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화
그야 네가 다 자라서는 내 부탁도 거절하는 냉정한 인간이 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고, 그렇게 네가 장차 마천교 소교주가 될 몸이기는 해도 이번 생에는 한 번만 같은 정파 무림인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싶기도 했고, 또 그게 아니더라도 친해지면 나중에 수틀렸다고 당장 날 죽이진 않을 것 같고, 그리고…….
련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가 스르르 다물었다.
마천교가 후학을 따스하게 보듬어 키우는 곳이 아니라는 건 무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는 교주 후보들끼리 경쟁시켜서 살아남는 애만 쓰는 곳이라는데.’
지금 또래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렇게 가혹하게 훈련시키고, 또 듣기로는 흡성대법(吸星大法) 같은 것도 익힌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내공을 흡수하는 것 말이다.
내공을 주는 쪽이 될지 받는 쪽이 될지는 하늘이 결정하겠지만.
‘아니, 구천현녀(九天玄女)를 모신다는 놈들이 그렇게 잔인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마천교의 본거지는 여기서 만 리 밖에 있는, 청해성 너머의 기후가 매서운 곳이다. 중원의 동쪽에 있는 절강성과는 끝과 끝이기도 했다.
화륜은 이곳 항주에서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
마천교에서 그의 무재를 알아보고 납치라도 했을까? 그런 거라고 해도 여기서 천산산맥까지 가는 만 리 길이 안락했을 턱이 없다.
“그건…….”
화륜이 세가 안에 있으면 납치야 당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납치당한 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 애가 자의로 마천교에 몸을 의탁한 거라면.
세상에 달리 기대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 저 만 리 길을 걸어간 거라고 한다면.
그럴 일을 없애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이렇게 작고 마른 어린애가 북쪽 땅까지 떠날 일은, 그런 고되고 가슴 아픈 일은 없는 게 좋지 않나.
그게……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던가.
세상 사람 모두를 구원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런 게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난 생의 마천교 소교주에게 각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의 눈앞에는 어린아이가 있고 그 애에게 만 리 너머로 떠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든 알려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냔 말이다.
‘아무리 얘가 이전에는 거기서 다 이겼던 애라지만, 지금은 또 독기도 많이 빠져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벌써 화륜은 칼부림 같은 거 해서 죽기밖에 더하냐, 그런 거랑은 거리 두고 사는 게 낫다, 이런 얘길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냥…… 나 혼자 배우기 심심하고…… 그래서…….”
“…….”
“륜아야, 진짜 글자 배우기 싫어? 응?”
글자라도 배워 둬야 나중에 뭘 해도 조금은 편할 텐데.
이 어린애를 어쩌면 좋나, 련이 속으로 한탄하며 간절히 쳐다보았다.
그 눈을 말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눈동자를 도르르 굴린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배울게요.”
“정말?”
화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련은 활짝 웃으며 주먹밥 나머지를 들이밀었다.
* * *
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련은 얼떨떨한 얼굴로 유모 장 씨와 어머니 위지청, 그리고 눈앞에 있는 소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어, 어, 어머니…….”
둘 다 련이 익히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하나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되었으나 벌써부터 목검을 들고 설치느라 바쁜 그녀의 남동생 단목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화륜이라고 했지? 좋은 이름이구나. 비아와도 연배가 맞으니 무엇이든 함께 배우고 익히면 좋겠다 싶어서 집안으로 들어오라 권했느니라.”
깨끗하게 씻은 뒤 거적때기를 벗고 정갈한 흰색 무복을 걸친 화륜은, 감춰졌던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드러나 이제 와서는 오히려 귀한 세가의 도련님처럼 보였다.
련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어머니 위지청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닭장 앞에서 일꾼 소년과 만나 노닥거리는 걸 세가 사람들이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위지청이 그런 소년을 가문 안에 들여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몰랐던 건 소년이 그걸 냅다 승낙하리란 것이었지만.
‘고작 글자 가지곤 배우니 안 배우니 그렇게 나랑 실랑이를 해 놓고선…….’
련이 뜨악한 얼굴로 손발을 허둥거리자 화륜이 쌕 웃더니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됐어요, 아기씨. 잘 부탁드립니다.”
“아기씨! 잘 부탁드림미다!”
남동생 단목비가 나란히 서더니 화륜이 하는 양을 흉내 냈다.
위지청은 아들이 하인의 행동거지를 흉내 낸다고 책하지 않고 그저 귀여워하며 웃기만 했다.
“비아야. 누이라고 해야지.”
“누이! 누이!”
단목비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부르곤 도도도 달려와 련의 다리에 찰싹 매달렸다.
단목비
특성 : 힘줄 수집가 / 헌신적인 / 각인된 / 재기발랄한
자질과 오성 : 상-중
고민 : 오늘 누이와 먹을 간식 / 정영이 걷는 방식
‘내 동생이지만 얘는 진짜인 것 같아.’
련은 놀라서 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질이 단목천기와 맞먹을 정도. 거기다 고민 항목이 대단했다.
‘정영이 걷는 방식이라면 보법 얘기인가?’
정영은 련의 거처 담벼락을 지키고 선 무사였다. 련도 그를 보면서 그가 수련을 쉼 없이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놀라기는 했었다. 그냥 걸을 때에도 보법을 연습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단목비의 눈에 비친 듯했다.
‘얜 잘 자라기만 했으면 정말 천하제일인 비슷한 게 됐을지도 모르겠네.’
거기까지 확인을 하고 돌아왔어야 했는데 그 미래는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 안 돼, 안 돼, 안 돼……. 누이, 안 돼요. 가지 말아요, 안 돼요! 누이, 난 누이가 없으면, 누이까지 없으면 나는…….
─ 아무도 없는 세가를 잇자고 나만 살아서 무엇하자고!
─ 난 떠나고 싶지 않았어, 나도, 나도 남아서 세가 사람들과…….
오래되어 탁하고 흐려진 기억이 마구 이지러졌다.
눈물 젖은 얼굴로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손을 붙잡고 울며 매달리는 동생의 얼굴, 자신이 그렇게 죽고 난 뒤 마르고 날카로워진 얼굴, 비탄과 우울로 그늘진 표정이 차례대로 떠올랐다가 한데 엉켜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련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그러면 륜아도 누이라고 해…….”
“그럴까? 그게 좋겠구나.”
그냥 하인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오누이처럼 자라게 할 셈이니, 호칭이야 좀 편하게 한다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위지청이 빙긋 웃더니 화륜의 등을 조금 떠밀었다. 이번만은 화륜도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금방 표정을 되찾고는 쌕 웃었다.
“……련아 누이.”
련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이 글자들을 따라 써 보거라.”
“네!”
눈앞에 앉아 있는 선생의 말에 당차게 대답하는 건 단목비였고, 련과 화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붓을 움직였다.
단목비는 아직 손아귀 힘이 제대로 자리 잡을 나이가 아닌지라 다소 삐뚤빼뚤했지만 열심히 썼다. 련은 옆을 흘낏 바라보았다. 화륜은 집중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지만 글씨는 제대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
“셋 다 잘 썼구나. 검호거궐, 주칭야광. 검 중에서는 거궐검이 가장 유명하고 구슬 중에서는 야광주가 제일이라는 뜻이다. 야광주가 무엇인지 아느냐?”
선생이 조용히 글자를 설명해 주었다.
세 사람의 글 선생, 단목세가의 약당 당주는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 되는 청년이었다.
옥을 빚어 만든 듯한 얼굴의 소유자인지라 외출이 잦았다면 항주 저잣거리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법도 했는데, 열일곱 살이 되는 해부터 폐관 수련을 반복하느라 바빠 세가 밖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매의 어렴풋한 그늘만이 그의 마음에 깃든 심마를 짐작게 할 뿐이다.
련은 슬쩍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단목현우
특성 : 심금을 울리는 / 팔불출 / 문을 닫은 / 장난꾸러기
낙성십이검 : 7성(8성)
단천비검 : 5성
무한보 : 8성
유성진결 : 5성
자질과 오성 : 상-중 (上-中)
고민 : 단목련의 건강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 자신에 대한 의구심
도움말 : 근심 걱정 없이 푹 자는 것,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는 것이 최고!
서른도 되기 전에 가문의 주력 검법을 8성까지나 익혔다니, 심마에 흔들린 탓에 7성까지밖에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해도 그 역시 굉장하다 할 만했다.
‘숙부를 글 선생으로 쓰는 게 맞는 일일까? 괜히 나 때문에 심마(心魔)가 깃들어서.’
7년 전, 련이 갓 태어났을 때.
흑천련의 한 곳에서 세가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무림맹이 반으로 쪼개질 뻔했을 정도로 큰일이었다.
달이 겨우 뜬 한밤중에 일이 터졌다. 그때 이미 형을 뒤따라갈 만큼 천재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던 열일곱 살 소년 단목현우는 세가의 다른 검수들과 함께 세가의 적손이자 그의 첫 조카인 련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맏형 단목현성이 그와 비슷한 나이에 혈라곡과 맞섰으니 그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칼과 고성이 오가고, 갓 태어난 어린애였던 자신은 그 난리 통에 이리저리 옮겨지며 울음을 터뜨리고…….
그래도 련이 크게 다치지 않았고, 흑천련의 습격이 아니라 혈라곡의 잔당들 짓이었다는 게 밝혀져 얼추 마무리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백 일도 지나기 전에 련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모두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