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화
“어쨌든! 알아봐야지. 완전히 퇴치된 게 아닐 수도 있다고 하니까.”
“아. 그럼 누이네도 원수인 거네요?”
“무림에 얘네랑 원수 안 진 곳 없을걸? 어쨌든 말이야,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대비할 수도 있대. 그러니까 륜아도 글공부 열심히 해야 해.”
련의 말에 화륜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대신 가져온 그릇을 덮고 있던 천을 벗겼다. 그와 동시에 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어! 얼음이다!”
화륜은 익숙하게 련의 서랍장을 뒤져 부채를 찾아내고는 얼음을 앞에 두고 부채질해 주었다.
얼음을 거친 찬바람이 뺨을 스치자 련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히야아아…… 얼음이 어디서 났어?”
“바깥에서 일 좀 도와주고 얻었어요.”
“으응? 대체 무슨 일을 도와주고 어디서 얼음을 얻어 와?”
“포목점 주 씨가 아들이 아파서 얼음을 사 놨다길래, 내가 금방 낫게 해 줄 약초를 찾아줄 테니 대신 얼음을 달라고 했죠.”
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륜은 그렇게 말하며 건성으로 부채질을 했지만 련의 안색을 살피는 눈길은 어디 가지 않았다.
“네가 약초를……? 어떻게…?”
“예전에 같이 빈민가에서 뒹굴던 애랑 증상이 똑같았거든요. 갑자기 살이 확 빠지더니 엄청 창백해져선 뭘 먹여도 낫질 않고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데. 지나가는 도사가 산에서 나는 흑석초를 캐다가 먹이면 된다길래 그렇게 했더니 낫더라고요.”
“그랬구나…….”
련은 화륜의 소맷단이 엷은 황색으로 물든 채 젖어 있는 걸 발견했다. 흙을 묻혔다가 씻어 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가만히 살펴보자 화륜의 손가락 사이사이로도 생채기가 엿보였다. 흙이나 돌을 맨손으로 파내기라도 한 것처럼…….
“얼음이 있어도 더워요?”
“아, 아니야. 시원해! 엄청 시원해. 너무 좋다. 그, 그보다. 음. 륜아야. 너 진짜 무공은 안 배울 거야?”
“여기서 갑자기요?”
화륜이 부채질하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련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아직 글자 다 못 외웠는데요? 뭐 배우려면 글자부터 다 외워야 한다고 했잖아요.”
련은 화륜의 손에 들린 부채를 빼앗아다 그의 쪽으로 부쳐 주며 툴툴거렸다. 애써 영기를 살살 실어 보내면서.
“거짓말하지 마. 너 이미 다 외웠잖아.”
하지만 련의 말에도 소년은 입술을 쑥 내밀곤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아직은 모르겠는데요?’ 그런 뜻이다.
련은 그런 화륜을 붙잡고 추궁하려다 관두었다.
당장은 무공에 관심이 없어도 옆에서 배우는 모습을 보면 흥미가 동할지도 모른다.
특히 단목비와는 비슷한 또래니까 그 애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원래 이 나이 때는 하고 싶은 게 왔다 갔다 하니까.’
본인이 재능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면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아깝긴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흥미가 돋지 않는다면 그녀가 본 미래에서의 화륜은 그렇게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는 뜻과 같았다.
이번엔 그렇게나 싫은 일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면 누이는 무공 배워서 뭐 하려고 하는데요? 천하제일인 되기?”
화륜이 다시 부채를 빼앗아 련의 쪽으로 부쳐 주며 물었다.
무림 세가 식솔이 된 화륜이 이렇게나 무공을 배우기 싫어하니 뭘 배우게 해야 그의 장래에 보탬이 될지 내심 고민하던 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륜이 눈을 깜빡깜빡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라고요?”
“천하제일인이 뭐 내가 되고 싶다고 되나.”
“왜 맘대로 안 돼요? 무림인 중에 제일 강해지면 되는 거잖아요.”
“어? 어…… 그게 그렇긴 한데…….”
이것이 전직 마천교 소교주의 그릇인 것인가?
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눈매를 접고 아이 달래듯 웃었다.
“그렇게 마음대로는 안 되는 거란다.”
“그럼 뭐 하러 무공을 배워요? 천하제일세가 만들려고?”
“……왜 이렇게 천하제일을 좋아해?”
화륜이 큼직한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를 가만 쳐다보았다.
천하제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지금일까? 인성 교육이 중요한 때가?’
련은 주먹을 꽉 쥐고 차근히 입을 열었다.
“륜아야, 물론 열심히 해서 강해지는 것도 정말 좋지만, 꼭 천하제일이 아니어도 되지. 나는 그냥 다 같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을 정도면 돼.”
“그러다 남한테 뺏기면요?”
“그러니까…… 내 주변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강해지게 열심히…….”
“천하제일인이 뺏으려고 하면요?”
애는 앤가? 누가 누가 더 센지 경쟁하는 것이 딱 그 또래답다 싶어서 련은 방긋 웃으며 화륜의 뺨을 살살 쓸었다.
“그땐 친구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려고.”
“누이는 친구가 없잖아요.”
“……어…… 없기는 왜 없어.”
“한 번도 본 적 없는걸요.”
“앞으로 생길 거야. 그리고 너도 있잖아. 내 친구.”
화륜은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샐쭉한 것 같기도 하고, 도통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언제는 형제자매 같은 사이라면서요?”
“그…… 그렇지. 형제자매니까 더 서로 돕고…… 그렇잖아.”
“전 무공 모르는데도요?”
“무공을 모르는 거랑은 상관없어.”
“무공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요?”
“륜아가 옆에 있어 주는 게 도와주는 거지! 힘 날 수 있게 해 주니까.”
“아니, 무공을 안 배웠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거랑 상관없다니까.”
그냥 네가 살아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단 말이야. 련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나 도리어 그런 련을 보는 화륜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애잔한 듯도 했다.
마치 연못에서 달을 뜨려는 순진한 어린애 보는 듯이, 월궁항아님을 믿고 기도하는 꼴을 보는 양…….
“류, 륜아야?”
“에휴…….”
“왜! 왜 그런 표정을 해?”
“아니에요.”
화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못 어른스러운 동작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매미의 울음소리도 저물고 낙엽이 지고 련의 처소 주위에 금목서의 달콤한 향기가 만발하기 시작한 어느 날 아침, 련은 고민 끝에 몸을 일으켰다.
해가 겨우 떠오르는 시각이었던지라 세가 안은 온통 고요했다.
살그머니 문을 열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유모도 아마 자신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일 터였다.
련의 처소를 지키는 무사 정영만이 조금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련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고 ‘쉿’ 했다.
“아기씨…… 어딜 가십니까? 유모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련을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무사 정영은 자신의 조끼를 벗어 주었다.
그다지 질이 좋은 조끼는 아니었지만 아기씨의 방에 들어가 외투를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들어가라 마라 할 수도 없는 와중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련은 자신의 다리까지 내려올 것 같은 조끼를 매만졌다. 추위는 타지 않는 편이라서 굳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성의를 거절하진 않고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영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예?”
“손.”
“아! 네!”
“나 재경각에 가고 싶어.”
“음, 지금, 재경각에, 말씀이십니까?”
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영과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어 앞장섰다.
정영은 처소를 뒤돌아보며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손을 맞잡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어린애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서 더듬거리는 정영이었지만 련은 그를 어수룩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슬쩍 매만진 침의 소매에 사르르 떠오른 글자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름 : 정영
특성 : 진솔함 / 끈기 / 끝까지 가는 / 근성
낙성십이검 : 5성
무한보 : 3성
유성진결 : 3성
자질과 오성 : 중-상
고민 : 단목련이 새벽에 일어난 이유
도움말 : 근성과 끈기를 믿으십시오. 그것은 이따금 타고난 재능을 압도합니다.
맞잡은 손에는 굳은살이 있고 이 새벽에도 눈은 맑게 빛났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보법을 단련하는 중이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내 처소나 지키고 있을까?’
이런 사람이라면 단목세가의 정예 중 정예 타격대인 유성십팔숙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설마 가문 내 정치 같은 것에서 밀리고 만…… 그럴 리가 없구나.’
알력 다툼 같은 게 있기엔 세가 형편이 너무 내리막인 상황이었다.
‘뭔가 내가 도와줄 게 없나?’
련은 남몰래 심안을 발동시켰다. 련의 눈동자 위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련은 화륜을 처음 만났던 날 보았던 얘기가 뭔지 알아차렸다.
심안 4성은 단점을 볼 수 있는 능력이고, 조화 4성은 어긋남을 깰 수 있는 능력인데 이게 서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은.
‘단점을 알아보고 그걸 없앨 방도가 눈에 보인다는 얘기였구나!’
정영의 보법에서 뭐가 문제여서 성취가 더뎠는지, 그의 발걸음을 따라 궤적이 보였다.
그리고 그 단점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지도.