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25.
쿠아아아앙──!
거대한 검강이 떨어져 내리며 선상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달려들던 디아들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고, 폭포처럼 일어난 모래 무더기가 세상을 뿌옇게 뒤덮는다.
“휘유~ 엄청나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그 파괴적인 광경을 구경하며 내가 혀를 내둘렀다.
소피아의 검강이야 언제봐도 굉장했으나 어째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해솔님, 괜찮으십니까?”
“예, 보다시피요.”
소피아에게 그리 답하며 나는 열린 아공을 닫았다.
검강이 덮쳐들기 직전에 소피아의 곁으로 아공의 균열을 열어 검강의 반경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것이다.
그 결과, 나를 쫓던 디아들은 고스란히 검강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녀석들이 자랑하는 ‘재생’은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쇄자로 영핵을 박살내버렸으니 쉽게는 복구 못하겠지.’
운 좋게 살아남은 디아들도 있었으나 놈들은 천우진의 검에 베여나가고 있었다.
스아악─
푸른 검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더 이상 디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검일멸(一劍一滅).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베기에 디아들은 맥을 못추었다.
그렇다고 천우진이 영핵을 베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쟤는 그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내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사기네.”
기실, 저것이야말로 천우진이 가진 사기성이자 검성의 참모습이었다.
검성의 기프트는 아무것도 고려할 필요 없이 무엇이건 베어버리는 권능이었던 것이다.
“쟤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고.”
엔마와 대치한 아멜리아에게서 터져 나오는 순수마력을 본 내가 중얼거렸다.
밤의 사막을 한낮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새하얗게 터져 나오는 마력.
저건 아멜리아가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풀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저 상태의 아멜리아라면 설사 상대가 유진의 종자라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사기투성이네.’
누구는 이렇게 땀 뻘뻘 흘려가며 개고생을 하는데.
소피아를 돌아본 내가 안쓰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힘들면 좀 쉬어요.”
소피아의 전신은 비라도 맞은 듯 땀으로 축 젖어있었다.
타샤와 싸움을 하고 연달아 검강을 뽑아내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쏟아낸 그녀였기에 탈진해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내 염려에 소피아가 나를 바라보며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죽을 만큼 힘듭니다.”
“그럼···”
“끝나고 나서 잔뜩 쉬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휴가를 선언한 그녀의 시선이 사막의 언덕을 향한다. 그곳에 서 있는 유진을 확인한 내가 쓰게 웃었다.
어딘가 망가지기라도 한 듯 유진에게서 우르크의 마력이 음산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으니.
그나저나.
“소피아가 쉬는 만큼 제가 일해야 하는데요?”
“예, 그래 주십시오.”
“왠지 부려 먹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맞습니다.”
“······.”
멍하니 입을 벌린 나는 소피아의 입가에 맺힌 짓궂은 장난기를 발견하고는 혀를 찼다.
······이거 완전히 꿰여버렸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고개를 내저은 내가 앞을 바라보았다.
“우선 저것부터 정리하죠.”
콰과과과과······
마력을 무분별하게 발산하는 유진은 이제 완연한 폭주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디아의 소멸이 녀석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유진이 세계를 개편하려는 이유는 바로 디아와 같이 ‘불멸’하는 마수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불멸하리라 단정지었던 디아가 눈앞에서 소멸해버렸으니 흔들릴 수밖에.
‘사실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니지만.’
유진의 생각대로 마수나 디아는 완전한 불멸체다.
우르크가 죽고 이터니티의 엔딩이 나오지 않는 이상 시스템적으로 마수는 끊임없이 순환하게 되어있었으니까.
당연히 디아 또한 영구적으로 소멸한 게 아니었다.
소피아의 분쇄자에 영핵이 부숴짐으로써 일시적인 소멸상태가 되어버린 것뿐이지.
그건 천우진이 없앤 디아들도 마찬가지였다.시간이 지나면 분명 되살아나리라.
하지만 이를 모르는 유진으로서는 디아들이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일 터였다. 실제로 지금 녀석들은 소멸된 상태였으니까.
이는 유진이 세계를 재편하려는 목적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리는 유진의 정신을 우르크의 망령이 파고든 것이다.
“소피아, 내가 신호하면 놈을 베세요.”
“알겠습니다.”
소피아의 대답을 들은 내가 유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 끝을 내야 할 시간이었다.
***
휘이이······
사막의 언덕을 중심으로 거센 마력풍이 휘몰아친다.
먼지조차 갈려 나가는 그 마력풍의 안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람의 비호를 받는 나를 이런 마력풍 정도로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추운데 후딱 끝내고 들어가죠.”
─훗, 그래야겠군.
마치 마실을 나온 듯한 내 말투에 그람이 나직이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평온한 대화와 달리 마력풍의 내부는 위험천만하기만 했다.
폭주한 마력이 휘몰아쳤으며, 죽은 자의 영혼이 사방을 배회했다.
흑귀(黑鬼).
자신이 죽인 자를 그림자로 부활시켜 조종하는 유진의 능력.
나는 덤벼드는 놈들을 그람으로 베어가며 전진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해솔.
문득 그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람이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처음이네요.”
─그런가?
“예. 예언자 아니면 그대라 했습니다.”
─훗, 그랬군.
“가려는 거면 안 보내줍니다.”
─그대는 참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빨라.
기가 막히다는 듯 말한 그람에게서 돌연 마력이 방출되어 나를 밀쳐놓았다.
다음 순간, 마력풍의 너머에서 푸른 해일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누구도 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세계의 의지. ‘억지력’이었다.
자신의 모든 마력을 세계의 붕괴에 쏟아부은 유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력에 오류를 일으킨 것이다.
나를 밀친 그람은 그 물결치는 억지력의 앞으로 나아갔다.
스스로를 희생해 이곳에 펼쳐진 억지력을 없애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람의 움직임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말했죠, 안 보내준다고.”
─······!
다음 순간, 물결치던 억지력이 유리처럼 무너져내렸다.
─이건······
“잊으셨어요? 나 외부인인 거.”
세계의 억지력이 작용하는 대상이란 어디까지나 ‘이터니티의 존재’다.
외부인인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억지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이다.
어지간한 억지력은 지금처럼 기력으로 쉽게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 하더라도 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죽는다.
“죽을지 살지는 해봐야 아는 거죠.”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세계가 붕괴해 죽을 처지였다.
─나를 사용하면 억지력을 없앨 수 있을 텐데?
“싫습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검인데, 죽어도 같이 죽어야죠.”
안 그러면 찝찝해서 내가 잠을 못 잔다.
─현명한 줄 알았는데 바보였군.
“성격이 이 모양이니 그람이 이해 좀 해주시죠.”
─이전부터 생각했다만, 그대는 마치 나를 인간처럼 대하는군.
“뭐, 다를 게 있나요?”
말만 통하면 그게 사람이지.
─나를 인간 취급하는 건 그대가 처음이다.
“그거 영광이네요.”
─훗.
별났군. 그리 말하는 그람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피식 미소 지은 내가 그람을 다시 거머쥐었다.
“그럼 가시죠.”
그렇게 나는 억지력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다.
휘아아아아─!
순간, 푸른 억지력의 파도가 내 몸을 덮쳐들었다.
마치 영혼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충격에 일순 정신이 뒤흔들렸으나, 나는 이내 억지력의 기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갈수록 짙어지는 기류에 점차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뭔가 뾰족한 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억지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따라야 했으니.
다만, 그 희생이 꼭 그람일 필요는 없었다.
휘아아······
물결치는 억지력을 바라보는 내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선각자의 눈].
영혼조차 꿰뚫어 보는 눈이 억지력의 중심과 그 너머의 유진을 응시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직-!
억지력의 벽에 거미줄처럼 금이 번졌다. 더불어 내 눈이 미친 듯이 아파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양 눈을 부여쥐고 무릎을 꿇었다.
“큭!”
억지력과 맞바꾸어 선각자의 눈이 부서져 내리고 있던 것이다.
아쉽기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눈이야 조금 덜 보고 살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이 고통은 상상이상이네.’
마치 불구덩이에 눈알을 넣고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악문 입가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도 그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선각자의 눈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뭐?”
파아아아아─!
놀란 내가 눈을 뜬 순간, 억지력이 무너져내렸다.
“크아아아아아!”
유진의 괴성이 사막에 울려 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머리를 부여쥔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소리쳤다.
“소피아!”
후아앙 ─!
외치기 무섭게 내 곁으로 광풍이 지나갔다.
소피아의 대검이 떨어져 내리며 유진을 좀먹고 있던 우르크의 망령이 부서져 나갔다.
“크아아아악!”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망령에게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폭주하는 녀석을 가만히 응시하던 내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세계의 붕괴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껍데기만 남은 녀석의 폭주는 그리 두려울 게 아니었으니.
여전히 위협적이고 굉장한 마력을 발산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쪽도 원군이 도착을 한 것이다.
어느새 마력풍이 걷혀나간 사막의 언덕. 그 주변으로 수많은 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차시우, 고르고프, 은호성, 그레이슨, 한윤, 서하린, 가스턴, 웨인, 이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최상격의 초인들부터 십혈의 마인들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터져 나오는 우르크의 마력에 정신을 차리곤 달려 올라온다.
긴장이 풀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다리가 휘청였다.
“해솔님! 괜찮으십니까?”
놀란 소피아가 재빨리 나를 받아 들었다.
“소피아.”
“예, 해솔님.”
“아파요.”
“예?”
의아해하던 소피아는 내가 어깨를 가리키자 그제야 나를 잡고 있던 손에서 황급히 힘을 풀었다.
그 허둥거리는 모습에 픽 웃은 나는 몸을 기댔다.
예고도 없이 와닿는 무게감에 놀란 소피아가 움찔거렸다.
“···해솔님?”
“앉죠.”
“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억지력을 거슬러 오르느라 내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사막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이어지는 싸움을 구경했다.
마력을 폭주한 유진, 아니. 우르크의 망령은 어마어마한 힘을 선보였으나 녀석의 상대는 이터니티의 정점에 달한 초인과 마인들이었다.
그들은 노련하게 망령의 힘을 빼가며 차분히 녀석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나와 소피아가 말없이 구경을 하는 사이, 끝이 찾아왔다.
“허무하네요.”
“예, 그렇군요.”
내 말에 소피아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의 최후는 천우진의 기프트, 검성에 망령이 소멸하고, 차시우의 검에 목이 잘려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진은 죽었으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문제는 저건데.”
여전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사막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미간을 좁혔다.
유진은 죽었으나 녀석의 마력은 남아 세계의 붕괴를 이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붕괴는 사막을 넘어 이터니티 전역으로 번지리라.
하지만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균열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사막의 너머. 그곳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을 본 내가 중얼거렸다.
“해결됐네.”
두 사람은 바로 오두막으로 향했던 타샤와 잠에 빠져있던 노아였다.
타샤 맥도웰이 노아의 본체를 깨워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다.
그리고 노아라면 붕괴를 늦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랜 세월 균열의 진행을 막아온 베테랑이 바로 노아였으니.
뭐, 아예 멈추지는 못하겠지만······
“그 정도쯤은 알아서 해결하시죠.”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순간, 밤하늘에 누군가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환상이 보여왔다.
그나저나······
“그건 대체 뭐였지?”
나는 선각자의 눈을 희생해 유진이 펼쳐놓은 억지력을 부수려 했다.
그러나 선각자의 눈은 여전히 건재했고, 억지력은 부서져 내렸다.
그 풀리지 않는 의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모든 일이 끝나고 필드를 돌아나가는 길.
“안 알려줘도 되겠어?”
“응, 말하지 마.”
이리나는 한세연의 말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세연은 이번 싸움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
그것을 한세연의 곁에 왔던 이리나는 또렷이 보았다.
그런데 한세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이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니, 걸음이 가벼운 게 오히려 기분이 좋아보이기까지 했다.
이리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언제 이해한 적이 있긴 하겠냐만은······
그때, 저 멀리서 이해솔이 보여오자 한세연이 그녀를 남겨두곤 먼저 걸어갔다.
“진짜 좋아하나 보네.”
날듯이 걸어가는 한세연의 뒷모습을 보며 이리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런 여자가 좋아하는 이해솔은 정말 복을 얼마나 받은 건가를 궁금해하며.
***
“해솔아!”
여전히 의문에 잠긴 채로 길을 걷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만 놀라 발을 멈춰버렸다.
“야, 너······”
“응?”
내 반응에 한세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모습.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서는 무언가 하나가 빠져있었다.
===
▶한세연
보유 기프트 : X
===
천리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배고프지?”
“어, 그렇긴 한데 그보다······”
“밥 먹으러 가자. 카레재료 사놨어.”
내 말을 끊으며 팔짱을 껴오는 한세연. 그 모습에 픽 웃은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내 말에 한세연이 방긋 웃어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세상에는 어느덧 노을이 져오고 있었다. 그 위로 떠오르는 상태창.
===
[최종 시나리오 : 귀환]
수락하시겠습니까?
===
“배고프다, 가자.”
“응.”
밝게 웃는 한세연의 대답을 들으며, 내 곁을 따라 걷는 소피아와 보폭을 맞추며 일행과 함께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가 사라진 거리. 흐릿해져 가는 상태창에는 하나의 문구만이 남았다.
‘NO.’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