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화
“흠, 그러니 상을 주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도록 해라.”
“상이요?”
손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목천기는 손녀가 요즘 좋아라 한다던 천민 아이를 떠올리던 참이었다.
식자재 들이는 상인을 따라다니며 잡일을 하는 아이라는데, 천애 고아에 신세 지는 곳도 없다 하니 어려서부터 세가에 들여 손녀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럼 저 이제 정말로 무공 배우고 싶어요!”
* * *
영기를 어떻게 더, 더, 더 많이 쓸 수 있을까?
이것은 최근 련의 가장 핵심 화두였다. 자신의 명줄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고, 단목천기의 남은 삶도 여기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고 단목천기에게 영기를 그대로 밀어 넣으면 그가 소중히 가꿔 온 작은 샘에 바닷물을 쏟아붓는 것과 같다. 즉 모든 걸 망치게 된단 이야기였다.
그렇게 방법을 골몰하던 련에게, 단목천기는 이번에도 동아줄을 내려 주었다.
‘다도!’
쓰고 딱딱한 찹쌀떡을 만들었다가 크게 후회했던 련에게는 다도라는 것이 선계로 올라가는 구름길처럼 보였다.
찻잎을 떠올릴 때, 따뜻한 물에 적실 때, 개완을 살짝 흔들 때, 모든 차례에 차근차근 영기를 걸러 넣을 수 있는 데다가 상대가 그 자리에서 곧장 마시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
그 덕분인지 최근 련은 안색도 기분도 한껏 좋아졌다. 영기도 쓰고, 할아버지는 점차 호전되고,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직도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좀 녹았을 때 말하면 될 줄 알았는데.’
세가의 상황은 빈말로라도 양호하다고 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도 아슬아슬해 보였다. 장원은 거대하긴 했으나 쓰지 않는 공간이 많고 사람도 적어 황량한 구석이 곳곳에 있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 했던가? 세가가 버티고 있는 것도 단지 그 덕인 듯했다.
‘문제는 내가 바로 그 마지막 삼 대째라는 거지.’
하루라도 빨리 가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정말 뭐 하나 남는 것 없이 쫄딱 망한다. 그녀가 보고 온 미래가 그랬지 않은가!
차라리 지금의 장원을 처분하고 좀 더 작은 곳으로 옮겨 갈 수 있다면 남은 가산이라도 추스르기 편할 텐데, 또 가문의 역사가 한껏 담긴 이곳을 정리한다는 건 재기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뜻이라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고모이자 가주 대행인 단목현요가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에서 뭔가 애를 쓰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렇게 남의 손을 빌려서 가세를 일으켜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러니 장손인 자신이 뭐라도 배우겠다고 하면 당장 그러마 할 줄 알았다.
‘글씨부터 떼라고 할 줄은.’
이것도 뭘 배우는 것이기는 하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글자를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어서, 련은 얼마 전 폐관 수련을 관두고 나왔다는 숙부 단목현우에게 붙잡혀 꼼짝없이 글을 배우게 생겼다.
“닭이 이상하게 생겼어요.”
“이상하게 생긴 게 아니라 멋지게…… 생긴 거지.”
련은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서 닭을 보고 있는 화륜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 소년은 여전히 작은 짐승처럼 보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혈색이 좀 좋아졌다.
종종 이렇게 만날 때마다 그녀가 주먹밥이나 만두라도 꼬박꼬박 먹이는 덕이었다.
사실 화륜이 그대로 떠나가서 영영 볼 수 없게 될까 봐 반쯤 울먹거리며 유모에게 부탁해서 그를 찾아 잘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유모는 련이 출신 성분도 불분명한 아이에게 지나치게 관심 기울이는 걸 걱정하면서도 련이 정말로 울까 봐 헐레벌떡 화륜이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 왔다.
‘어쩌다 항주에서 천산까지 가게 된 걸까? 어떻게 조금만 더 친해져서 세가에 들어오라고 해 볼까?’
“이거 거의 봉황 아니에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련은 화륜의 말에 작게 웃음 지었다.
이 꼬마가 차기 마천교 소교주라고 생각하면 등골이 선득할 때가 있는데, 누나라고 꿀밤 좀 먹였더니 금방 말끝을 높이며 닭을 보고서 봉황 운운하는 천진한 구석을 보면 귀엽기도 했다.
“아냐. 오골계라는 거거든. 뼈까지 까만 닭이야. 그치, 흑월아?”
닭장 안을 표표히 거닐던 새카만 닭이 그녀를 보곤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하지만 새까만 눈동자 위로 붉은 광택이 돌아 유난히 총명해 보였고, 깃털 끝자락은 따뜻한 붉은 기가 일렁거리는 듯했다.
‘분명 처음엔 저렇지 않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닭이 이상한데.”
화륜이 눈을 모으며 오골계와 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련은 뺀질거리는 화륜의 뺨을 한번 잡았다 놓아주고는 품에서 주먹밥을 꺼냈다.
“꼬맹이는 이거나 먹어.”
“아기씨도 꼬맹이인데.”
화륜은 곁에서 유모 장 씨가 련을 아기씨, 아기씨하고 부르는 걸 귀담아듣고는 곧잘 그렇게 불렀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공손하진 않았지만 련도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
화륜은 주먹밥을 그냥 주면 도통 먹으려고 들질 않아서, 련은 그걸 반으로 쪼개고 다시 남은 것을 반으로 쪼개 화륜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그간 생각했던 얘기를 꺼냈다.
“륜아야. 너 글자 아니?”
“아기씨는요? 알아요?”
“넌 꼭 대답을 안 하고 다시 물어보네.”
“제가 어디서 글자를 배우겠어요?”
말을 하는 것만 보면 천자문은 이미 다 뗀 것만 같구만 뭘. 련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 그럼 나랑 같이 배울래? 나도 아직 글자를 모르거든.”
“아기씨는 왜 모르…….”
뭐라고 반문하려고 했던 것 같은 소년이 말끝을 흐렸다. 련은 약간 민망한 얼굴로 뺨을 매만졌다.
명문 세가의 장손이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글자 하나 모르는 건 내도록 누워만 있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숙부님한테 배우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하자. 저녁에 배울 거야. 숙부님도 좋다고 하셨어!”
화륜은 이해하기 어렵단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련은 대답을 듣지 않고 주먹밥을 계속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화륜이 손을 휘저어 주먹밥을 피했다.
“저는 안 좋은데요?”
“왜?”
“제가 글자를 배워서 뭐에 써요.”
련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져서 주먹밥만 계속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그래야 나중에 커서, 응? 무공 비급도 읽고 그러지. 이 누이가 다 알려 줄게.”
화륜이 주먹밥을 꼭꼭 씹어 삼키곤 말했다.
“전 무공 안 배울 건데요?”
너무 당황스러운 말을 들은 터라 련은 눈을 함지박만 하게 뜨고 화륜을 쳐다보았다.
“뭐? 왜?”
련이 당황해서 반문해도 화륜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야 이런 세가에선 아무리 잘해 봤자 아가씨 도련님들 뒤치다꺼리나 한대요.”
“……!”
련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얘기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 그래서 륜아가 마천교로 들어갔나?’
거긴 가장 강한 사람이 위아래 눈치 보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가 그럴 만한 성격 같기는 하지만!
‘안 돼!’
“그…… 그럼 무림 세가 말고 저 섬서성에 있는 화산파라고 알아? 거기는 세가가 아니라 문파잖아. 실력만 있으면! 출신 관계없이 누구나 장문인이 될 수 있는! 정말 멋진…….”
“섬서성은 여기서 너무 멀어요.”
“야 이…….”
이 자식아! 마천교 본거지 천산산맥은 여기서 북서쪽으로 만 리는 떨어져 있잖아! 거기까진 멀어서 어떻게 갔냐!
련은 차마 그렇게는 외치지 못했다.
“그…… 그러면 어디서 무공 배우고 싶은데?”
“제가 배우고 싶어 한다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니, 그냥 배울 수 있다고 치고 말이야.”
어렸을 때는 터무니없는 희망이나 소원도 곧잘 빌지 않던가? 아흔아홉 칸 대저택에 들어가는 상상 같은 것도 하고 그러지 않나?
하지만 화륜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칼부림을 배우면 죽기밖에 더 해요? 그런 거랑은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제일이죠.”
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염세주의자는 대체 누구야?
‘천화륜이 어렸을 땐 이랬어? 이러던 애가 대체 뭘 잘못 먹으면 마천교 소교주씩이나 되지?’
설마 워낙 재능이 넘치는 천재라, 우연히 연이 닿았을 때 적당히 했을 뿐인데 소교주가 되고 만 걸까? 그건 그것대로 약 오르는 일이었다. 그런 련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화륜은 련을 붙잡고 계속 말했다.
“아기씨도 그런 거 하지 말아요.”
그녀보다 두 살 어린 소년이 말하기엔 몹시 의젓한 목소리였다. 그것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련은 재차 설득을 시도했다.
“그, 그래도…… 못된 혈라곡 녀석들이 공격했을 때는 몸을 지킬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생에는 백도 한 번만 하자! 제발! 천화륜!’
하지만 그 말에 오히려 화륜의 얼굴 위로 장난기 역력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못된 혈라곡에 맞서서 멋진 백도 무림 나리들이 구해 주겠죠.”
무림 전체에 대한 약간의 냉소까지 어려 있는 말이었다. 련은 입술만 달싹였다.
“아니, 그런데, 그래도 글자를 알면…… 편지도 쓸 수 있고.”
“종이가 있어야 쓰는데.”
“글자를 알면 종이를 살 돈을 벌 수도 있어. 밥도 살 수 있고, 나중에는 집도 살 수 있어.”
“왜 저한테 이렇게 글자를 알려 주려고 하세요?”
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냐고?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