리지 마.”
“그건···”
키이이잉──
유진의 말을 자르며 내 손 위로 시꺼먼 균열이 일어났다.
“그쪽도 이게 없어지면 곤란하잖아?”
“충고라기보다는 협박이군.”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나는 디아들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런 내 시야에 나와 디아들을 가로막은 마력의 벽이 훤히 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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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력(S)]
◆ 아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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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 자취를 숨긴다 한들 아멜리아의 눈을 빌린 내 시야에 걸려들지 않을 마력이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마력의 벽은 견고했다. 조금의 틈조차 보이지 않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부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를 확인했음에도 내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갈수록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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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력(S)]
◆ 아멜리아 → 소피아 포코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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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의 대상이 바뀌자 시야에서 벽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와 맞바꾸어 들어 올린 검에 이형을 부수는 분쇄의 기운이 깃들었다.
─재미있는 힘이구나.
이를 다루는 건 대보구의 검령, 그람.
우웅······.
그녀의 의지를 담은 검이 분쇄의 기운을 빌어 현현한다.
검에 맺힌 기운이 뚜렷한 검의 형상을 띄었다. 단순하나 일말의 마력조차 낭비되지 않는 지극의 검.
스악─
그 지극의 검이 그어지며 일순 공간이 잘려 나가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
푸른 조각들이 신기루처럼 비산했다. 휘몰아치는 마력풍에 머리가 흩날린다. 나를 가두어놓았던 마력의 벽이 깨져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맹수를 막아주던 울타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츠즈즈즛─!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소멸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던 디아들이 나를 향해 밀려들었다.
나 또한 녀석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나방 같은 모습이었으나 나는 거침없었다.
“꺼져!”
손을 휘두르자 이카루스의 반지에서 항마력이 일어나며 덤벼드는 디아들을 지워버렸다.
나는 연거푸 항마력을 일으키며 디아의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사막을 내달리며 뒤를 힐끗 돌아본 내가 혀를 내둘렀다.
“겁나게도 많네.”
스아아아아······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내 뒤를 바짝 따라붙는 디아의 무리.
어느새 항마력에 지워졌던 녀석들까지 복구되어가고 있는 모습은 소름마저 끼쳤으나 내 입가에 지어진 것은 여유로운 미소였다.
‘어쨌든 다 따라왔나.’
내가 무슨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한 놈도 빠짐없이 죄다 나를 쫓아오는 디아들.
사막을 배회하던 놈들마저 따라붙는 것이 가히 미친 어그로였다.
그 덕분에 사방으로 퍼져 있던 디아들이 한 곳으로 전부 모여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죽지도 않는 괴물들을 어찌 정리하느냐인데······
“문제없겠네.”
사막 너머를 바라본 내가 미소 지었다.
그곳에는 대검을 하늘로 들어 올린 소파아가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는 듯 두 눈을 감은 그녀의 대검으로 가공할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고오오······
하늘을 덮을 듯이 솟아난 혼마력의 검강은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 내 뒤를 디아의 군단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쫓아왔다.
***
“와요, 소피아씨.”
아멜리아의 부름에 소피아가 감았던 눈을 조용히 떴다.
그녀의 시야에 자신을 향해 쫓기듯 달려오는 이해솔이 보여왔다. 그런 이해솔의 뒤로는 디아의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정확히 소피아가 예견한 상황이 그대로 일어나자 아멜리아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해솔이라면 어떻게든 디아들을 끌고 올 거라며 소피아가 무한한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저렇게 올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역시 미리 둘이······”
“직감입니다.”
“네?”
“해솔님이라면 일단 저지르고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왠지 묘하게 납득이 가는 말에 아멜리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소피아는 자신의 답이 들어맞았음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해솔이 떠나기 전 나누었던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곧 있으면 마수떼가 나타날 거예요. 소피아가 처리해주세요.
그리 말하며 이해솔은 자신에게 한 가지 능력을 공유해주었다.
“잘 보입니다. 해솔님.”
소피아의 시야에 달려드는 디아들의 ‘영핵’이 선명히 보여왔다.
그녀가 융합력을 통해 공유받은 능력이란 바로 영혼을 보는 눈, 「선각자의 눈」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간섭조차 할 수 없는 영핵에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여자는 제가 맡을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엔마를 향해 움직이는 아멜리아를 흘낏 일별한 소피아가 다시 전방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해솔이 스스로를 미끼삼아 디아들을 끌고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고오오···!
소피아의 대검에 맺힌 혼마력이 가공할 빛을 뿜어내며 밝게 타오른다.
그 선상에 놓인 것은 모래 먼지를 피워올리며 달려오는 디아의 무리.
공격하기엔 지금이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해솔마저 휘말려버린다.
그렇기에 소피아가 적절한 순간을 노리던 와중이었다.
─쳐요!
이해솔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라는 신호.
그가 검강의 반경에서 벗어나려면 제법 거리가 남아있었으나 소피아는 그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대검을 내리그었다.
“하아압-!”
그녀의 기합성과 함께 혼마력의 검강이 사막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