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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화 (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3화

지난 생에선 이때 깨어나기는 했으되 영기 때문에 계속 심하게 아팠던 터라 조부를 제대로 만나 본 기억이 없어서 잘 몰랐던 일이다.

만년지극혈보는 땅의 힘이 만년에 걸쳐 극양의 기운으로 응축되었다는 전설 속의 물건으로, 그냥 먹으면 양기에 타 죽고 만다는 영약이었다.

자신의 벌모세수 비방에 이것을 썼다면 틀림없이 이를 제어하기 위해 음기를 가진 영약도 함께 들어갔을 것이고, 만년짜리 영약에 맞서려면 이쪽도 그에 못지않은 진귀한 약재일 터.

‘이런 게 전부 들어갔으니 벌모세수 한번 하려면 집 안 서까래까지 뽑아먹는다고 하지…….’

“련아도 할아버님을 뵙거든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인사 올려야 해. 알겠지? 정말 귀한 걸 련아에게 주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련은 사실 자신의 조부 단목천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자신이 엿본 기억 속에서의 단목천기는 계속 가문의 심처에서 두문불출하다가, 몇 해 지나지 않아 조용히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역시 몸이 안 좋은 곳이 있으셨던 걸까?’

만년지극혈보가 단목천기 본인을 위한 약에 쓸 거였다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약으로 만들어 복용하지 않은 건 그의 상태에 맞는 약을 제조하기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운 약을 써야 한다는 건 그만큼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일 테고.

‘할아버지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명확하게 알아야겠어.’

련은 결심을 단단히 다졌다.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에는 당연히 집안의 안녕도 포함되는바.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무월검(無月劍) 단목천기가 천하제일인으로 건재했을 때는 절강성에서 감히 범접할 이 없었다는 단목세가였다.

하지만 그가 혈라곡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뒤부터 가세는 빠르게 기울었다.

거기다 하나뿐인 후계자 단목현성이 몇 년 전 금가장과의 비무에서 사망하자 크게 휘청였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단목천기도 사망하면서 단목세가는 ‘세가’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간 지탱해 온 가문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냥 ‘단목 씨’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 자신이 죽고서 몇 년쯤 더 지났을 땐 정말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이 힘으로 어떻게든 해야 해!’

그전엔 자신이 왜 아팠는지, 왜 아픈지, 왜 내공을 쌓을 수 없는 것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위지청은 유모 장 씨에게서 흰 털로 만든 목도리를 받아 련의 목에 둘러 주곤 그녀의 손을 잡았다.

태상가주 단목천기가 거주하는 월영재(月影齋)는 세가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 * *

까맣게 보일 정도로 색이 짙은 자단목으로 지은 월영재는 언뜻 보면 소박한 멋이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오래도록 간신히 관리만 해 온 탓인지 낡은 곳이 구석구석 보이기는 했지만.

입구에 서 있던 총관 강립이 기다린 듯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강립은 련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둘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은은하게 약초 내음이 흘러나오는 공기를 헤치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묵직한 주렴이 눈에 들어왔다.

“련아가 감사 인사 드리러 왔어요, 아버님.”

위지청이 부드럽게 말하며 련의 어깨를 감쌌다.

“흠. 아이의 몸은 좀 어떠하냐.”

주렴 안쪽에서 노인의 거칠고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목천기는 이대로 주렴을 걷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정말 좋아졌습니다.”

“당가 놈 말로는 기적과 다를 바가 없다더니.”

“당 의원님과 아버님 아니었으면 없었을 기적입니다. 련아, 감사 인사 올려야지.”

위지청이 대답했다. 노인의 목소리는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지만, 련의 상태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

과거엔 깨어나고 나서도 침상을 전전하느라 제대로 인사를 나눈 기억도 희미했다. 련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네! 할아버지가 주신 약 덕분에 다 나았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려고 왔는데…….”

련은 주렴이 매달린 곳을 올려다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안으로 가서 인사드리면 될까요?”

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이게 막고 있어서요.”

주렴 안쪽에서 움찔한 기색이 흘러나왔다. 이제 겨우 병석에서 일어난 어린아이가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곧 안에서 쇠를 긁는 듯 거칠고 비틀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흠. 고것이 맹랑하구나. 안으로 들라 하거라.”

련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얼른 작은 대나무 구슬을 꿰어 만든 주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

고풍스러운 나무로 만든 태사의에 조용히 앉아 있는 단목천기의 주름진 얼굴의 반쪽이 무시무시한 화상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마치 붉은 진흙을 엉망으로 덧댄 듯한 상처 자국이었다. 태사의의 손잡이 위에 올려 둔 왼손에 드러난 흉터 역시 마찬가지.

련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련이 벌모세수를 받기 전에 그는 이따금, 가만히 누워만 있던 자신을 남몰래 들여다보다 돌아가곤 했었으므로.

하지만…….

‘맙소사. 빛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여.’

마른침을 삼켰다.

요란한 알림이 눈앞에 번쩍 떠올랐기 때문이다.

* 심안 3성 (1성▲ ) 성취 *

자질과 오성 항목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성취별 상세 항목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단목천기와 마주하고 얼굴을 본 것만으로 자신의 심안이 한 단계 올라갔다.

그를 둘러싼 황금빛 광채에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번져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만이, 그 빛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련이 정신을 차린 건 그런 단목천기의 허리께에서 흘러나오는 다소 탁한 붉은빛을 보았을 때였다.

‘심안이 3성이 되면서 보이는 건가? 저것도 오래전 혈라곡을 깨부술 때 입은 부상이신 걸까?’

련은 얼른 소맷자락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그 위로 선경(仙鏡)을 띄웠다.

단목련

조화 : 7성 -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안 : 3성 -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정화 : 2성 - 생기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체력 : 5 / 100

내공 : 습득 불가

외공 : 미습득

영기 : 70 / 100

조화, 심안, 정화의 능력에 본 적 없던 설명이 한 줄씩 붙었다. 심안 3성이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단목천기

특성 : 무림을 지킨 / 힘줄 수집가 / 회한에 가득 찬 / 비익조

낙성십이검 : 11성(12성)

무한보 : 12성

유성진결 : 10성

자질과 오성 : 상-중 (上-中)

고민 : 단목련의 건강과 자질, 기울어가는 가세, 혈라곡 퇴치, 단목현요와 단목현우의 성취

보이지 않았던 자질과 오성도 보였다. 낙성십이검도 원래 12성까지 대성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그 힘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련은 혼란스러움을 빠르게 정리하곤 얼른 인사 올렸다.

“아! 할아버지…… 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목천기는 련의 인사에 눈썹을 꿈틀했다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가 쥐고 있어도 쓰지도 못할 것이라 네게 준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귀하지 않은 약재라는 뜻은 아니다. 알겠느냐? 네가 이리 가문의 기대를 받은 만큼 그에 응하기 위해 정진해야 할 것이니라!”

단목천기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실내에 울려 퍼졌다.

련은 탄식을 삼켰다. 저렇게 태양처럼 빛나는 광채를 가진 사람이 어쩌다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조용히 세상을 떴을까?

하지만 지금은 안타까움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네, 할아버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단목천기의 부상을 해결하면 그의 남은 수명을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라면 가능할 게 분명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영약이나 영물은 대개 극단적인 성질을 띠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그리된 것이다.

가령 만년설삼은 극음의 성질을, 자신의 처방에 들어간 만년지극혈보는 극양의 성질을, 인면지주(人面蜘蛛)나 독각괴룡(毒角怪龍)의 내단은 극독을 띠고 있어서 이런 것을 섭취하려면 상성을 보완할 것이 필요했다. 그냥 먹으면 혈맥이 얼어붙거나 불타 죽게 되니까.

심지어는 이렇게 보완하고 정제하여 만들어낸 영단도 함부로 섭취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크고 영험한 힘은 그 자체로 독이 된다.

단목천기가 만년지극혈보를 가지고만 있었던 것도, 그의 처방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영약들의 상성을 서로 보완하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원래 영기라는 게 한꺼번에 많이 흡수하면 독이 되지만,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게 하면…….’

하지만 자신의 힘은 다르다. 음과 양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정순한 영기 그 자체였다.

흡수하면 약한 부분을 받쳐 주고 강한 부분을 보완해 주며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감싸 줄 수 있는 힘.

영기를 담는 그릇인 련이 그걸 버티지 못하고 우화등선하고 만 건, 한 숟갈도 조심해야 하는 영기가 파도처럼 몰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근히, 긴 시간에 걸쳐서 이 영기를 정제해 할아버지에게 전해 주면?

그렇게 할아버지가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영기가 쌓이기 전에 쓸 수 있고, 세가가 혼란에 빠지는 걸 막아 만년지극혈보에 대한 빚도 갚을 수 있다.

‘무려 일타삼피! 아, 아니. 일석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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