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화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연한 척했는지를. 이렇게나 살고 싶었다는 것을.
대단한 무림의 고수가 될 수는 없다고 해도 건강하게 뛰놀고 싶었다는 걸.
련의 눈동자 속 떠오른 별들이 반짝 빛났다.
“내 무병장수를 방해하는 건 다 없애 버릴 테다!”
자신이 과거에도 이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정체를 알지 못해 맥없이 고꾸라졌다는 사실이 억울할 정도였다. 그러나 련은 얼른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아냐. 이렇게 돌아왔으니 됐지! 좋은 생각만 하자.’
아직 완전히 건강해지지는 못했지만, 벌써부터 두 달 안에 영기를 어떻게 하라는 경고나 보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머리맡에 놓여 있던 부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먼저 영기를 써서 얼른 보유량을 줄이는 것부터 하자.’
그녀의 능력 중 하나인 ‘정화’를 써 보기 위해서였다. 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나더니,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공기가 청량해졌다.
그러자 보란 듯이 그녀의 영기 수치가 떨어졌다.
“우와!”
체력 : 4(1▲) / 100
영기 : 75(1▼) / 100
아주 조금이지만.
‘여기저기 공기를 다 정화하고 다니면 되겠는데? 걸어 다니는 공기청정기로 전직해?’
련이 그 생각에 신이 나서 방긋방긋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방 구석구석 곳곳을 부채질하며 공기를 정화했다.
그렇게 넓은 거처를 한 바퀴 다 돌았을 때. 갑자기 눈앞이 조금 어지러운 게 아닌가?
“어…… 어?”
체력 : 1(3▼) / 100
영기 : 79(4▲) / 100
주의 : 영기를 농축하지 마세요…….
“이 무슨…….”
련이 뜨악한 얼굴로 부채만 바라보았다. 영기 항목은 주사로 적은 듯 새빨갛게, 확 늘어나 있었다.
산꼭대기보다 훨씬 더 맑고 청명한 공기 속에서 련만 허무한 얼굴로 침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위가 온통 그녀가 흩뿌린 영기로 충만했다. 그렇게 공기를 정화하며 함께 깨끗해진 영기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되돌아오는 중이었다.
* * *
정화 : 2성 (1▲)
체력 : 4 / 100
영기 : 68 / 100
련은 거울을 노려보았다.
주의 : 영기를 50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합시다.
거울 위에 떠오른 글씨가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 표시를 구현할 수 있었다. 부채의 흰 면이나 넓은 소맷자락, 침상의 차양막, 거울, 대접에 담긴 수면 위에도.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서리가 앉기 직전의 가을이었는데, 그 이후로 해가 바뀌어 2월에 있는 생일을 넘기고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몇 달이나 꼬박 요양했다. 그동안 그녀의 명줄도 함께 요동쳤다.
두 달 남았습니다, 한 달 보름 남았습니다, 다시 두 달 남았습니다…….
‘그런데 영기를 대체, 이 이상 어떻게 쓴단 말이야?’
정화에 사용하는 것도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신명 나게 주변을 정화해 댔더니 정화가 2성까지 오른 건 좋았는데, 그 정화의 효과가 문제였다.
겨울에 접어들 무렵에도 련의 거처 창문 쪽 나무가 낙엽 한 장 떨어뜨리지 않고 생생히 푸르른 것이 사람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탓에 련은 창문 쪽에서 바깥으로 정화 연습하는 걸 멈추어야 했다.
‘련아 아기씨 처소의 꽃과 나무가 시들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신선이 련아 아기씨를 잠시 데려갔다 돌려준 게 분명하다’는 헛소문이 더 이상 퍼지기 전에…….
거기다 정화된 좁은 공간은 영기를 증폭하는 효과가 있어서 오히려 련의 몸에는 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힘을 안 쓸 수도 없으니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간단한 의술이라도 배워서 신통한 의원인 척하기라도 해야 할까?’
“련아! 련아, 어미 왔느니라!”
련이 이런저런 고민을 할 때 문이 벌컥 열리며, 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선녀가 섬세한 붓질로 이목구비를 그려 넣은 듯이 단정하고 아름답게 생긴 사람.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위지청이었다.
그 순간 련이 보고 있던 거울의 글씨가 빠르게 바뀌었다.
위지청
특성 : 미아 / 상속자 / 헌신적인 / 연리지
화산 검법 : 기초
낙성십이검 : 2성
자질과 오성 : 심안 3성 개방
고민 : 단목련이 건강해지는 것, 단목련이 행복하게 사는 것, 단목련의 미래
도움말 : 불필요한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 중요!
타인의 정보는 자신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익힌 무공의 성취가 몇 성인지 보이긴 했으나 그 밖의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질과 오성은 심안의 성취가 높아지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고민’ 항목이 특별히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당사자가 가장 최근 골몰하는 것.
‘내 건강, 행복, 미래라니…….’
유모 장 씨가 그렇듯, 위지청 역시 그녀를 볼 때면 항상 활짝 웃었다. 이 세상에 나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듯이.
하지만 진실로 그럴 리가 있겠는가. 걱정과 심려를 가눌 길이 없지만, 어린 딸에게 드러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 꼭 걱정을 덜게 해 드릴게요.’
무병장수는 그녀의 꿈과 희망이기도 했다. 비록 그녀가 겪은 미래에서는 이룩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스물 몇 살에 죽었지.’
혈라곡 놈들이 다시 날뛰면서 휘몰아치는 무림 정세에 떠밀려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다가 그만 영기를 어쩌지 못하고 까무러쳤던 슬픈 결말.
위지청은 지난 7년간 불러도 대꾸 없는 딸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련이 겪은 미래에서, 위지청은 딸이 스물을 겨우 넘기고서 요절하자 눈물에 젖은 채 말라 죽었다.
련은 애써 과거 일을 떨쳐 냈다. 어차피 오지 않을 미래다. 지금 그녀는 많은 걸 볼 수 있고 더 많은 걸 할 수 있으니까.
“우리 딸! 빙당호로 먹고 있었니?”
위지청은 곧장 련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울 위에 떠올랐던 글자가 흩어졌다. 련은 그녀에게 사르르 안겨 들었다.
“어머니! 오셨어요? 이건 약당 당주님이 만들어 주셨어요. 새콤달콤하고 맛있어요.”
위지청은 방울 소리처럼 영롱하게 말하는 련의 목소리를 들으며 또 미소 지었다.
련은 그 표정을 보며 먹고 있던 빙당호로의 열매 한 알을 빼다가 위지청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 몸으로 7년 만에 일어나서 말문을 텄으니 처음에는 말투가 몹시 어눌했지만, 가진 능력 중 조화의 힘 덕인지 금방 또박또박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아주 맛있구나. 련아 때문에 폐관 수련도 도중에 깨고 나오셨으면서 이걸 또 신경을 써 주시다니…….”
위지청은 련의 작은 숙부이자 약당 당주인 단목현우에게 답례품 보낼 걸 일러 주곤, 데려온 하인을 향해 손짓했다.
“자, 련아야. 어미가 가져온 것을 보련?”
하인이 련 앞에 가져온 것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굵은 나뭇가지 사이로 흰빛이 나는 작은 쌀알같은 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아까부터 나던 달콤한 향기의 출처가 이것이다.
“네 방에 장식하려고 꺾어 왔단다.”
련이 얼떨떨한 얼굴로 꽃 무리를 쳐다보았다. 위지청이 환히 웃으며 하얀 백자에 꽃가지를 정리해 꽂아 넣었다.
“말리꽃이란다. 방에 두면 향기도 좋고 운치가 있겠구나.”
위지청은 그중에서 작은 꽃송이 하나를 련의 귓가에 장식했다. 그러고는 눈을 접고 환히 웃었다.
“어디까지가 꽃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인지 알 수가 없겠네. 그렇지 않은가, 장 씨?”
“그러믄요.”
유모 장 씨도 곁에서 말을 맞추었다.
자신이 진짜 여덟 살짜리라면 모를까, 련은 이런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위지청이 웃었다.
“우리 련아는 무어가 이렇게 부끄러운지.”
련은 창피함에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리면서도, 위지청이 귓가에 꽂아 준 꽃을 떼어 내지는 못했다. 위지청이 그런 련의 뺨을 쓸었다.
“오늘 보니 그간 말랐던 정원에도 새순이 돋았더구나. 죽은 줄 알았던 금목서 나무에도 다시 잎사귀가 돋아난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게 다 련아가 일어난 걸 만물이 축하하려고 그러나 봐.”
그게 아니라 아마 자신의 영기 때문이겠지만, 련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모친의 손에 뺨을 기댔다.
“성랑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지…….”
“마님…….”
손끝이 떨린다 싶더라니 위지청이 고개를 돌렸다.
련은 어깨가 흔들리는 위지청의 등을 보고 잠시 생각하지 못했던 걸 떠올렸다.
자신의 아버지, 단목현성은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동생 단목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위지청은 아직 련에게 그런 것을 일러 주기는 이르다고 여겼는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는 젖은 뺨을 닦아내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할아버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갈 거라는 얘기 들었지?”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련아를 낫게 하는 약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 할아버님이시거든.”
위지청이 조곤조곤 설명하며 유모를 물리고 직접 련의 옷깃을 여며 주었다. 아직 초봄이라 공기가 차가웠다.
“련아의 벌모세수 약에 들어가는 ‘만년지극혈보(萬年至極血寶)’를 내주셨어. 원래는 할아버님의 약에 써야 할 것인데 련아를 위해서 양보해 주신 거란다.”
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만년지극혈보까지 주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