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4화
련의 기대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단목천기의 기운이 조용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입을 새끼 오리처럼 삐죽이고 있느냐?”
련은 놀라서 얼른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 웃었다. 그래도 조부라고, 손녀가 귀여워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흠. 가까이 와 보겠느냐?”
단목천기가 가까이 오라는 말을 마치 어려운 과제라도 내주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련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련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긴 했으되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단목천기는 자신이 가까이 오라 말을 했으면서도 막상 그녀가 이렇게 대뜸 다가올지 몰랐는지 조금 당황했다.
“네…… 네가 이리 정성을 다해 인사를 하러 왔으니, 나도 빈손으로 보낼 수야 없지.”
단목천기는 그렇게 말하더니 허리춤의 옥으로 만든 노리개를 풀어 곁에 선 총관에게 내밀었다.
노리개를 알아본 총관의 눈동자가 휙 커졌다가 겨우 원래대로 돌아와서는 조심스럽게 옥 노리개를 받쳐 들고 련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질 좋은 옥을 정성껏 다듬어 만든 물건을 단목천기 정도 되는 사람이 오랫동안 곁에 두어서인지, 반지르르한 옥 노리개에는 청량한 기운까지 감도는 듯했다.
련은 총관이 내미는 옥 노리개를 사양하지 않고 얼른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 순간…….
‘어?’
마치 빈 바구니에 손을 넣은 듯한 기묘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옥 노리개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일류 고수가 오랜 시간 매만진 양지옥 : 영력 용적 14]
‘영력 용적? 무슨 말이지?’
련의 생각과 동시에 글자가 사르르 변했다.
영기를 담으시겠습니까?
도움말 : 좋은 돌에는 영기가 깃듭니다. 질 좋은 돌일수록 많은 양의 영기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담을래! 담을게!’
영기 : 49/100 (14▼)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영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며, 순식간에 ‘영기’ 항목에서 붉은 기가 사라졌다.
그 덕분인지 몸도 한결 가뿐해졌다.
‘좋은 돌에는 영기를 담아 둘 수 있다고?’
지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련은 단목천기가 준 옥 노리개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아…… 이전엔 가문이 기운 탓에 이런 보석을 만져 볼 기회가 별로 없었지…….’
조부와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갑자기 이 옥이 금강석보다 더 아름답게 번쩍번쩍 빛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 노리개를 준 단목천기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듯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옥 노리개를 보는 련의 얼굴이 너무나 환하게 반짝이자 도리어 단목천기가 좀 당황했다.
“크, 크흠. 이…… 이게 마음에 드느냐?”
“네! 할아버지!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좋아요! 정말 감사해요. 정말 너무…….”
련은 기쁨으로 가득 차 반쯤 울먹거리고 말았다.
이 망할 영기를 어떻게 50 밑으로 떨어뜨릴지 여간 고민되는 일이 아니었는데, 이게 이렇게 단숨에 해결되다니!
“조, 좋으면 좋은 것이지 왜 울고 난리냐! 세가의 장손이란 것이 이리 경망해! 썩 그치지 못하겠느냐?”
“아, 아니에요! 안 울었어요!”
단목천기는 울먹이는 손녀딸을 보다가 헛기침했다.
“그럼 됐다. 달리 더 필요한 건 없느냐?”
“아니에요, 아버님. 련아한테 약도 내주셨는데…….”
위지청이 부드럽게 웃으며 사양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련의 머릿속이 번뜩이는 게 더 빨랐다.
지금 당장 급한 게 있지 않은가?
“아! 할아버지! 저 있어요!”
“흠. 그게 무엇이냐? 내당주는 가만있거라. 세가의 장손이라면 응당 원하는 바를 당당히 말하는 패기는 있어야지.”
련이 외치는 모습이 버릇이 없기보다는 당당한 모습으로 보인 듯했다.
위지청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련을 꾸짖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저 무공 배우고 싶어요!”
그러나 외침과 동시에 련의 앞뒤로 찬바람이 스산히 불어왔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뭐…… 뭐야?’
장손이 눈을 뜨자마자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기특해할 줄 알았는데?
“……무공을 배우고 싶어?”
“네, 전 이제 벌써 여덟 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단목천기가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에 위지청이 련을 끌어당겼다.
“련아야, 우리 련아 무공은 조금만 더 건강해지면 배우는 게 어떨까?”
“네? 저 이제…….”
영기가 쌓여있을 땐 몸 상태가 조금 나빠지긴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완전히 멀쩡해지지 않았나?
하지만 련은 입술만 오물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위지청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어, 어머니. 왜…… 울지 마세요…….”
“아니야, 안 울어. 우는 거 아니야. 그냥 련아가…….”
어머니는 울려고 하고 할아버지는 말 한마디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더 무공 얘기를 꺼낼 수 있을까.
‘그렇게 걱정이 되시는 걸까?’
딸이 산송장이나 다름없다가 눈을 떴으니 걸음마 하나하나에도 노심초사하게 되는 가보다, 련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그러면 무공은 조금 뒤에 배울게요!”
“그래, 그러자. 우리 련아 착하지.”
“……때가 되면 내가 직접 가르칠 것인즉. 련아도 내당주도 마음 조급히 먹지 말고 보양에만 신경 쓰도록 해라.”
“예, 태상가주님.”
위지청이 얼른 몸을 굽히고 인사하며 련을 감쌌다.
그 모습을 보고서 단목천기가 손을 휘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손끝에 매서운 기색은 없었다.
* * *
“아이가 곧잘…… 걷는구나.”
“허 의원 말이 아직 몸이 단단히 여물지는 않고 기력이 쇠한 상태라 주의가 필요하긴 하다지만, 그 밖에 다른 이상은 없고 오히려 아주 명석하시다고 놀라셨습니다.”
총관 강립이 얼른 말을 받았다.
“지난 7년, 거의 8년간 내당주님께서 오죽 애쓰셨습니까.”
총관 강립은 그 말을 하면서 답지 않게 조금 울컥했다.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도 울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인 위지청의 노력 덕분이었다.
단목련을 낳기 전까지만 해도 몸이 약해 약을 달고 살던 사람이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더니, 의원들도 놀랄 만큼 건강해져서 아이를 건사하는 데 모든 걸 쏟아부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바보는 아닌 듯하기는 했지.”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허 의원이 놀랄 정도로 명석하셨다니까요.”
“흠. 내 얼굴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장하긴 하더구나.”
이십 오 년 전 혈라곡을 상대하며 그들의 독을 뒤집어쓰고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어 큰 상흔을 남겼다.
그 전에도 매서운 인상이었던 단목천기가 흉터까지 얻은 뒤로는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요?”
“한데 그건 성현이 녀석도 그랬지.”
“아니, 가주님…….”
“태상가주래도!”
총관 강립은 천고의 기재로 이름 높았던, 이제는 죽고 없는 아들과 몇 달 전 깨어난 손녀를 비교하는 단목천기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단목천기의 눈빛이 흉흉해져서였다.
“말 좀 잘하고 좀 잘 걷는다고 명석하다 할 거면 항주에 안 명석한 아이가 어딨겠나?”
“그도 그렇습니다만…….”
총관 강립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아기씨는 깨어난 지 이제 겨우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요 근래 단목천기의 표정은 예전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달랐다. 그도 손녀가 깨어나 더없이 기쁜 것이다. 아무렴, 그의 친손녀 아닌가.
“련아 무공은…… 향후 아이 상태를 봐서 결정할 것인즉. 주위에 무공 얘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없도록 입단속 시키도록.”
“예!”
강립이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단목천기의 눈길이 창밖을 향했다. 손녀딸과 며느리가 걸어간 쪽이었다.
* * *
단목세가의 주방 소속 하인인 전 씨는 아직 단목세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도 하여서 주방에서도 여러 가지 잡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새벽에 들어온 식자재의 상태를 확인해 정리하고, 부엌 안팎을 쓸고 닦고, 그리고 뒤뜰에 마련해 놓은 조그만 양계장에서 매일 신선한 달걀을 수확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하지만 전 씨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가꿔 온 불꽃이 하나 있다. 지금은 그저 다 기울어 가는 세가의 부엌 잡일꾼이지만, 절강성 제일가는 숙수가 되는 것이 그의 원대한 꿈이었다.
“이렇게 섞으면 돼?”
‘하지만 이래서는 천하제일 숙수가 되기 전에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이 아닐까?’
정오가 되기 전이었다.
자신이 돌보는 닭장 앞에 흰 옷차림의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전 씨는 보자마자 알아챘다.
소매 끝까지 모두 새하얗고 단정하게 마감한 백의는 단목세가의 혈족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예전에는 흰 비단에 은빛 자수를 놓은 옷이었다가 지금은 많이 소박해진 것이지만, 어쨌거나 저렇게 흰옷은 보기 드물었다.
혼비백산한 전 씨를 두고서 이 작은 아기씨가 당당하게 말했다.
─ 이거 닭 모이는 언제 줘?
즉 닭 모이 주는 일을 거들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얘기였다.
전 씨로서는 세가의 장손과 함께 닭 모이 배합을 하고 있으려니 앞날이 칠흑 같다고 느끼는 게 온당했다.
그건 이 장손을 모시는 유모도 비슷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